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는 한주를 찾는 중에 녀석의 냄새가 나서 쫓았다고 했다. 한주의 냄새가 뜻하는게 과연 뭘까...
그 다음날도 한주는 보이지 않았다. 윤조는 은근히 신경이 쓰였지만 손은 여전히 버릇대로 가방속의 영단어장을 찾고 있었다.
“야야, 너 오기전에 네 책상위에 쪽지 하나 있었거든? 그런데 승진이가 주워갔어.”
“...아.. 그래?”
“가서 물어봐!”
“그럴께…”
윤조는 성의없이 대답하고 여전히 머리속으로는 한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주정뱅이 영이 했던 말이 궁금해 미칠 지경인데 놈이 나타나질 않으니 더 답답한 중이었다.
‘제기랄... 꼭 필요할 땐 없지…이 한주. 대체 어딨냐? 좀 기어나와보라고!’
윤조는 언젠가 한주가 ‘네가 부르면 나타날거야’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조그맣게 중얼거려보기 까지 했지만 여전히 한주는 보이지 않았다.
지각은 해도 결석을 하는 법은 없었던 조 미나가 1교시가 끝나고도 나타나지 않았다.
“반장. 조미나 안 나왔는데... 연락 해봤어?”
“응. 선생님이 하신댔어. 그나마 결석은 안 하지 않았냐? 이상하네…”
은주는 말로는 이상하다 했지만 실상 전혀 신경쓰지 않는 표정으로 학급비 거둔 것을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냐 하 윤조? 언제는 만능여성으로 분주하시더니 이젠 어두운 곳도 거두는 천사가 되기로 했냐? “
수연이 고깝다는 듯 옆에서 듣고 있다 한마디 한다.
“2등이라도 지킬라면 그렇게 떠들 시간이나 있냐?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네가 1등하고 기고만장하는 꼴을 볼 수가 없을것 같아서라고 해두지.”
윤조 역시 면도칼이 사방에 돋은 말을 뱉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원래 개천에 살고 있는 이무기들은 독밖에 안 남았거든.. 그러려니 해.”
얼굴을 찌푸린채 자리에 앉자 정수가 이제 겨우 1교시가 끝났을 뿐인데 도시락통을 개봉하고 만찬을 즐기다 윤조의 입에 쌈을 하나 가득 넣어주며 달랬다.
“그거 아니? 대호 오빠가 수능 끝나면 꼭 만나주겠대. 역시 오빠는 여자를 인물로 평가하는 그런 쫌팽이가 아니었어. 예술가는 뭐랄까... 진정한 사랑을 안달까? 그런 오빠의 수준에 걸맞는 여성이 되기 위해서 나 정말 달라지기로 했어. 친구로써 말해봐. 내가 뭐 부터 하면 좋을까?”
누군가를 좋아하면 꼭 온 동네가 다 알도록 호들갑스러운 정수가 웃겨서 윤조는 수연때문에 상했던 기분이 풀렸다.
“일단 그 쌈의 크기와 양을 반으로 줄이고, 공부 열심히 해. 장대호는 덜 떨어진 여자는 취급 안 한다며... 대체 그 신종 멸치같이 생긴 장대호 어디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다만…”
“어머... 야! 그만! 우리 대호 오빠 욕하면 아무리 내가 너를 추앙하지만 돌아설지도 몰라. 그러니 그만…”
“아주 오바를 떨어요…”
윤조가 정수와 수다를 떨고 있는중에 승진이 냉랭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하 윤조. 좀 보자.”
찬바람이 쌩쌩 이는 승진의 기세에 눌려 윤조는 얼른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너 뭐냐? 정수한테 쪽지 얘기 들었잖아. 근데 왜 나한테 안 와?”
“아 맞다! 쪽지! 그거 누가 준거래?”
“내가 어제밤의 너한테 준거다. 왜! 너 어제 아예 먼저 사라지고 없더라? 너 나한테 화났니? 내가 어제 중간고사 얘기해서? 하 윤조... 너무 한거 아냐? 화를 내려면 내가 내야 하는거 같은데…”
“맞어. 내가 사과하려고 했었어. 어제... 주정뱅이.. 아니... 그럴 일이 좀 생겨서.. 정말 미안해. 그런데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어... 정말... 미안... “
윤조는 뭐라 말을 해도 둘러대는 것처럼 들릴 것이 당황스러워 말을 찾느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 됐어. 네가 나한테 모든 걸 말할 의무는 없으니까. ... 그런데... 하 윤조. 나는 너에게 정말 하나 숨기는 거 없이 다 얘기하거든? 내가 생각할때 이젠 나도 너처럼 해야겠다. “
승진은 처음보다 더 냉랭해진 표정으로 먼저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말을 한들... 누가 믿겠냐... 이러다간 정말 내 진정한 벗은 성숙이가 될 판이야... 제기랄.. 이 모든 것의 근원인 그 놈은 대체 어딜 간거야…’
그 대화 이후 승진은 대놓고 윤조를 피하기 시작했다.
점심때도 승진은 귀찮다며 자리에 그대로 앉아 혼자 식사를 했다. 윤조는 그런 승진이 마음에 걸렸지만 다시 애기를 하려 해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대로 두기로 했다.
“너 오 석수랑 사귀냐?”
점심 식사 후 이를 닦고 막 교실로 들어서는 윤조 앞을 지민이 막아섰다.
“오 석수랑 사귀냐고! “
“아니... 근데.. 내가 사귀더라도 네가 이렇게 무슨 본처인것 처럼 나한테 사납게 물어야 할 사안이냐?”
“…..오 석수가 좀 보잰다.”
아침부터 내내 수연, 승진과 부딪힌데 이어 지민까지 시비를 걸어오자 윤조는 참을 수 없이 짜증이 났다.
석수가 기다리고 있는 수돗가는 점심시간이면 늘 아이들이 붐비는 곳이지만 날씨가 추워진 후로 인적이 드물었다.
“왔냐? 나... 좀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미나 얘기라면 난 몰라…”
“… 무슨 말이야?”
“걔 오늘 학교 안 온거 묻는거 아니니?”
“걔 오늘 학교 안 왔냐?”
“.... 뭘 물으려던거야?”
“내 가방에 미나 물건들이 들어 있었어. 어제 말야... 그래서 미나한테 따지러 갔었는데... 걔 말이 네가 한 짓이라고... 네가 그랬어?”
“.... 아니…”
“흠.. 결국 조 미나가 거짓말 한거네?”
“누가 한건지가 중요해?”
“중요하지. 내 가방 어제 벌려진채로 운동장 모퉁이에 그냥 놓여 있었는데... 지나가던 체육이나 학주가 보기라도 했어봐. 내가, 왜 지금 얼마나 엿같이 사는데도 학교는 죽어라 다니는 줄 아냐?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할거 아니냐. 지각하고 야자 맨날 빠져서 뺑뺑이는 돌아도 학적부 줄 가는 짓은 한 적 없거든?”
“그래... 알겠다... 그런데 내가 한 것도 미나가 한 것도 아냐.”
“그럼 누가 그랬어?”
“그냥... 넘어가주라... 말 못하니까. 그보다 미나가 꽤 곤란한것 같던데... 혹시 아니?”
윤조는 구체적으로 아는 걸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어 슬쩍 석수의 눈치를 살폈다.
“....넌 어떻게 아는건데? 미나가 이미 떠들었냐? 너네 그렇게 친해?”
석수는 의심쩍은 눈빛으로 윤조를 쳐다보았다.
“어이! 거기 둘이!! 종 칠 때 다 되었는데 남녀 학생이 붙어 앉아서 뭐하는거야!!”
윤조가 대답을 하기 전에 저 멀리서 둘을 발견한 학생주임이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말만 지역내 유일한 남녀공학인 윤조의 학교는 굉장히 보수적인 편이고 남녀 학생이 단 둘이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것에 심하면 징계까지 내릴만큼 엄격했다. 둘은 화들짝 놀라 얼른 벤치에서 일어섰다.
“야자 1교시 마치고 선생들 순번 안 돌 때 체육관에서 잠깐 봐.”
윤조는 아무래도 미나의 문제를 석수와 함께 의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민은 종이 치기 1분전에 교실로 돌아 온 윤조를 노려보고 있었다.
윤조가 5교시 국어 수업을 준비하느라 교과서를 서랍에서 꺼내자 노란 포스트 잇 하나가 뚝 떨어졌다.
‘네가 달고 다니는 것이 지금 어떤 짓을 시작했는지 모르지? 빨리 보내지 않으면 너도 위험해질거야...’
윤조는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성숙을 애써 무시하려 했었지만 이번 쪽지를 보는 순간 ‘한주 냄새’라는 말이 떠올라 섬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