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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이상으로 발전시키라고 피아노 가르친적 없어!! 아니... 아직도 저 녀석이 매일 피아노 따위에 몇 시간씩 허비하고 있었다고?? 애를 어떻게 키우는거야! 선택과 집중 몰라? 기본이라고. 당장 때려치게 해!”
“... 제가 졸랐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 하시는걸 제가 계속 졸랐습니다…”
짝!
이 정구는 폭군에 가까운 가장이었다. 그는 반항 없이 사죄하고 있는 아들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가뜩이나 하얀 피부에 시뻘건 손자국이 부풀어 오르며 새겨진다. 옆에서 지켜보던 현경은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르고 여전히 분노에 눈을 번뜩이고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뭘 잘 했다고 쳐다봐?
당장 피아노 관두게 하고 쟤 얼굴에 얼음이나 좀 갖다주지.”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던져 둔 서류가방을 챙겨들고 그는 서재로 성큼 사라졌다. 정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현경은 그가 문을 닫자 여전히 비석처럼 거실 한복판에 뺨을 감싸고 서 있는 한주는 못본체 하고 주방 서랍 하얀 약병에 든 알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현경이 지병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정구가 집안에서 큰 소리를 내는 날이면 어김없이 현경은 약을 삼키고 이내 위스키를 홀짝였다. 유달리 정이 없는 엄마를 한주는 가엽게 생각했다. 밤새 감기에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해도, 장염에 걸려 사흘째 학교를 못 나갔을때도 현경은 한 번 따뜻하게 안아준 적 조차 없는 엄마였지만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의 의심이 시작된 것은 바로 자신의 장례가 일어나던 그 날이었다.
한주는 자신의 육신이 관채 불가마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례의 하이라이트 장면에 모인 군중이 약속이나 한 듯 마지막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덩치가 산만한 남자 고등학생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할때 한주는 현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젠 울겠지... 설마 ... 엄만데…’
장례식 내내 현경은 조용하고 침울했지만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한주는 그 짧은 순간을 살아서도 하지 않았던 기도를 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제발... 한 번만 울어주세요. 그래도 당신이 나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난... 지금 ... 너무 외롭다구요…’
“관둬라. 저 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이미 죽은 몸... 누가 울어주고 말고가 그리 중요하냐? 사는게 뭐 같아서 죽은거면 이승에 미련을 끊어야지. 뭐... 너도 꼴을 보니 당분간 나처럼 여기를 떠돌아야 할 팔자지만 말야…”
“...네?? 아니... 지금 제가 보이세요?”
“당연하지... 나도 너처럼 귀신이니까.”
그것이 한주와 주정뱅이 영의 첫 만남이었다.
“그깟 눈물에 연연할 필요 없어. 인간들이 얼마나 웃긴지 아니? 지금 저기 모인 작자들... 하나 같이 널 위해 우는 인간은 없지. 다 나름의 이유로 울고 있지만 하나 같이 그 이유란 것은 본인과 관련된 것이지 네가 주가 아니야. 그러니 그깟 하찮은 눈물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는거야. 네 애비라는 작자를 봐라. 아주 온 몸에 물이란 물은 다 빼낼 듯 울고 있지만 사실은 슬픔보다 분노로 울고 있는거야. 완벽한 본인 이미지에 네가 똥칠을 했거든. 정치에도 뜻이 있었나 본데... 외동아들이 성적비관으로 자살이라... 그 쪽은 꿈꾸기가 힘들게 되었지. 그래서 저러는거야.
저기... 네 이모 보이지?
저 여자는 네가 가여워 우는게 맞긴 한데... 에효.. 쯧쯧.. 저렇게 착하기만 하고 멍청한 여자들도 별 도움 안돼. 제 동생이 어떤 끔찍한 짓을 하고 살았는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동생 걱정이 늘어지는구만.”
“...엄마가... 무슨 짓을 했단거죠?”
“..... 차차 알게 될 거야. 내가 알려줄 수 있는건 없어. 네가 다 찾아내야 할거야.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마치고 싶다면 말야…”
주정뱅이 영은 귀찮다는 듯 알쏭달쏭한 말을 던진채 납골당 밖의 큰 떡갈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소주를 땄다.
“저도 한 잔 줘보세요.”
“요것 봐라... 쥐똥만한게... 한 두 번 기울인 솜씨가 아닌데?”
“13살부터 담배도 핀 사람이 웬 참견이에요.”
“... 귀신이 맞긴하네. 금방 적응하고 있군. 좋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생활인데 적응이 중요하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주정뱅이 영은 한주에게 잔을 양보하고 본인은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한주는 윤조네 동네 약국 앞에 서서 불이 환하게 밝혀진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왜 불렀냐?”
“난 빙의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까... 아저씨가 좀 도와줘요. 이 약에 대해서 좀 알아야겠어요.”
“오... 드디어 시작한건가? 게으른 놈인줄 알았더니 역시 공부 좀 하던 것들은 응큼하다니까…”
“도와줄거요 말거요?”
“이 정도야 뭐... 식은 죽 먹기지…”
주정뱅이 영은 한주에게서 별다를 것 없이 생긴 하얀 알약 서너알을 받아 들고 큰 소리를 쳤다. 가로등 뒷 쪽 그늘에 나란히 서 있는 그들 앞으로 나이가 지긋한 영감 한 명이 지나가는 중이다.
“저 할아버지 몸으로 들어가요.”
“안돼. 저렇게 쇠약한 인간은 내가 빙의했다간 본인 혼이 못 돌아올수도 있어. 내가 저승사자도 아니고 그런짓을 했다간 난 몇 겁년은 더 여기 떠돌아야 한다구.”
“.. 아! 저꼬마!”
“지랄을 해라 아주. 저런 꼬마한테 들어갔다간 약사가 대답이나 잘 해주겠냐? 아.. 가만! 저 아줌마가 좋겠네.”
말을 마치자마자 주정뱅이 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주는 예상했던대로 놀래지 않았고 조금 떨어져서 아줌마가 약국안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