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 정신을 차린 윤조는 이내 그것이 미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 언제 왔어?”
“점심시간에... 너 원래 점심시간에도 초고속으로 밥 처먹고 공부하던 족속 아니냐? 웬일로 없더만…”
“어... 잠깐...
지금 국어야.”
윤조는 얼떨떨하게 대답하고 돌아 앉았다. 미나는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고 하던대로 씹던 껌을 뱉어 책상밑에 붙이고 있었다.
윤조는 미나에겐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조금도 하지 않고 석수와 약속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야갼 자율 학습 1교시 중반쯤 순찰 선생이 반들을 둘러보러 다니고 3교시 초반에 도는 것으로 마무리 하기 때문에 사실 중간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윤조는 시계를 보고는 화장실을 가는 척 하며 조용히 건물 밖을 향했다.
하지만 윤조는 어두운 3층 복도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윤조가 체육관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수가 들어섰다.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나는 묻지 말고... 미나가 빚이 이백 있다는게 사실이야?”
“응. 어제 들었어. 황당하지 뭐. 멍청해도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수가 있는지…”
석수는 울분에 차서 투덜댔다.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되지?”
“얘 또 현실감 떨어지는 소리하고 있네. 쟤가 지금 걸려든 조직이 어떤덴지나 알고 그런 소리 하냐?
그나마 이백 받고 순순히 놔주면 그게 천만다행이야.”
“.... 근데 너 꽤나 미나한테 신경쓴다?”
“.... 친구라고 생각하는 놈 중 하나니까. 개차반이지만 나쁜 애는 아니야... 좀 멍청해서 그렇지…”
“그래... 나쁜 애는 아니야...
어쩌면...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몰라... 네가 좀 도와주면…”
“집에 돈 훔치거나 이런 짓이면 난 안 들을란다. “
“아냐...그런거... 정정당당하게 버는거긴 한데 딱 이번만 할께. 너랑 네 친구 정호랑 좀 따라와 주면 좋겠어…”
“뭐 도박을 하거나 그런거 아니지? 아니면 너 혹시 숨은 당구의 신이냐?”
“따라와 줄거냐고…”
“그거야 어려운거 아닌데.. 확실한거야?”
석수는 여전히 미심쩍어 하는 듯 보였다.
그때였다.
“너네 둘. 여기 이러고 있을때가 아닐텐데... 지금 여기로 선생이 제보를 받고 출동중이란 사실... 알랑가 몰라?”
어둠속에서 나즈막히 들리는 목소리는 한주의 것이었다.
“뭐?”
“확실한거냐고!”
석수는 윤조가 되묻는 줄 알고 다시 말하고 있었다.
“아... 세상사에 백퍼센트가 어딨냐. 그것보다 빨리 교실로 돌아가자. 얼른!”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석수의 손을 잡아 끌고 문쪽으로 향하던 윤조는 멈칫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친거야? 이 놈 봐라... 교내에서 담배라니!!! 싹수가 노랗다 했더니 아주 막가는구나! 퇴학 각오해야 할거야!”
선생이라면 누구라도 곱게 넘어가 줄 사안이 아니긴 했지만 하필 오늘 2학년 당번 선생은 학생주임이었다. 대체 누가 바깥에서 담배를 피다 걸린 것인지 궁금해 둘은 최대한 문에 가까이 붙어 귀를 기울였지만 걸린 학생이 너무 조용해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당장 따라와! “
밖이 잠잠해지고도 한참동안 둘은 말 없이 어둠속에 서 있었다.
“너네 교실 안 가냐?”
한주가 석수의 옆에 꼭 붙어서서 장난스럽게 입김을 불어대자 석수가 턱까지 떨며 오한에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아 맞다... 우리 이제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그... 그래... 네가 먼저 들어가. 난 좀 있다가 나갈께. 같이 나가면 안되니까…”
윤조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사방을 살핀 후 교실로 돌아갔다. 담배를 핀 학생은 필시 정호나 형석이 같은 불량아들 중 하나 일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 윤조! 어디갔다 와!”
“네? 네.. 저녁 먹은게 체했는지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좀…”
“그래? 영 안 좋으면 너는 먼저 집에 가도 좋아.”
“아뇨. 괜찮습니다.”
“어쨌건 조 미나는 교내 흡연으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소지품 검사해야 하니까 조 미나 가방 이리로 가져와!”
학생주임은 미나의 짝인 상미가 건네는 미나의 가방을 받자마자 낚아채 거칠게 가방을 열어 교탁위에 내용물을 쏟아 부었다. 다행히 압수당한 담배를 제외하고 요전날처럼 가발이나 짧은 치마, 화장품 따위는 없었다.
‘설마 퇴학은 안 시키겠지... 그런데 하필 왜 학교에서 담배를... 근데 보통 학생주임은 그 시간에 교무실에서 당직이랑 한 잔 하는 중이라 이차 순회도 생략하는 편인데 어떻게 그 시간에 거길 가 볼 생각을 했을까?’
‘그거야 쟤가 벌인 짓이지.’
어느 새 옆에 와 앉은 한주가 팔짱을 낀 채 턱 끝으로 지민을 가리켰다. 지민은 불안하면서도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책상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쟤가 너 무지 싫어하는건 알지?”
‘그래서 나 잡으려고 학주한테 찔렀다고?’
“그렇지. 네가 체육관으로 가는거 보고 있었거든. 아마 전 처럼 네가 체육관에 피아노 연습하러 가는 줄 알았을거야. 그래서 교실 이탈로 혼나게 하려고 찌른건데 사실 네가 석수랑 있었잖아. 노 지민은 네가 체육관으로 가는 것 밖에 못 봤지만 조 미나는 3층 화장실에서 창문으로 너네 따로 따로 체육관 들어가는거 다 보고 있었거든.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노 지민이 교무실 앞에서 학주한테 꼰지르고 있는 걸 들은거야. 그래서 너네 숨기려고 일부러 뛰어가서 담배 피기 시작한거지. 학주가 귀찮아서 노 지민한테 체육관에 무슨 일이 있는거냐고 꼬치꼬치 묻고 있었거든. 노 지민은 가서 보시면 안다고 하더라구.
둘이 꽤 친했는데 친구 등을 찌른셈이지. 재밌지 않아?”
한주는 싸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 때문인거잖아…”
“뭘 또 그렇게까지... 쟤는 죽어도 1주일안에 이백 못 만들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 계획... 내가 보기에 승산 있어보여. 그럼 생산적인 인간이 살아남는거지.”
윤조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근데... 하루 넘게 안 보였는데 어디 갔었냐고 묻지도 않는다? 정없는 기집애…”
“아.. 맞다. 어디갔었냐? 주정뱅이 영이 찾았었어.”
“...그래? 왜? 아.. 아니다. 너한테 얘기를 해 줬을리 없지.”
한주는 이제 귀신세계의 룰에 꽤나 익숙해진듯 보였다. 씁쓸하게 웃는 한주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조는 문득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지금까지 그는 늘 외로와 보였단 것을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