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네가 알던 그 하중섭이 아니라고. 저기 뒤에 붙은 시꺼먼 도박령이 적어도 하 중섭이랑 함께 한게 3년은 넘었다고 말하고 있어. 이길테니 나를 믿고 한 이십분만 잃어라.”
‘이십분만 잃으라니 무슨 말이야?’
“네가 내 말을 안 들으니, 내가 잠깐 네 몸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도 할 수 있어?’
“말 안하고 할 수도 있지만 친구를 그런 식으로 겁탈할 수는 없지. “
‘이번만이다... 아.. 왠지 찝찝한데... 못 이기면 알아서해. 부적을 아주 세트로 주문할테니.’
한주는 대답은 않고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윤조를 바라보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두 손으로 천천히 윤조의 얼굴을 감싸잡았다. 바둑판위를 서서히 기어와 윤조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더욱 갖다 대기 시작했다.
‘왜 이래…’
윤조는 몸이 굳어 어쩔줄 몰라하며 속으로 당황해서 한주를 향해 물었지만 한주는 여전히 말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심해처럼 뻥뚫린듯 깊디 깊은 한주의 눈이 바로 눈앞에 있는가 싶더니 그는 한겨울 고드름만큼 차가운 입술을 윤조의 입술 위에 포갰다.
“생각을 오래 한다고 없는 수가 생각나는건 아니지.”
자꾸 뜸을 들이는 윤조를 답답하다는 듯 이 사장이 옆에서 비아냥거렸다.
“대타를 데리고 올거면 미리 말했어야 하는거 아니에요? 낫살이나 처먹고 비겁하기는…”
윤조가 쩔쩔 매는 것을 까막눈인 석수나 규원도 알 수 있었기에 석수는 사납게 반응했다. 아무리 어려도 덩치가 산만한 고등학교 남학생 둘은 위협적이다. 이 사장은 군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판을 좀 읽었을 뿐입니다. 이제 속기로 진행할께요.”
윤조, 아니 한주는 침착하게 돌을 놓기 시작했다.
수가 진행될수록 다 이긴 판이라고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뒤로 누워 있던 이 사장이 몸을 세웠고 시종일관 돌부처처럼 동작이 없던 하 중섭은 연신 머리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초반에 제가 바보짓을 많이 해서 겨우 한 집 차이로 이겼군요.”
대국이 끝났다. 집정리를 하기 시작하며 윤조 아니 한주가 침착하게 말했다.
“설레발은... 일단 집 계산 끝나고 까불어도 늦지 않아. “
중섭은 정말 기분이 상한 듯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어느 새 본인들 대국을 멈추고 구경을 하기 시작했던 기원안의 인간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며칠 새 윤조는 이 기원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다들 어리디 어린 학생이 기원에서 잔뼈가 굵은 늙다리들을 차례로 이기는 것을 흥미진진해 했다.
“어차피 지겠지만 그래도 꽤 선전했지. 하 중섭을 상대로 돌 하나 미리 깐 것 없이 이 정도라니...아니.. 가만... 이건 ……”
계산이 끝났다.
한주의 말대로 승부는 딱 한 집 차이로 윤조가 이기게 되어 있었다.
“바둑이 스포츠나 예술이 아니라고 했죠? 스포츠건 예술이건 상관 없구요,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놓쳤다는것은 알고 있겠죠? 중요한 건 이겨야 한다는 의지가 순수한 것이냐는 거에요. 이겨야 하는 것이 수단이고 또 다른 욕망이 있을 때 판단력은 흐려지고 돌은 오염됩니다.”
하 중섭은 차가운 어조로 차분하게 말을 하고 일어서는 윤조를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지 애비만큼 냉정하군…”
“뭐야. 저 꼬마랑 아는 사이였어? 하 기사? 봐준건 아니겠지?”
“그..그럴리가요.... 아시잖습니까.
저도 아주 죽을 맛이라구요…”
돈을 왕창 잃은 이 사장이 중섭의 멱살을 쥐고 길길이 뛰는 것을 보다 윤조 일행은 자리를 떴다.
“사실...
거의 진 판이었는데...
어떻게 살린거야? 이상해... 분명 그 자리에 나도 있었을텐데 기억이 안난다구…”
윤조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아무도 없는 노래방에 오도카니 혼자 앉아 있었다.
“그게 완전빙의라 그래... 숙주가 초대를 한 경우는 완전 빙의가 일어나. 네 영혼은 잠깐 내가 속한 구천에 남겨져 있고 내 영혼이 네 몸을 움직이지. 육체와 오래 분리가 되어 구천에 남겨진 영혼은 점점 의식이 살지만 구천에서 의식이 살아나도 자력으로 본인 몸을 찾기가 힘들어져. 하지만 그런 경우는 혼이 오래 몸을 떠나 있어야 해. 다시 인간 몸에 들어간 영이 욕심이 생긴 경우기도 하지. 몸을 다시 주인에게 내어주기 싫어진거야.
대부분 무당처럼 불완전 빙의가 일반이야. 숙주가 초대하지 않았지만 영이 억지로 그 인간에게 스며드는 경우야. 한 몸에 두 영혼이 상존하는거지. 물론 끼어든 혼이 훨씬 강하니까 웬간해선 주인 혼이 장악을 못하지만… 혼이 약하거나 아주 오래전부터 계약이 된 경우야. 무당이 대물림을 하는 경우는 주로 첫 무당이 아주 센 영에게 허락을 했기 때문이야. 인간은 죽어도 영은 사라지지 않으니 그 계약은 그 인간의 대를 이어 계속 효력이 살아 있는 셈이지.”
“... 내가 굉장히 위험한 허락을 한 셈이군…”
“그렇지... 함부로 예스라고 하면 안되는 짓을 한 셈이지. 하하. 걱정마... 내가 악마라 해도 너를 망치진 않을테니…”
“...아 맞다! 너 아까!!! 내 입…”
문이 열리고 석수와 정호가 드라이기를 들고 나타났다.
“석수 이 새끼 진짜 웃기지도 않네. 너 감기 든다고 선풍기 죽어도 못 쓰게 하더니 오늘은 집에서 드라이기 싸들고 온거 아냐?”
“입이 어쨌다고?”
석수는 정호의 말을 무시하며 윤조의 혼잣말을 들은 모양 되물었다.
“아.. 아냐.”
그러고 보니 어느 새 담배냄새에 찌든 머리를 감기까지 한 모양 머리가 젖어 있다.
“내가 그말 할라 했는데 말야. 아까 머리 감으면서 보니까 뒤통수가 아주 판판하게 도마같더만... 드라이 할때 신경써서 좀 볼륨도 넣고 해라.”
“죽을래?!”
한주가 놀려대자 신경질이 난 윤조가 또 한 번 입 밖으로 말을 뱉고야 말았다.
“왜? 내가 뭐 잘못했어? 드라이기가 마음에 안드냐?”
석수는 황당하다는 듯 윤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미안. 딴 생각하다가…”
“너 뭐 병있냐? 가만 보면 한번씩 헛소리를 하더라.”
“그..러게…”
윤조는 머쓱해져서 얼른 드라이기를 들었다.
“줘봐. 바둑 두느라 피곤할텐데.. 내가 말려줄께.”
“오... 이것들이... 이건 이상한 분위기 아냐?”
정호가 껄렁한 말투로 놀리자 석수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 오늘 토요일이라 손님 많은데.. 얼른 하고 방 비워주라. 참.. 그리고 미나 걔 오늘 돈 주면 안 될것 같애. 월요일에 그 꼰대들이랑 같이 만나서 네가 건네줘라.”
“우리가 바보냐.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그 기집애 오늘 이 돈 주면 되지도 않는 가방이나 사제낄걸.”
처음 겪는 빙의는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윤조는 스스로 머리를 말리고 싶었지만 기력이 하나도 없어 석수가 말려 주는대로 맡기고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잘 말리네?”
“응. 내 동생이 요즘 일하다 팔을 다쳐서 깁스를 했거든. 걔 머리를 맨날 말려주다보니까…”
“동생한테 잘하는것 같애….”
“착하고 좋은 애야. 다음에 한 번 같이 볼래?
어쩌면 걔 없었으면 집 그리되고 아마 정말 막 나갔을지도 몰라... 천사같은 애지... 얼른 고생 그만하게 해주고 싶어.
지우가 유독 미나를 좋아했어. 그래서 나도 미나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거야.”
“그 양아치들이 이 돈 받고 미나를 좀 놔줘야 할텐데…”
“걔가 잡힌 그 패거리는 그렇게 악질은 아냐. 동네 양아치지... 그래도 그 패거리 대가리가 시장 조카라 신고 따위 먹히지도 않지만… 돈 받으면 떨어질거니까 걱정마.”
“빗은 여기…”
머리가 대충 마르자 석수는 함께 가져 온 빗을 건넸다. 손거울을 꺼내 들고 머리를 빗기 시작하는데 어깨 너머 여전히 윤조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대고 서 있는 석수가 보였다. 거울속의 그의 눈과 마주치자 윤조는 왠지 쑥스러워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의 눈을 한참 맞추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석수는 항상 호탕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잘생긴데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 인기야 늘 있었지만 여학생에게 관심이 없어 불친절한 그는 ‘나쁜남자’에게 무조건 꽂히는 수많은 소녀들의 이상형이곤 했다. 윤조가 그 때부터 석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별관에서 마주쳤던 석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거칠었지만 슬퍼보였고 어깨에 절망이 매달려 지칠대로 지친 청춘이었다. 하지만 지금 바라보는 석수는 또 좀 달라져 있다.
그 새 우리는 자랐다.
윤조가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빗질을 멈춘채 가만히 석수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석수도 윤조의 눈을 거울 너머 들여다본다. 분명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아이지만 결국 그도 윤조도 가장 찬란한 나이에 회색빛을 덕지덕지 몸에 바르고 앉은 슬픈 고등학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