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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신곡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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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Aug 05. 2024

04. 네가 내게 왔다…

(11)

한주의 엄마 조 현경은 명문 여대의 피아노과 교수다. 

말수가 적고 고상한 그녀는 어디서고 평판이 좋았다. 남편은 대기업 영업상무, 업계에서 가장 실력 있기로 유명한 인사에다 아들은 전국에서 등수를 논하는 수재라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서 관심과 부러움 섞인 인사를 받았지만 꽤 겸손한 편인지 별 반응을 보이는 적이 없었다.


외동아들이 죽은 후에도 그녀는 흐트러지지 않은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일과 후 들르는 필라테스 클래스를 빠지지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 씩 꼭 받는 피부과 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원래도 소원했던 부부관계는 아들의 죽음 후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 없을 만큼 냉랭하지만 이상한 일은 오히려 그녀가 한주의 죽음 이후 우울증 약을 끊었다는 점이었다.


밤 9시가 거의 다 된 시간, 회사일로 하루도 일찍 들어오지 않는 남편 없이 적막한 거실에서 책을 보던 현경은 시계를 보더니 일어나 미리 만들어 둔 베이컨 말이며 크림치즈 까나페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마 누군가가 늦게 방문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녀가 와인과 잔까지 테이블에 세팅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렸다. 


“살은 좀 오른 것 같다?”


시내에서 큰 약국을 하는 현경의 언니 현영이다. 신경이 예민해 젓가락만큼 마른 동생이 그녀는 늘 신경이 쓰였다.


“좀 어떠니?”


“응? 좋아. 이젠 우울증 약 그만 먹을까해.”


“그 정도로 좋아졌니? 하긴 그 약이 워낙 독해서 주고도 정말 신경쓰였는데... 그나저나 십 몇 년을 네 손으로 키운 애가 죽었는데 정말 괜찮니?”


“... 응... 괜찮아. 죽고 사는 건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 언젠가 다 죽을텐데 뭐... 어차피 걔도 사는거 힘들어 했어…”


감정이라곤 없는 차가운 얼굴에 늘 파리하게 피곤해 보이던 한주를 현영은 떠올리고 입을 닫았다. 이미 더 이상 잘 할 수 없을 만치 잘 하고 있는 아이를 제부는 칭찬 한 번 없이 다그치기만 했었다. 늘 취해서 귀가하는데다 스트레스를 하나뿐인 아들에게 푸는 것이 언젠가는 이런 결과를 초래할거라 친척들은 말만 하지 않았을 뿐 항상 불안해 했었다. 현경이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한 것은 한주가 피아노를 강제로 그만두고 나서 부터였다. 


“....걔는.... 날 너무 안 닮았어... 그게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거야…”


접시를 내어 오던 현경이 등을 돌린채로 중얼거렸다.


“... 너... 무슨 짓을 ... 한 건 아니지?”


현영의 목소리는 이상할리만치 떨리고 있었다.


“아니... 무슨 짓? 자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내가 무슨 짓을 했겠어?”


현경은 순간 소름끼치는 미소를 옅게 띄우며 현영을 비웃었다. 현영은 입을 닫았다. 그녀는 세 살 터울인 어린 동생이 늘 무서웠다. 현경은 어려서부터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고 무서우리만치 승부욕이 강했으며 한주의 아빠를 대학 1학년때 처음 본 후 단 한번도 포기 한 적이 없었다.


“ 아직 40대인데 늦었더라도 아이를 하나 더 가져 보는건 어떠니? “


예상치 못한 현영의 말에 현경이 당황하는 사이 현관문이 열리고 한주의 아빠가 들어섰다. 한주의 아빠 이 정구는 업계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철의 사나이’로 이름이 나 있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기획 본부장 겸 영업 상무로 공격적인 마케팅과 인정 사정 없는 합병으로 회사에서는 가장 대우 받는 능력자이지만 개인적인 평판은 좋은 적이 없었다. 대대로 떵떵거리며 살던 부산 최고 무역상의 자식으로 태어나 유복하게 컸지만 부친이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이후 집안이 기울면서 고등학교 이후 고아로 컸고 지금 모시는 회장의 양아들이 되어 탄탄대로를 달린 파란만장한 인생의 소유자다.


“일찍 왔네요?”


예고도 없이 불쑥 퇴근한 남편을 보자 현경은 예의 침착함을 잃고 약간 당황했다.


“어머.. 오늘은 제부가 일찍 오는 줄 모르고... 나는 이만 가볼께…”


현영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 네. 살펴가세요.”


이 정구는 빈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적당히 예를 갖춰 심드렁하게 처형에게 인사를 하더니 별 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제부는 어때? 상심이 크지?”


“.....언니... 이만 가. 내가 내일 전화할께.”


한주는 아까부터 식탁 한 켠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서도 엄마와 살가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 건너다 보고 있는 자신의 엄마라는 여자는 참으로 낯설었다. 


‘제기랄... 귀신보다 더 냉정하군.’


표현을 안 할 뿐 분명 엄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본능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현경은 오히려 자기가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평화로와 보인다. 한주가 앉아 있는 식탁 모서리를 지날 때 마다 현경은 걸친 스웨터를 끌어 당기며 오한에 약간씩 몸을 떨었다. 


현영이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고 간단하게 차렸던 식탁을 닦는가 싶더니 행주질을 멈추고 불현듯 주방 구석에 있는 서랍장으로 향했다.


‘이모한테 거짓말을 한건가…’


한주는 그 서랍장에 무엇이 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피아노를 관둔 이후 한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붙잡으려 노력했었다. 그 즈음이었다. 현경이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한 것도…


현경은 약을 늘 넉넉하게 타 와서 서랍안에 두었는데 처음에는 들키지 않으려 가끔 훔쳐 먹던 것을 현경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아 후엔 거의 매일 대놓고 꺼내 먹었었다.


현경은 서랍장을 열고 여전히 남아 있던 우울증 약병을 꺼냈다. 약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주방 한 켠에 있는 쓰레기통에 남은 알약을 쏟아 붓더니 약병은 따로 다용도실의 쓰레기통에 넣고 조용히 욕실을 향했다. 


한주는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르륵 일어나 쓰레기통에서 알약 몇 개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 층 화장실 고장났대. 위로 올라가던지 아님 내려가던지…”


먼저 헛걸음을 하고 돌아서던 상미가 일러주어 윤조는 3층 인문계반 쪽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들어서니 마침 오케스트라 피아노 자리를 노리는 또다른 경쟁자 정민이 몇 몇과 함께 수다를 떨고 있다 일순 조용해진다.


“음대지원하는 것도 아닐거면서 ... 좀 한다고 허세떨기는…”


“저런게 제일 재수없어. 뭐든 다 잘 하는 척…”


" 좀 잘한다고 남의 앞길 막는건 또 어떻구..."


“냅둬, 원래 재수없는 년인데 뭐. 공부 좀 한다고 어지간히 목이 빳빳하시잖냐.”


정민과 그의 패거리들이 들으라고 떠드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윤조는 일을 본 후 세면대 앞에 섰다. 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윤조의 일거수 일투족을 노려보고 있었다.


“음대 지원한다는 애가 나같은 아마츄어하고 겨루는걸 거슬려 한다는 것 자체가 쪽팔리진 않냐? 그리고.. 엇다대고 년이래… 공부 못하는게 벼슬이냐? 시간 죽이고 있지 말고 그냥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처 자던가!”


물을 일부러 정민의 얼굴에 튀긴 후 윤조는 자리를 떴다. 학교에서 오케스트라에 지원한 피아노 세 명에 관한 이야기는 최근 내내 화제에 올랐지만 고교활동이 가산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음대를 지원하는 정민의 편을 드는 아이들이 훨씬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마지막 야간자율 학습 한 시간을 앞둔 쉬는 시간이라 자판기 커피를 뽑아 오고 라면을 먹느라 분주한 아이들 사이를 지나칠때 이상하게 싸늘한 눈빛들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대체 어딜 간거야... 이렇게 오래 안 보인 적은 없었는데…’


윤조는 모르는 새 한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 윤조! 오늘도 늦게 나갈거냐? 대체 언제 너랑 집에 같이 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오늘은 같이 가는거야, 알았지?”


붐비고 복잡한 하교시간이 싫어 30분정도 늦게 나가는 것이 버릇이 되어가려던 차였다. 승진은 한주의 죽음 이후 조금 이상해진 윤조가 신경 쓰였다. 짝사랑을 하던 건 승진이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괜찮아진 승진과는 달리 윤조는 딱히 슬퍼하진 않아도 한동안 정신이 나가보이는가 하면 혼자 골똘하기도 하는 등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어... 아... 알았어…”


“진짜지? 가는 길에 너네 동네에서 떡볶이 먹고 갈까?”


“그래... 근데.. 승진아... 네가 보기에도 내가 오케스트라에 피아노 지원하는거... 재수없어? 하고 싶고 잘 하는 사람이 하면 되는거 아냐? 꼭 그 활동점수가 요긴하게 쓰일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거라고 생각해?”


당연히 승진은 네가 하는게 맞다고 말해줄것이다. 뻔한 대답이라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런데 승진은 의외로 망설이더니 말했다.


“1학기 중간고사때 내가 어쩌다 1등했잖아. 그 때 네가 지나가는 말 처럼 ‘어차피 단발일걸 너한테는 그다지 많은 도움도 안되고 내 내신엔 데미지가 생겼군.’ 이라고 했어. 기억나? 난 좀 섭섭하긴 해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 어차피 난 너만큼 공부를 잘 하는 편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음대 진학이 목표인 정민이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맞는거 아닐까?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는 걸거야…”


윤조는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한 기분이 들어 한동안 멍하니 앉아 허공을 응시하다 기계적으로 수학문제집을 펼쳤다.


한참을 그렇게 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마음이 진정되어 가고 어쩌면 승진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했었나... 내가 미쳤었군... 오늘 떡볶이는 내가 사야겠는걸.’


중1, 아니 어쩌면 아주 그전부터 이미 대입이라는 전투에 항시 대비해 온 훈련병 생활을 하다 보면 이렇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의 문제를 풀 때 머릿속으로는 잡생각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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