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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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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Aug 08. 2024

04. 네가 내게 왔다…

(12)

“떡볶이!! 맛있겠네!! 우리 엄마가 밀가루 떡볶이를 그렇게 잘 했었는데 말야... 뭐 18살 이후로 엄마를 본 적은 없었지만... 학생! 오랜만이야! .... 아니 뭐야? 어른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요즘 애들 참... 못쓰겠네... 쯧쯧쯧”


탁주에 푹 담근 홍어같이 삭은 목소리의 남자가 방정맞게 낄낄대고 있었다. 윤조는 갑자기 옆에 튀어 나온 주정뱅이 영 때문에 소리를 지를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고 놀래서 두 배로 커진 눈을 하고 그를 바라 보았다. 주정뱅이 영은 아까부터 숙면중인 정수의 등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처음 본 사이도 아니면서... 내가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깐 시간되우?”


‘미쳤어요? 제가 갑자기 소리라도 질렀으면 어쩌실뻔 했어요!’


“뭔 소리야. 소리를 지르면... 자네만 미친 취급당하지.. 나를 볼 수 있는 애가 또 어딨다고 여기... 

어!! 어!!! 있네? 저기 쟤? 쟤 지금 나 보여서 째려보고 있는거 맞지?”


윤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앞줄에서 성숙이 노려보고 있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네. 맞아요. 그러니까 빨리 사라지세요. 쟤가 나한테 와서 또 헛소리 하기 전에…’


“안돼. 할 말이 있다니까... 그나저나.. 신기할세. 쟤는 지금 하는걸 보니 내가 자세히 보이나 본데.. 이게 신기가 있다고 귀신이 다 자세히 보이는건 아니거든? 뭔가 연결고리가 있는 영들만 보이는거라구... 나머지 영들은 그냥 느껴질 뿐이고... 신기하네…”


주정뱅이 영은 무언가에 홀린듯 성숙을 응시하며 연신 신기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 곧 쟤 나한테 올거에요. 좀 그만하세요. 먼저 나가 계시면 조금 있다가 화장실 가는척 하고 나갈께요.’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주정뱅이 영은 사라져 버렸다.


“아우.. 왜이렇게 춥냐! 파카를 두 개나 뒤집어 썼는데도 춥네... 아우.. 등짝은 또 왜이리 쑤셔.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은 책가방 때문에 다 등짝 디스크 생길거야.”


정수가 투덜대며 기상했다. 이상하지만 윤조는 이 와중에 귀신은 무게가  안 나갈텐데 왜 등짝이 아픈지가 궁금해지는 자신이 우스워 하마터면 소리내 웃을 뻔 했다. 대개 야간자율학습 종료 15분 전쯤을 전후해 교실내는 소란해지기 마련이다. 책가방 싸는데에만 유비무환 준비정신이 철저한 몇 몇은 이미 가방을 정성스레 싸기 시작하고, 지겨워진 심신을 달래려 주위 동지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윤조는 일부러 성숙쪽은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연스레 화장실을 가는 척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일찍 귀가한 1학년 교실쪽은 인기척이 전혀 없다. 불이 꺼진 복도쪽으로 다가서자 주정뱅이 영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험! 험!! 그게... 몇 몇 멍청한 여자들은 못생긴거랑 무섭게 생긴걸 구분을 못하더라구. 내가 못생기긴 했어도 무섭게 생기진 않았걸랑. 근데 주로 밤에 나를 보면 소리를 지르는 여자가 많더라구.. 그래서... 자네가 또 놀랠까봐.. 아까 불켜진데서 봐도 그리 놀래 자빠지는데.. 난 자네까지 우리 세계로 끌어들이고 싶진 않네.”


“아까 놀래 자빠진건 너무 갑자기 나타나서 그렇다구요. 그리고 못생기기도 하셨지만 무섭게 생기시기도 했어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으하하하. 웃기는 학생이네. 으하하하 하긴 그렇기도 한 것 같군.”


주정뱅이 영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한동안 시끄럽게 웃어댔다. 


“그 퍼런 안색이랑 장비 같은 수염도 별 도움 안된다구요. 낯빛이랑 수염 어떻게 안 되요?”


“응. 안돼... 죽은 그 상태 그대로 있는거거든. 바꿔지지도 않구... 으하하하하. 한 십 년 전에 으하하하 치악산쪽을 돌다가 트럭에 깔려 죽은 여자를 만난적이 있거든? 그 여자는 얼굴에 대각선으로 꺼먼 타이어자국이 있었다구 으하하하 귀신은 성형이 안되니까... 그런 점이 좀 안타깝다고나 할까?”


주정뱅이 영은 꽤나 우스운 사내였다. 윤조는 실없이 웃어대는 그가 도리어 웃겨 피식 웃어버렸다.


“그건 그렇고... 한주 녀석이 안 보이는데 혹시 어디 간다고 말했어?”


“아뇨... 저도 좀 궁금하던 참이에요. 뭐 없으니까 홀가분하고 좋긴 하지만…”


“녀석을 보면 꼭 말해. 내가 찾는다고... 녀석은 희망이 있어. 여기서 벗어날... 운 좋은 놈이야. 너무 많이 힘들어지기 전에 벗어날 수 있을것 같아... 그 녀석이라도…”


“무슨 말씀이세요?”


“안돼. 직접 얘기해야해. 알려고 하지마.”


“뭐가 그렇게 그쪽은 하면 안되는게 많대요? 죽고도 쉬운게 아니구나…”


“누가 그래? 죽으면 만사 끝난다고... 죽음은 끝이 아니야. 빚 갚을 시간의 시작인거지…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알아? 내가 뭘 빚졌는지 조차 알아내기가 힘들다는거야.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가 죄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갑자기 진지해진 주정뱅이 영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윤조는 문득 복도 건너편도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헉... 승진이…’


윤조는 승진과 함께 떡볶이집을 가기로 했던게 생각나 급히 교실을 향했다.  하지만 불이 꺼진 교실은 문도 다 잠겨있었다.


“아... 나 가방 안 챙겼는데…”


“아! 가방? 여기 있어. 걱정마. 아까 내가 챙겨놨지.”


여전히 턱수염이 난 곳을 벅벅 긁어대며 주정뱅이 영이 얼른 윤조의 가방을 내밀었다. 


“책상위에 수학 문제집도 집에 챙겨가야 하는건데.. 뭐 어쩔수 없죠…”


“걱정마. 안에 다 있어. 뭐 엄청 열심히 하던데 집에 가선 쉬면 안되는건가? 그러고도 또 공부를 하다니…”


윤조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책가방을 열어보았다가 조금 놀래 주정뱅이 영을 올려다 보았다. 그도 그럴것이 노트며 책, 필통까지 키대로 가지런히 잘 정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놀랠거 까지야... 내가 일자무식이라 내 새끼 국민학교 들어가는게 그리 자랑스러울 수 없더라고. 그래서 그 놈 첫 책가방을 읍내에서 사와가지고 몇 날 며칠을 풀었다가, 다시 쌌다가... 또 풀었다가... 또 다시 잘 정리했다가.. 그랬었더랬어... 아..씨.. 또 눈물 나네. 난 또 한 잔 하러 가야겠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당신의 아들은 그래서 그 책가방으로 학교를 잘 다녔냐고 묻고 싶었으나 주정뱅이 영은 갑자기 눈물을 훔치며 성큼 사라져갔다. 아마 그 책가방의 주인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윤조도 마음이 착잡해져 버스 정류장으로 발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참! 그런데 말야. 혹시 미나라고... 그 아이 자네 반인가?”


사라진줄 알았던 주정뱅이 영이 다시 돌아와 옆에 따라 붙어 있었다.


“네... 그런데... 어떻게 아세요?”


“아니, 내가 아까 한주녀석을 찾다가 그 녀석 냄새가 나더라구. 그래서 거길 갔는데... 그 녀석은 없고 그 여학생이랑 덩치 좋은 남학생..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돌쟁이, 석순가 뭔가... 이랑 심각하게 싸우고 있더군. 좋아서 노래부르고 술따르는 색시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보더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윤조는 미나에게 실망했었던 것은 잊고 걱정스러워 다급히 물었다.


“그 색시짓을 그만두는데에 200만원이 필요하대. 집도 폭삭 망했는데 뭘 해서 그 돈을 일주일만에 마련하겠어. 그 학생 아주 제대로 똥 밟았더라구. “


“...헉... 이백씩이나... 정말 미쳤구나. 조 미나 어쩌려고... “


“안타깝지만 인생은 다 자기 선택대로 흘러가는거야. 그 학생은 분명히 다른 길로도 갈 수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한거야. 어쩌겠나...게다가... 잊지마...내가 그 곳을 간 이유... ”


“아 무슨 그런 힘빠지는 얘기를 하세요. 그런 일이 일어난걸 봤으면 도와줘야지. 귀신이면 그 정도 능력은 있는거 아니에요?”


“잘 들어. 물론 내가 이백을 던져 줄 수도 있어. 그런데 그 이백이 어디서 나오겠나? 귀신인 내가 일을 해서 버는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어디선가 내가 그 돈을 훔쳐와서 그 애 한테 던져주는거라구. 이미 쌓은 업이 차고 넘쳐서 구천을 떠도는 중인데 여기다 더 죄를 쌓으라고? 그만하소. 그건 안되네.”


주정뱅이 영은 손사래를 치며 허둥지둥 진짜 사라져 버렸다.


텅 빈 버스 정류장의 희미한 가로등 불 아래 우두커니 얼어붙은 윤조는 주정뱅이 영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미나의 빚 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주정뱅이 영이 무심코 흘린 말…


‘잊지마, 내가 그 곳에 간 이유...’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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