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야. 오 석수. 너 지금 뭐하는거야? 시끄럽잖아!”
교실 앞문 옆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다 방해받아 화가 잔뜩 난 수연이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조 미나 나오라고!”
“조 미나 아까 아까 사라지고 없어. 내일 찾으러 와.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은주가 석수에게 타이르듯 말하자 여전히 씩씩대던 석수가 문은 닫지도 않은 채 나가버렸다. 그 뒤를 지민이 바로 쫓아 나갔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미나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
아까 체육시간의 일은 잊은 양 지민은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석수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알 것 없고... 걔 지금 어디 있는지 아냐?”
“무슨 일인데?”
“너 걔랑 제일 친하지? 알려줄거면 빨리 말하고 아니면 꺼져.”
석수는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지민에게 면박을 주었다. 지민은 잠깐 생각하더니 뭔가를 급히 써서 석수에게 내밀었다. 석수가 왜 그리 화가 났는지는 윤조도 궁금했지만 지민이 쫓아나가는 것을 본터라 모르는 척 계속 공부에 매달려 있었다.
석수는 그 날을 매일 밤 다시 만나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니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고, 거실 장 부터 그릇 하나까지 빨간딱지가 붙어 있던 날, 그리고 아버지가 사라진 날 ... 그 모든 것은 그 날 일어 났다.
작은 반지하 월세방을 구하고 엄마는 생전 해보지도 않은 건물 청소부로 취직을 했지만 빚과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석수가 일용직을 나선 것도 꽤 된 일이다. 석수의 여동생 은호도 발레를 때려 치우고 햄버거 가게에서 파트타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석수는 저녁에 가야 했던 인테리어 공사에 가지 않았다. 두 시간 째 화려하다 못해 촌스러운 네온 사인이 번쩍이는 유흥가 한 켠에 서서 한 건물만 내내 째려보고 서 있는 중이다.
미나의 아버지와 석수의 아버지는 동향 출신으로 사업이 잘 나가던 시절엔 피를 나눈 친형제를 넘어선 우애를 자랑했었지만 부도가 나고 풍지박산이 날 지경이 되었을 땐 둘 중 하나가 죽어도 놀랍지 않을 만큼 원수지간이 되어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했었다. 자연스럽게 두 가족간도 예전의 끈끈한 정은 뒤로한 채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게 되었고 꽤 마음을 터놓는 사이이던 석수와 미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석수는 이미 미나가 나쁜 길을 들어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부러 신경쓰지 않았었다. 알게 되었을 때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누굴 신경 쓸 처지가 아니란 자괴감에 사로잡혀 상관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항상 찝찝했고 그녀가 마음에 걸렸었다.
어른들은 몰라도 석수가 미나와 좋은 친구로 지낼때 그들은 돈이나 경영권등을 염두에 두고 친구로 지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하는 수 없이 단란주점 안으로 찾으러 들어가 봐야 하나 하고 석수가 망설이던 참이었다.
“이 쌍년이 ... 지금 갚아야 하는게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지금 이 땡깡이야? 뭐?? 관둬?? 너 미리 쩐 땡겨쓸 땐 좋았지? 돈을 받았으면 당연히 일을 해야지. 고등학교씩이나 다니는 기집애가 그 정도 이치도 모르나?”
추운 날씨에 반팔 티셔츠만 걸친 우락부락한 젊은 사내가 미나의 머리채를 끌고 마침 밖으로 나온 것은…
‘이런... 씨..발…’
석수는 가방을 팽게치고 달려가 사내를 미나에게서 뜯어 냈다.
“뭐냐? 이 년 깔따구냐? 가만 있어봐... 너 오 석수 아냐?”
낯이 익은 사내는 그러고 보니 작년에 석수의 엄마가 포장마차를 시작했을 때 수시로 찾아와 자리세를 뜯던 치들 중 하나였다. 덕분에 사흘이 멀다하고 시달리던 석수네는 그마저도 금방 그만두었어야만 했다. 놈을 알아보는 순간 석수는 눈에서 뜨거운 피가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이 새끼야! 내가 그 오 석수다. 어쩔래? “
석수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자 미나가 한사코 울며 말리기 시작했다.
“그만해. 하지말라고... 너만 깨진다고! 그냥 모른 척 해!!!”
“아주 쌍으로 염병을 해요. 야! 조 미나! 관둘려면 빚은 싹 갚고 사라지는거다잉! 네 서방인지 꼬봉인지랑 잘 상담해봐라! 그라고... 빚 다 갚을 때 까지는 일분 일초라도 작업장에 늦으면 뒤진다! 알긋냐?”
볼 한 쪽이 여기저기 난도질 흉터 투성이인 남자는 징그럽게 웃더니 건물 안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뭐냐? 돈을 버는게 아니라 빚도 있냐?”
사내의 뒷모습을 씩씩대며 바라보던 석수가 무섭게 몰아쳤다.
“분명히 돈을 많이 번다고 했는데... 이상해... 다닐수록 빚만 늘어.”
“멍청한 년. 그런 데인줄 모르고 네 발로 기어들어간거냐?”
“…..”
엉망이 된 얼굴로 미나는 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야. 대로변에서 이러다가 재수없게 학교애들이나 선생이라도 마주치면 둘 다 끝장이야. “
석수는 미나를 끌고 인적이 드문 놀이터로 갔다.
“...어쩔 셈이냐?”
“.... 너 담배 없냐?”
미나가 대답을 피하며 담배를 찾자 그제사 석수는 왜 그렇게 화가 나서 미나를 찾아 헤맸는지를 기억했다.
“맞다. 담배! 정신 나간.. 너 언제 내 가방에다가 이런 쓰레기를 버린거냐? 소지품 검사에 걸릴까봐 엄청 쫄았었나 보지? 학생증이며 다이어리까지 몽땅 내 가방에 쏟아 붓고 튄거 보면?”
석수는 가방에서 미나의 담배, 화장품 파우치, 다이어리를 꺼내 던지다시피 건넸다.
“그래서... 얼마냐?”
“...후훗... 얼마면... 너네 집도 망했는데 뭘 어떻게 도와줄래?”
“미친... 누가 도와준다고 했냐? 궁금해서 물어본다. 대체 인생을 저당잡히고 있는 값이 얼마나 되는지…”
“글쎄... 내 인생값 치곤 비싼건지도 몰라... 2백...그렇게 갖다 쓴 기억이 없는데... 내가 오늘 관두고 싶어서 ‘돗대’한테 물었는데... 그렇다네. 그것도 다음주말까지 갖다 바칠때 얘기고... 후... 그 다음 주로 넘어가면 더 올리겠지.”
“다음 주말 까지라…”
“왜 신경쓰고 지랄이야. 까짓거 하던대로 그냥 다니면 그만이야.”
미나는 입에 담배를 문 채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어 올렸다.
“괜히 끼어들게 해서 미안한데... 어쨌건 네 가방에 집어 넣은 건 내가 아냐. “
미나는 서늘한 눈빛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네가 안 집어 넣었으면 누가 내 가방에다가 이런 쓰레기를 부었냐?”
“하 윤조. 나도 걔가 언제 어떻게 네 가방에다가 내 물건들을 쏟았는지는 모르지만... 몰라.. 귀찮게 걔가 내 인생에 요즘 좀 참견을 하는 중이라…”
황당해하는 석수를 혼자 두고 미나는 어느 새 저만치 사라져 가고 있었다. 혼자 남은 석수는 혼란스러워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체육시간에 기절해서 양호실로 실려 간 윤조가 언제 미나 가방을 뒤져 물건들을 운동장 한켠에 던져 둔 석수의 가방에 집어 넣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