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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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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Aug 22. 2024

04. 네가 내게 왔다…

(16)

말을 마치자마자 주정뱅이 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주는 예상했던대로 놀래지 않았고 조금 떨어져서 아줌마가 약국안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아니... 애가 학교 친구한테서 기억력이 좋아지는 약이라고 얻어 먹는다고 하던데 이 약 좀 봐줄수 있어요? 아무래도 약이라서 좀 걱정이 되어서…”


약사는 유리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놓인 알약을 들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건... 절대 먹이면 안됩니다.”


“아니! 왜요?”


“이건 굉장히 중증 우울증만을 위한 약이에요. 처방전 없인 구할수도 없고... 부작용이 무서운 약이라서 저희는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억력이나 집중력이 좋아지는 것 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잡생각이나 걱정을 없애는 약이니까요. 하지만 ... 문제는 이 약이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없애기도 한다는 사실이죠.”


“... 그게 뭐에요?”


“삶에 대한 의지... 한마디로 부작용이 심각한 자살충동인 약이에요. 미국에선 예전에 불법인 약이 되었죠.”


“어머... 이런... 정말 큰 일이군요. 이런 약이 아이들 사이에 돌았다니…”


“아무래도 약사로써 이 약이 아이들 사이에 퍼져 있는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군요. 따님이 다니는 학교가 어디죠?…..어??”


약사는 잠깐 고개를 숙여 메모지와 펜을 찾아 들었지만 이미 정체불명의 아줌마는 사라진 후였다.


“이 약을 네가 훔쳐 먹은거니? 아님 네 어미라는 년이 먹인거니?”


“반반이에요. 약에 대해 뭐라던가요?”


“반반은 무슨 말이냐? 

어쨌건... 옛다. 잘 갖고 있어. 이 약이 네가 죽은 이유니까…”


“하지만... 난 알다시피 독극물 중독으로 죽은게 아니라 목을 매달았는걸요…”


“목을 매달게 만든 것이 이 약이란 얘기다. 이 약은 기본적으로 너무 위험해서 시중에 유통이 안 된대. 대체 너네 엄마는 이 약을 어찌 구한건지... 어쨌건 부작용이 자살충동이란다.”


“..... 이모가.... 약사에요.”


“허허... 직업윤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이 많이 있군그래. 큰일이야. 어쨌건 여기 이 약에 든 성분들이란다. 아까 약사가 검색해서 메모하는 것을 슬쩍했지. 필요할지도 모르니 약이랑 같이 챙겨.”


기억이 난다.

바로 그 날이었다. 피아노 때문에 한바탕이 일어난 후 ...

한주는 가끔 부억 작은 서랍에 항상 들어 있는 엄마의 우울증약을 훔쳐 먹고 또 가끔은 새벽녁에 위스키를 한 잔씩 훔치기도 했다. 희한하게 약을 먹으면 부모에 대한 원망도 증오도 사라졌고 힘겹게 붙들어야 하는 공부에 대한 의지도 좀 더 강해지는 듯 했다. 그래서 약을 먹는 횟수는 늘어났고 급기야 자살 얼마 전 부터는 하루에 두 번씩 먹기도 했다. 한주가 ‘반반’ 이라 대답했던 이유는 분명 현경도 알고 있다는 것을 한주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도 현경은 단 한번도 한주를 의심하거나 묻지 않았고 약이 떨어지는 적도 없었다. 위스키가 줄어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며 완전범죄를 구사하던 한주도 마음 놓고 약과 술을 가져다 먹곤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많이 슬퍼졌다. 그의 엄마는 겉으로만 차갑고 냉정하며 그저 표현을 잘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그녀가 한주에게 끝없이 무관심했던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주는 그것이 과연 ‘무관심’이었는지... 혹은 그보다 더 추악한 ‘덫’인지가 혼란스러웠다. 설마... 그럴리 없어... 어떻게 자기 자식을... 그럴리 없다고 한주는 잠시 들었던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려 머리를 흔들었다.


“그거 알지? 원래 아리까리할 땐 처음 찍었던 게 답이란거...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오늘은 때가 아닌것 같군.”


주정뱅이 영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껄껄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어디갔나 했더니... 

뭐하냐? 귀신도 어디 아프고 그러냐? 약 사다주랴?”


“아... 이제 오냐? 

왜이렇게 늦게 다니냐? 기집애가 겁도 없이…”


“네가 갑자기 사라졌길래 다시 올줄 알고 기다렸다 왜!”


“여전히 멍청하군. 나를 기다리거나 찾아 다닐 필요 없어. 그런다고 찾아지지도 않을테고... 내가 너에게 가는거야. 네가 날 필요로 하면…”


“웃기고 있네. 저번 날에 내가 너를 불렀는데도 너는 나타나지 않았는걸?”


“...들었어. 그런 쓰잘데기 없는걸로 불러대지 마. 피곤하니까.”


“뭐래? 방금은 부르라더니... 너는 죽어서도 절대 성격이 좋은 놈은 아니야.”


“.... 죽으면 대부분은 더 나빠지지…”


“그나저나.. 이젠 어디로 가니?”


“어디로 가긴.. 네 방으로 가는 중이지…”


“왜? 왜 따라와?”


“오늘은.... 혼자 있기... 싫어... 무서워…”


이상했다.

귀신인 한주가 무섭다는 우스운 말을 했는데 전혀 우습지 않았다. 윤조는 한주를 흘끗 올려다 보고 아무 말 없이 앞장 서 걷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왔니? 아직 성적표 나올 때 아니던가?”


“...아직... 다음주에요…”


“그래... 들어가서 씻고 공부해라.”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아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윤조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가 늘 하던대로 윤조가 씻는 사이 간식거리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섰다가 윤조는 방으로 향했다.


“힘들지? 조금만 더 참자. 긴 인생에 이 정도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 잘 알지? 우리 윤조는 똑똑하니까... 그리고..”


“공부할께요.”


들어봤자 별 위로도 되지 않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는 논조는 지겹다. 말문을 막혀 머쓱해진 엄마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가자 조금 기다렸다가 윤조는 책장에서 바둑책을 꺼내 들었다. 


“자신 없나보지?”


“그런거 아냐. 그래도 안 한지 꽤 되었으니까…”


“한 수 가르쳐줄수도 있지.”


“귀신되면 갑자기 모든게 다 도 트고 그러냐?”


“아니, 바둑판을 가져 올순 있지. 바둑실력이야 원래 내가 빼어난 편이고…”


“넌 내 머리속을 읽는데 어떻게 공정하게 게임이 되냐?”


“네 머리속을 읽어도 네가 정말 잘한다면야... 어쨌건 안 읽고 해보도록 할게.”


잠시 후, 윤조는 한주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한 네 점 안 깔아줘도 괜찮겠어?”


“건방떤다. 나도 꽤 하거든? 정정당당하게만 해.”


한주의 실력은 상당했지만 어려서부터 혹독하게 바둑을 배운 윤조도 만만치 않았다. 


“....변방에 너무 신경 쓰느라 중앙을 놓치고 있잖아. 그런 곳에 오는 놈팽이들은 잔꾀에 이골이 나 있다고. 넌 지금 바둑국전에 출전하는게 아니라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거야.”


“잘난척은.. 끝에 가서 집 세보고 울지나 마라.”


“벌써 내 눈엔 네가 두 집 지고 있는게 보이니 하는 말이야.”


“너 ... 아무래도 내 머리속을 읽고 있는것 같은데…”


“그리고 넌 축이라던지 초짜들이 쓰는 패를 자주 꺼내고 있어.”


...야... 너네 아빠는 이 시간에 왜 바둑판을 찾는거냐?”


“헉... 맞다. 가끔 새벽에 혼자 책보고 바둑 연습을 해. 바둑판 찾고 있어?”


“어... 빨리 돌려놔야겠다. 어쨌건 하 윤조. 내가 이겼다. 너 두 집 졌어 .나한테…”


순식간에 바둑판과 바둑알이 사라졌다.


“잘하면 질 수도 있겠군…”


한주는 머리뒤로 손깍지를 끼고 옷장위에 드러누워서 빈정거리고 있었다.


“더럽게.. 그 먼지 구덩이에 잘도 눕는군.”


“죽어봐라... 육신 따위.. 어차피 썩는거라구. 네가 보고 있는 나는 허상이란 것 잊지마. 난 실제 존재하지 않아.”


“그렇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끊임없이 나를 귀찮게 하구…”


“너 바둑 공부 좀 더 해야할 것 같은데..”


“내가 왜. 네가 있는데... 보살펴주는데 그정도야 따라다니면서 해야지. 애 하나 살리는 일이야. 성심성의껏 하도록.”


“...흠... 이걸로 살려놔도 다른 걸로 죽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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