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정호는?”
“거기로 바로 오기로 했어... 자... 이거 먹어라.”
석수는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뜯지도 않은 인삼껌 한 통을 꺼내 내밀었다.
“뭐냐? 취향이 할배냐? 인삼껌이라니.. 풋!”
“이런 껌은 재고로 많이 남거든. 수퍼들도 먹고 살아야지.”
“다음엔 그럼 은단껌 사라.”
“그건 금연인들한테 은근 인기야. 내가 굳이 안 사줘도 돼.”
“참 우리 생산성 없는 얘기 하고 앉았다.”
“그럼 뭐 넌 생산성 있게 영어 단어라도 외우던가.. 방해 안할테니…”
“됐어... 돈 벌러 가는 긴장된 순간에 단어는 무슨…”
둘은 텅 빈 버스 정류장에 앉아 나란히 한 곳을 바라보며 서로를 놀리고 있었다.
“어... 하 윤조.... 너 여기 왜 있어?”
버스 대신 불쑥 나타난 것은 수호였다.
“아.. 난.. 그냥... 오늘부터 학원을 다니게 되어서…”
“어느 학원? 애들 보통 다니는 BL학원이나 청명은 교문 앞쪽에 정류장에서 타야하잖아.”
“아.. 그게... 좀 작은 학원인데 수학이 괜찮다고... 뭘 그리 꼬치꼬치 묻냐? 그러는 넌 왜 여기로 버스타러 온건데? 너도 학원가는거 아냐?”
“아..난 그룹과외 받거든. 일주일에 두 번. 동청동쪽이야.”
“아... 너도 혹시 3반 민재형이 하는 영어과외 하는거야? 승진이도 그거 받으러 다녔었는데…”
“그...그래? 근데 승진이는 없던데…”
“...개는 이번 달부터 안 다녀. 너무 멀대. ...아! 298번 왔다! 오 석수 저거 맞지? 가자!”
“뭐야..너네 둘이 학원 같은데 다니는거야?”
수호는 이상하다는 듯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다고 해둘께. 내일 봐!”
학생들이 잘 가지 않는 노선으로만 도는 298버스를 올라타는 둘을 수호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듯 노려보고 서 있었다. 수호가 선생에게 이르거나 아이들에게 소문을 내지 않을 것은 알고 있기에 둘은 수호에게 들킨것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신경이 쓰이는 것도 아니었다.
“웃기지 않냐? 남도 보이는 자기 마음을 자기는 모르고 있다는거? 장수호는 원래 우유부단하더니 여전하군.”
‘또 뭔 헛소리야.’
“저 자식... 네 단짝을 꽤나 좋아하고 있거든. 그런데 그런 마음조차 품으면 성적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겁쟁이라 저러고 2년째 끙끙대고 있을걸.”
‘오.. 그래? 흠.. 승진이도 수호 꽤 좋아하는데... 근데 뭐 둘다 그러다 말 것 같다야.’
“그러게...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커플도 있는데말이지…”
한주는 흔들리는 버스안에서 혼자만 꼿꼿한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지금 조 미나 도와주러 가는거잖아. 왜 이상하게 엮고 난리야.’
“ 뭐 꽤나 즐기는 것 처럼 보이길래... 저 녀석도 그렇고... 입맛은 영감같아가지고.... 인삼껌이 뭐냐?”
‘좀 조용히 해줄래? 내가 이제부턴 좀 뇌의 기를 모아야겠거든.’
“오... 정정당당하게 해보시겠다? 그렇담 내가 별로 개입하지 않아도 되겠군.”
‘걱정마! 그깟 아저씨들 쯤이야...’
“기원에 쭈그리고 앉은 놈팽이들이야 다 따로 노는 인간들이라 굳이 걱정할건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정호랑 정호친구 규원이도 온댔어. 그런데 이것도 노름인데... 괜찮겠어?”
“돈 걸고 하는 스포츠라고 생각하지 뭐. 계속 할 것도 아니고.. 어쩔수 없잖아. 훔치지 않는 이상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
윤조는 4살에 이미 바둑에 입문했다.
윤조의 아버지 하 만섭은 서울대 출신으로 국가 공무원직에 있지만 바둑실력이 뛰어나 아마튜어 대회를 휩쓴 알아주는 바둑 기사였다. 또한 하 만섭의 동생 하 중섭은 한 때 아시아 바둑왕전의 타이틀을 차지했던 프로기사였지만 도박으로 경력을 망치고 지금은 안양에서 비디오방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여전히 천호동 기원을 주름 잡으면서… 몇 년 전 중섭이 중학생인 윤조를 데리고 기원을 드나들었다가 만섭이 알게된 후 동생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렸지만 그 때의 경험으로 윤조는 선뜻 미나의 빚을 갚아줄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네 생각처럼 그렇게 쉽진 않을걸. 천호동 기원이 꽤나 유명하던데 말야…”
‘그만 떠들라고…’
윤조는 사실 조금 불안했지만 애써 괜찮을거라 최면을 걸고 있었다.
“내리면 정호가 일하는 노래방에서 교복 갈아 입고 2층으로 올라가면 돼. 규원이가 그 기원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대. 판 돈은 상대에 따라 다른건데 꽤 크게 거는 고객부터 쫌팽이들까지 규원이가 레귤러들은 다 잡고 있으니까 그건 네가 정하면 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참... 공부 하는 것들은 돈도 희한하게 벌 생각을 하는군. 난 애들 모아서 바짝 노가다 뛸 생각을 했었는데 말야.”
“...그러니까 너도 지금이라도 공부해….”
윤조는 꽤 영리한 석수가 집안사정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건 공부라기 보다 타고나는 머리지... 쟨 그런 머리는 없어.’
한주가 쉬지 않고 비아냥대자 윤조는 몰래 한주를 노려보았다.
“....너는 꽤 재수없어…”
석수가 갑자기 뱉은 말이었다. 윤조는 석수를 쳐다보았다.
“너는... 그냥.. 그래. 무심한듯 한데 속이 있고 공부도 잘하면서 막히지도 않았어... 그리고 ... 네가 치는 피아노는 뭐랄까... 그냥 울고 싶게 만들어... 그리고... 나는 자꾸 너한테 눈이 간다. 별로 끝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도 말야.”
버스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어둑해진 거리의 희미한 가로등빛이 가득 버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피하지 않고 내려다보는 석수의 눈을 윤조는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언젠가 별관에 석수가 그리다 버려둔 갈매기 그림을 윤조는 몰래 가져온 적이 있었다. 그 갈매기는 참 이 아이와 닮았다. 아직 무엇이 사랑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히 윤조는 석수를 보면 아프다고 생각했다.
“ 그렇지.... 끝이 그닥 좋지 않을 것이란 것쯤은 인간이라도 그냥 느끼기도 하는거지…”
감정이라곤 없는 말투의 한조가 옆에서 나즈막히 속삭였다.
‘과연 끝이 좋은 사람이 있긴 한거니? 끝이 좋으면 어떤걸 겪었어도 좋은 것이 되는거니? 사는 것은 고통인것 아니니?’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거야. 사람들은 죽으면 지옥에 가는건줄 알지만 사실은 죄를 저지른 인간들이 겪는 것이 인생이란 지옥이지. 그래서 인간은 어리석은거야 하하하.”
갑작스런 석수의 고백과 입을 다문 윤조...
몇 없던 승객들이 종점 전 정류장에서 우루루 내리고 텅 빈 버스안에는 자리가 남아도는데도 굳이 손잡이를 붙들고 선 석수와 윤조... 그리고 그들의 긴 그림자가 함께 있었다.
“아니 어떻게 교복을 갈아 입었는데도 여전히 완전하게 고삐리로 보이냐? 너 같은 손님들이 제일 싫어. 웬만하면 매상땜에 받아줘야 하는데 단속뜨면 아주 얼굴에 ‘고삐리’ 써있단 말야…”
장사가 그다지 잘 되는 편이 아닌 2층 노래방에서 기다리던 정호가 빈 방에서 옷을 갈아 입고 나온 윤조를 아래 위로 훑어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 같이 생긴애들도 노래방 오나보지?”
“심심하게 생기면 다 공부 잘 할거라는 그 이상한 편견은 어디서 나오냐? 에라 모르겠다... 가자. 어서…”
“넌 일 안하냐?”
“가자. 너 하는 동안 옆에 앉아서 석수랑 오목이나 두게…”
“오목은 할 줄 아나 봐?”
“이거 봐.. 이 은근 무시하는... 야! 나도 초딩땐 받아쓰기 백점 맞고 이랬어. 왜 이래 이거…”
“뭐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난리? 가자. 시간 없어.”
3층의 낡은 기원은 보기엔 그래도 꽤나 역사가 되는 곳이었다. 윤조는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삼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 신경이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