(17)
“뭐라구?”
“아.. 아냐. 수학이나 공부해라. 맨날 수학점수만 별로면서... 이과생이 그래서 쓰겠냐? 이 오래비는 오늘 피곤해서 이만 좀 자야겠다.”
“야! 귀신이 잠도 자냐? 그리고 네가 그 위에서 자는데 나더러 나중에 저 침대에서 자라고?”
“뭐 어떠냐. 깨다가 나랑 눈 마주치면 가위도 눌려보고 새롭겠네. 어차피 내가 잠들면 네 눈엔 안 보일테니 걱정마.”
“아씨! 내가 널 못 보는게 문제가 아니고 네가 날 볼거 아냐!”
“얘 이거 돌대가릴세. 잔다는 의미 몰라? 눈 감고 잔다고! 그런데 뭘 본다는거야. 내가 정말 웬만하면 더러워서 가겠는데 오늘은 좀 봐줘. 오늘은 정말 혼자 있기 싫어.”
한주는 등을 돌리고 반대편으로 누워 조용해졌다.
이미 오래 전 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살아 있던 시절부터 한주와 엄마의 관계는 이상했다. 유독 차갑고 무관심한 엄마를 보며 한주는 어쩌면 모성애는 본능에 속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고 느끼며 살았었다.
분명 현경은 한주가 우울증 약을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주는 현경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에 대해 알고난 후 한주는 내내 혼란스러웠는데 사실은 무엇 때문에 혼란스러운지 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애써 집중하지 않아도 어느 새 머리속은 내내 ‘알고도 일부러 방치했다는 것은 분명 의도가 되어 있던 장치’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덮히기 시작했다.
“담임이 조 미나 징계위원회가 아침부터 열려서 조회는 생략한대.”
아침 조회시간이 지나도 담임이 들어오지 않더니 교무실을 다녀온 반장 은주가 덤덤히 전달사항을 알렸다.
“조 미나는 어딨어?”
“오지랖 나셨네.”
윤조가 은주에게 묻자 지민이 큰 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징계 확정될 때까지 작은 교무실에서 끝없는 반성문 작성중.”
“정말 쟤 요즘 이상하지 않니? 실망이야…갈수록...”
윤조가 은주의 대답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자 등 뒤에서 승진이 들으란 듯 크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윤조는 잠깐 멈췄다가 이내 못들은 척 교실문을 빠져 나갔다. 모를일이다. 어쩌다가 조 미나의 일에 이토록 관여하게 되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지경이다. 윤조와 미나는 거의 상극에 가까울 만큼 달랐다. 미나 패거리들이 수연을 비롯한 반에서 공부 꽤나 하는 애들을 수시로 괴롭혔지만 윤조는 늘 예외였다. 험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다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던 미나가 유일하게 버려둔 아이는 윤조 하나였다.
미나가 갇혀 반성문을 쓰고 있는 작은 교무실은 2학년 담임 전용 교무실로 주로 수업이 없는 선생들이 휴식을 하거나 문제아들이 끌려와 근신을 하는 곳이었다. 긴 복도를 따라 걸으며 윤조는 머리속이 복잡했다.
‘나랑 무슨 상관이람. 괜한 짓 하다가 선생이나 아빠가 알게 되면 골치 아플텐데…’
“그러니까 오지랖 그만 떨고 지금이라도 발길 돌리면 되겠네. 네가 안 돕는다고 조 미나가 원망할 것도 아니고... 네가 돕겠다고 설치는걸 더 싫어할지도 몰라.”
한주는 아까부터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머리를 거꾸로 쳐박은채 따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똑바로 서서 못 걷냐? 참 넌 안 걷지... 어쨌거나 머리가 위에 있는게 맞는거 아니냐고! 내가 간이 커서 정말 다행이다.”
“잠을 설쳤더니 머리가 아파서 그래! 물구나무 서기가 얼마나 혈액순환에 좋은지 모르냐? 너도 거 엉덩이에 돌맹이 달고 앉아 있지만 말고 스트레칭도 좀 하고 물구나무서기도 좀 하고 그래라. 내가 옆에서 관찰해보니까 운동이라곤 안 하더만. 오래 살고 싶으면 운동도 좀 하고 그래. 고생만 죽어라 하고 서울대 붙었는데 허약체질로 요절하기 싫으면…”
“가뜩이나 심란한데 시끄러워 죽겠네 진짜. 성숙이한테 왕소금을 좀 빌리던가 해야지”
“나처럼 혼자 목숨 끊은 독한 영은 왕소금 따위로 안 돼. 아직도 귀신에 대해서 많이 모르는구만.”
한주와 옥신각신하는 사이 어느 새 윤조는 작은 교무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여전히 망설이던 윤조는 잠깐 멈춰서 있다 조용히 교무실 문을 열었다. 그날 밤, 단란주점 앞에서 엉망인 채로 소리를 지르고 있던 미나는 분명히 처절하고 절박해 보였었다. 그런 곳에 빠져들만큼 나약한 아이가 이런 상황들을 혼자 견뎌낼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교무실 안은 예상했던 것 처럼 아침 수업준비로 바쁜 선생들은 한 명도 없고 하얀 도화지처럼 표정이 없는 미나가 기계적으로 종이위에 흡연에 대한 끝도 없는 반성문을 작성중이었다.
“빚이 이백 맞냐?”
“... 석수 새끼... 입은 겁나게 싸. 아니 근데 그 얘기를 너한테 왜 한거래! 썅…”
“조용히 해.. 걔가 말한거 아냐. 어떻게 알게 되었어. 액수 맞아?”
미나는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며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네 일 아니니까 꺼져. 남의 빚 얘기 할라고 오밤중에 둘이 별관에서 회동한거냐? 누가 알기라도 하면 너네는 옴팡 뒤집어 쓰는거 알지? 누가 열 여덟 살 짜리 둘이 껌껌한데서 속닥거리는데 순수하게 봐주냐?”
“...그래서.. 네가.. 아니다. 어쨌건, 그 돈이면 너 지금 그 거지 같은 생활 청산하는거 맞아?”
“꺼지라고!”
“미친년! 빨리 대답이나 해. 누구는 욕을 못해서 안 하는줄 아나... 입에 걸레를 처물었어. 빨랑 대답이나 하라고. 그 돈이면 그거 때려치고 고등학교라도 얌전하게 졸업할건지.”
“걱정마. 훔쳐서라도 갚고 나올테니. 재수 없으면 감방을 가더라도 거기선 나올거니까.”
“돌대가리가 돌 낳는 소리만 하고 있네. 일단 해보는데 까지 해볼께. 언제까지냐? “
“... 하 윤조. 네가 조금만 시시했음 이미 싸대기 날렸겠지만... 짜증나게도 네가 쉰소리는 안 하는 거 알거든? 그래서 어떻게 구해주겠단건데? 다음 주 목요일까지 어떻게 학생 나부랭이가 그런 돈을 만들어내냐? 너 뭐 명품 이런거라도 있냐? 내다팔게?”
“훔치거나 뭘 팔거나 이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 목요일 밤 그 사람들 만나러 갈 때까지 줄께.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하면 벌어서 갚아라.
그리고... 반성문만 쓰지 말고 진짜 담배 끊고…”
윤조는 뒷통수에 ‘닥치라’는 미나의 목소리를 기대했지만 웬일로 미나는 조용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와주려고 해서 고맙다. 그리고... 나... 담배도 끊어볼께…”
“... 그래...”
“인간이 갑자기 좀 변할때는 말야,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지. 철이 들었거나 죽을 때가 다 되었거나... 그리고 망나니 같은 여자애가 철이 들었다... 이건 뭘 뜻하는걸까?”
“미쳤나... 뭔 소리야. 쟤 알고보면 좋은 애거든?”
“알고보면 나쁜 놈이 어딨나... 다 알고 보면 다들 사연이 한보따리인 법이지.”
한주는 여전히 이죽대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너 학원 다니기로 했어? 넌 원래 학원 안 다니고도 잘 하잖아.”
“응... 그래도 수학이 아무래도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서…”
윤조는 야간 자율 학습 불참석 사유서를 작성중이었다.
“그냥 체험판으로 다녀보는거야. 괜찮으면 계속 다닐려구.”
“하여간 욕심은... 아... 그나저나 네가 야자에 빠지면 난 모르는거 나올때마다 누구를 괴롭히나…”
“웬만하면 답 보고 외워. 다 자기 코가 석자라 물어보면 싫어해.”
“너는 안 그러잖아.”
“사실은... 네가 하도 물어봐서 차라리 학원가서 공부하려고. 흐흐”
“쳇...야자시간 내내 대호오빠한테 편지나 쓰게 생겼네.”
윤조를 개인교사로 쓰는 정수는 윤조가 야자 불참서를 작성해서 내려하자 무척 실망했다.
“원래 불참서엔 부모 사인이 들어가야 하는데 하 윤조니까 뭐... 부모님하고 얘기 된거지?”
“네, 깜빡하고 어제 사인을 못 받았어요. 학원이 오늘부터 시작이라…”
“그래, 수학이 좀 불안했는데 잘 생각했다. 열심히 해!”
담임은 별 의심없이 불참서에 본인 서명을 하고 다른 서류들과 함께 챙겨들고는 교실을 나섰다.
“이젠 학원도 나한테 말 없이 다니니?”
나갈 준비를 하려고 가방을 챙기는 윤조 옆에 승진이 어느 새 다가와 잔뜩 가시가 돋힌 소리로 말을 건넸다.
“미안. 나중에 다 얘기할께. 그렇게 되었어.”
“너 정말 실망스럽다. 차라리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는게 더 속 편하지 않니? “
“그런거 아니야... 아 정말…”
“... 하 윤조... 나 잠깐만 보..보..자…”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쏘아보는 승진앞에 쩔절매고 있는 중인데 성숙이 갑자기 나타나 윤조의 팔을 잡아 끌고 있었다.
“...어쨌건.. 승진아.. 나 지금 나가봐야 해서... 나중에 얘기해...”
“잠깐 얘기좀 해. 너랑 꼭 얘기를 해야해.”
“성숙아. 난 네가 왜 자꾸 나한테 이상한 쪽지를 주는건지 잘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그만 이상한 소리해. 이젠 좀 화가 나려고 하니까…”
“자꾸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네가 데리고 있는 그거.... 그거... 너무 위험해... 셋을 데려갈거야... 아냐 넷이 될지, 다섯이 될지도 몰라. 위험한 일이 생긴다고…”
윤조는 애써 성숙을 뿌리치고 걸으려다 흠칫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성숙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이 한주. 어딨어. 뭐라고 말해야 돼. 지금 얘가 네가 위험한 존재라고 말하는것 맞지?’
윤조는 당황해 한주를 찾았다. 한주는 여전히 윤조의 뒤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숙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네 뒤에서 날 노려보고 있..잖아...
어차피 여기선 말 못하겠군. 젠장... 내가 준비가 될 때 다시 말할께. 좋지 않아... 좋지 않다구.”
성숙은 한주가 서 있는 허공을 응시한채 입 가득 고인 침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대체 말 좀 해볼래? 쟤가 왜저리 너한테 쌍심지를 켜고 있는지? 너 나한테서 당장 떨어져야 하는거 아냐? 아 짜증나네…”
“나도 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아직 무당도 아닌 무당새끼가 눈에 뵌다고 놀래서 호들갑 떨어대는 걸 내가 어찌 아냐. 그리고 내가 너한테 붙어서 너를 도왔으면 도왔지 나쁘게 한거 있어?”
“도운건 또 뭐냐? 뭘 도왔냐?”
“내가 요전날에 선생 뜬거 다 알려줬잖아. 그정도면 도움 되는거 아냐?”
“그래 참 큰 도움 되었네...앗.. 저기 석수다. 이제 떠들지 마.”
“네가 떠들면 안 되는 거지.”
“거 참 귀신 주제에 꼬박꼬박 말대꾸하고 앉았네.”
“공부 너무 많이 해서 약간 돌았냐? 뭘 그리 혼자서 중얼대냐? 아니면 전교1등은 잠시도 안 쉬고 단어 외우고 그러는건가?”
학교 뒷문쪽에 노선이 나빠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 약속대로 석수가 서 있었다. 교복 넥타이는 일찌감치 치워버리고 교복자켓 단추를 풀어헤친 채 느슨하게 기대 앉아 껌을 씹던 석수는 혼잣말을 하며 걸어오는 윤조를 보자 놀려댔다.
“몇 번 버스 타야되지?”
“298번. 잘 안 오니까 좀 기다려야 돼. 근데 진짜 할 수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