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끼이이익’
오래 돼 삭은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지만 꽤 넓은 기원안을 가득 채운 아저씨들은 시끄러운 문소리에도 주목하지 않았다.
“여긴 뭐 지옥이냐?”
매캐한 담배연기가 가득 찬 실내로 들어설 엄두를 선뜻 내지 못한 채 윤조가 낮게 투덜댔다.
“너 나중에 집에 가기 전에 노래방 들러서 머리 감아야 돼. 안 그럼 오늘 부로 골초된 줄 알고 집에서 난리날거다. “
규원이 문 옆에 있다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내가 너 대학생이라고 했고, 아마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다고 했더니 직업은 없어도 승부욕은 쓸데없이 많은 몇이 기다리고 있다. 판 돈 보여주고 시작해야 하니까... 여기... 잃으면 가만 안 둔다.”
규원은 십 만원쯤 되는 지폐를 뭉쳐 윤조의 가디건 주머니에 쑤셔 넣더니 팔을 잡고 캐비넷등으로 가려 작은 방처럼 되어 있는 공간으로 데리고 갔다. 넓은 기원을 가로지르지 않고 가장자리를 돌아 윤조 일행은 안 쪽 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윤조는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혹시라도 중섭이 앉아 있지 않나 빠르게 확인하고 있었다. 다행히 중섭은 보이지 않았다.
‘야, 오늘 이 기원에 삼촌 안 뜨겠지? 뭐 일러주진 않겠지만 삼촌이 있으면 좀 신경쓰일것 같은데 말야…’
윤조는 무심코 습관처럼 한주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한주는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고 있었다.
‘헐... 꼭 도와줄 것 처럼 하더니... 역시 녀석은 나보다 실력이 없는 거야.’
없이도 잘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역시 한주가 없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약간 불안했다.
“좀 한다구? 나도 좀 하는데... 학생, 돈은 있겠지? 난 가리는 싫어하는데말야.”
“저도 가리는 싫어요.”
윤조는 차분히 가디건에서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거 갖곤 한 판 밖에 안 되겠구만. “
“네. 전 한 사람하고 한 판씩만 할겁니다. 그러니 미리 말씀드리는데, 어린 여자한테 지고 질척거리실 거라면 대국은 사양할께요.”
“.... 호.. 꽤 건방진데? 실력이 있으니까 이러는거겠지? 아가야... 태권도랑 격투기는 다르지 그치? 그런거야. 고상한 예술 스포츠가 아니라 물고 뜯는 투견장 한 복판에 앉아 있는거라고. “
“알고 왔구요. 약속이나 하시죠. 딱 한 판입니다. 지든 이기든…”
“오케이. 돌 가려야 하나?”
“아뇨... 백 잡으세요. 제가 흑을 잡겠습니다.”
“제대로 배운 티 나네. 경로사상도 있고... 흠.”
오래 된 기원엔 오래 된 꼰대들이 많다.
정 사장은 대기업 부장으로 정년퇴직한 후 근처에서 돼지갈비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기획하고 머리쓰던 일을 하던 그가 돼지 갈비 대수나 세고, 부서 직원들을 부하 부리듯 하던 그가 술취한 손님들 비위를 맞추는 것은 그에게 있어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그나마도 잘 하지 못하는 정 사장은 가게일은 호탕한 아내가 알아서 하게 되고 그저 구석에 밀려나 있기 일쑤라 근처의 기원에 붙어 살다 시피 하고 있었다.
“그래, 학생은 전공이 뭐야?”
“바둑 둘 때는 말 하지 않습니다. 이왕 입을 떼셨으니 저도 한 가지만 말할께요. 가게 잘 되시죠? 제가 마음껏 따도 되는 정도인지요?”
윤조는 정말 그것이 신경쓰여 공손하게 물었다.
“하하하.
이 아가씨 정말 맹랑하군.
내가 우스워 보여도 말야, 나 꽤 한다구. 바둑. 아가씨야 말로 나중에 졌다고 울고불고 조금이라도 돌려달라 어쩌고 하면 곤란해.”
“전 그럴 일 없으니 사장님도 약속하시죠.”
정 사장은 그제야 웃음기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 사장과 윤조가 드디어 대국을 시작하자 석수와 정호도 이내 옆자리에서 사뭇 심각하게 오목을 두기 시작했다.
기원에서 내기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속기 바둑에 능하다.
대국이 끝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 사장은 기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채 내기 바둑만 주구장창 둬서 수가 다 읽히는 아마츄어였다. 윤조는 속으로 웃음이 났지만 애써 응수를 해주고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게 이겼다.
정 사장은 대국이 끝날때 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자리를 뜨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정호와 석수가 아무 말 없이 일어서 다가오자 하는 수 없이 앞자리를 비우고 떠났다.
“아가씨, 내일 또 한 판 될까? 내가 오늘은 너무 살살봐줬네. 내일은 봐주는거 없어!”
“네. 내일 좋아요. 하지만 판 돈은 두 배로 올리겠어요.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리네요.”
“좋아! 두 배! 내일 같은 시간에 보도록 하지.”
“오... 쑥맥! 좀 하네? 딴 돈 중 10프로는 내 이자, 알지?”
규호가 놓인 돈 중 몇 장을 집으려 하자 윤조는 그의 손을 멈추고 낮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미나 빚부터 해결하고... 남는건 너네 다 줄 테니까 ... “
규호는 머쓱해져서 어깨를 들썩해 보이더니 정 사장에게 얘기를 듣고 윤조와 대국을 하려 하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이 사장을 데리고 왔다.
이 사장은 정 사장 보다 조금 나았지만 여전히 윤조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어서 고시생 이씨가 도전했지만 윤조는 고시생과의 대국은 거절했다. 돈을 따고도 찝찝하고 싶진 않았다. 근처에서 공증 사무소를 하는 법무사 윤씨와의 대국을 마치자 수중에 54만원이 모였다.
“야, 너 이제 그만해야해. 늦겠어.”
오목만 몇 십 판을 두다 지겨워져 만화를 보던 석수와 정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벌써 시간은 10시가 넘어 있었다.
“가긴 어딜 가. 두 판은 더 해봐야지!”
“억울하면 내일 다시 오세요. 오늘은 그만하고 집에 가야해서…”
“누구 맘대로 간대. 앉아 봐!”
누구나 뒤가 깨끗한 것은 아니다. 윤씨는 새파랗게 젊은 여자애한테 진 것이 자못 억울한 듯 어거지를 피우고 있었다.
“왜 이러세요. 점잖은 분이 점잖게 페어 게임 하셔야지요. “
예전에 삼촌과 기원을 드나 들었을 때 자주 봤던 광경이다. 진 자는 이길 때까지 하고 싶은 것이 본능이니까…
정호가 윤씨를 제지하는 동안 석수가 몸의 반밖에 안 되는 윤조의 어깨를 감싸고 기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최대한 손님을 많이 받으려고 바둑판이 놓인 테이블을 여기저기 붙여 놓아 둘은 모서리에 정강이를 찧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기원 문을 나섰다. 석수는 어깨에 얹었던 손을 풀지 않고 있었다. 단내가 섞인 그의 땀냄새가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기원을 들어섰지만 윤조는 그릇된 승부욕을 돈으로 계산하는 그 곳이 썩 편하지 않았다.
“근데 너 진짜 꽤 한다? 그 치들 꽤나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을텐데말야. 완전 너한테 꼼짝도 못하더라구. 갑자기 바둑을 배워볼까 싶어졌어.”
“딱 돈 모을 때 까지만이야. 뭐 아주 떳떳한것 까진 아니라도 적어도 사기쳐서 버는건 아니니까 뭐…”
윤조가 노래방 화장실에 머리를 감으러 들어간 사이 정호가 어디선가 낡은 선풍기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야! 애 감기 걸릴거 아냐!”
“까고 있네. 노래방이 여관도 아니고 드라이기를 어디서 구하냐 이 새끼야. 이거라도 있는게 어디야. 쫄딱 젖은 채로 나가면 그게 더 골 때려.”
윤조가 더러운 노래방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닦고 나오자 정호는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어놓고 있었다. 낡은 선풍기 살 사이사이에 소복히 앉은 먼지가 꽤나 거슬렸지만 하는 수 없었다.
“으흐흐흐흐”
머리를 말리다 말고 윤조는 실성한 듯 깔깔대고 있다.
“뭐냐? 무섭게스리... 미친거냐?”
석수와 정호는 팔짱을 낀 채 윤조를 쳐다보다 어이없다는 듯 묻는다.
“아냐.. 아무것도.. 그냥... 나 이래본 적 없거든. 자율학습 째고 부모 몰래 이런 짓 하는거... 좀 겁나기도 한데... 뭐랄까. 왜 이리 우습지?”
“헐... 이 정도가 우스우면 우리처럼 살았다간 아주 웃다가 배터져 죽겠군.”
정호는 윤조를 한심하단 듯 바라보다 술에 취한 회사원 패거리가 들어서자 얼른 본업에 충실하러 돌아가 버렸다.
“동네까지 바래다 줄께. 괜찮다는 소리 하지말고... 확 짜증낼거니까.”
석수는 인삼껌 하나를 다시 건네며 윤조에게 말했다.
“ 보통 복 받은 것들은 말야.... 딱 쟤가 표본이지. 지 밖에 모르는 것들은 복을 받을 수가 없거든. 근데 복 받는 것들은 보통 오장 육부 옆에 하나가 더 붙어 있어. ‘오지랖’ 이라고... 아... 남 뒷말 하는 그런 못된 심보 말고 말야... 쟤도 지금 자기가 왜이리 발 벗고 나서나 고민이 많이 될거다. 근데도 그렇게 해야하지. 왜! 쟤는 복 받은 년이니까말야. 계속 복 받을 짓을 계속 하고 살거니까. “
버스에서 한주는 석수와 윤조에게서 떨어져 뒷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참 인간들은 보면, 반대끼리 끌려. 원래 잘 맞기론 비슷한것들끼리가 최곤데 말야. 나 같이 더러운 영이 보면 앞이 빤히 보인단 말야.. 에효.. 둘이 안 맞아. 남자애가 너무 고달픈 인생이야. 자격지심도 많고... 근데 남자가 보기에도 꽤 멋있긴 하단 말이지...그 조 미나인가? 걔가 화근이야. 걔도 불쌍한 인생이지... 여럿 망치게 만들게 되니까... ”
언제 왔는지 주정뱅이 영이 한주 옆 자리에 옆으로 드러누워 담배를 피고 있었다.
“.... 나는 어떤 일에도 끼어들면 안 되는거죠?”
여전히 윤조의 옆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한주가 착잡하게 말을 꺼냈다.
“운명을 바꾸지 않는 선에서만 간섭해야 하는거야. 저들과 우리는 속한 세계가 다르다는거 알잖아. 그러니까 너도 자꾸 마음 퍼지 말고 그만해라.”
한주는 주정뱅이 영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른 채비하고 일어서그라. 청산쪽에서 자꾸 어떤 잡 것이 불러대는데 심상치가 않아. 얼른 거기 가보게... 일어서.”
“...저도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저씨랑 저랑 같이 관계된 일이 대체 뭐에요?”
“그걸 나도 모른다마시. 얼른 일어서드라고.”
검은 다리를 건너자 컴컴한 산 계곡 가에 희미한 촛불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주정뱅이 영과 한주는 촛불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쟤... 걔 아니여? 그 꼬맹이네 반 돋보기 쓴 애?”
“맞네요. 정말 기분 나쁜 여자애에요. 대체 뭘 바라는 건지…”
“쟤가 뭘 바라는게 아닐거야. 쟤한테 씌인 뭔가가 바라는거지... 으... 뭐가 이리 추워! 이건 물에 빠져 죽은 영인데... 아우 독하다. 독해... 이런 한은 정말 오랜만이.... 헉!!”
쉴 새 없이 불평을 쏟아내던 주정뱅이 영이 잔뜩 웅크린채 종종 걸음으로 앞장을 서다 말고 갑자기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얼어붙었다.
“안 가고 뭐해요? 한 번 가서 담판을 지어보자구요. 대체 쟤가 왜 우리를 부르고 지랄인지...”
반대쪽으로 머리를 두고 연신 조아리며 치성을 드리고 있던 양 보살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