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제 갈까? 가는 길에 미나한테 다 잘 되었다고 전화하고... “
윤조는 가방에 손거울을 넣고 빗을 석수에게 내밀며 일어섰다. 그때였다. 빗을 내민 손은 본체도 않고 석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올려다 보는 윤조의 입술을 바라보다 자신의 입을 갖다 대었다. 한주와의 얼떨떨한 입맞춤을 다시 떠올려보기도 전에 윤조는 석수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두 아이는 입을 갖다 댄 채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하게 멈추고 있었지만 둘 중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야, 너 하 윤조! 그렇게 안 봤는데 이거 완전 꾼 아냐? 어떻게 하루에 두 명하고 키스를 하냐?”
“웃기네. 네가 한 거 그것도 키스냐? 그건 빙의하려고 한거 아냐?”
“뭐 굳이 빙의를 하려고 입을 맞출 필요는 없지…”
“뭐야?!!!”
“너 오 석수한테는 얼굴 빨개져서는 암말도 안하더니... 사람 차별하냐?”
“넌 사람 아니잖아!”
“그러니까.. 사람도 아닌거랑 뽀뽀좀 한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발끈하냐.”
한주는 적반하장으로 버럭 화를 내더니 성큼성큼 앞장 서 걷는가 싶다 이내 사라져갔다.
“귀신주제에 질투는…”
윤조는 여전히 석수와의 두근거리는 첫키스를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흠... 애매하네.. 그럼 첫키스는 이 한주랑 한거야 아님 오 석수랑 한거야…’
“야! 당연히 나랑 한거지! 몰라서 묻냐? 너 첫 이라는 접두어의 의미를 모르냐?? “
못 참고 그새 돌아와 발끈하는 한주를 보자 윤조는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그건 아니지... 어떻게 정하냐에 따라...
내가 의미를 두는 키스 중 처음을 가린다면 난 기원이 아니라 노래방에서 첫키스 했다고 해야겠네.”
“너 진짜…”
한주는 살아 있을때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는 편이었지만 피아노 학원에서 지정 피아노를 다른 사람이 쓰고 있을 때는 그야말로 돌변하여 폭발하곤 했었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의 피아노들이야 공용이지만 처음 온 아이를 제외하곤 아무도 한주의 피아노에 손을 대는 아이는 없었다. 마치 그때 자기 피아노를 뺏겼을 때 만큼 한주는 화가 나있었다.
“아니... 의미로 치면 너도 별 의미 없이 한 거 아냐?”
“키스를.. 그것도.. 첫 키스를 아무 의미 없이 하는 인간도 있냐? 난 너를 보면 아직도 사라진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구. 넌 그렇지 않은거니?”
뜻밖의 질문에 윤조는 당황해 대답을 하지 못한 채 한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물쭈물 말을 하지 못하는 윤조를 보자 한주는 정말 화가 난 모양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바로 사라져 버렸다.
언제부터…?
어쩌면 그 때 부터…?
하나밖에 없는 자기 우산을 주고 달아났던 그 날부터?
“조 미나 연락 되는 사람 없어?
노 지민! 너 미나한테 연락 해 봤어? 안 받아?
가뜩이나 벌점도 많은게 근신중에 무단결석하고 말야... 아주 막 가자는거구만...”
월요일... 미나는 등교하지 않았다.
점심 시간이 시작되자 마자 윤조는 석수를 보러 별관쪽을 향했다.
“ 미나... 학교 안 왔어...
어째야 하지?”
“기집애가... 왜 하필 오늘 안 나타나고 지랄...
일단 돈은 줘봐. 넌 오늘 나오지 말구, 나랑 애들 몇 명 같이 그쪽 양아치들 만나러 나가볼께. 거기엔 나타날지도 모르지…”
“걔네가 미나를 어찌 하거나 한건 아니겠지?”
“... 모르지... 가 봐야 알겠어.”
석수는 짜증이 난다는 듯 잔뜩 얼굴을 찌푸린채 한숨을 쉬었다.
주말 내내 미나는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땅에 빼꼼 턱걸이를 하듯 작게 열린 창을 제외하고는 꽉 막힌 반지하 방은 낮인지 밤인지 알아볼 수 없게 캄캄했다. 생각보다는 깔끔한 방 한 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엎드린 미나 옆에는 선명하게 두 줄이 그어진 임신테스트기 몇 개가 어지럽게 던져져 있었다.
‘임신이라니... 말도 안 돼... 어쩌면 좋지…’
며칠 전 속이 메슥대고 어지럽기 시작할 때 부터 이미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알았으면서도 미나는 동네 약방을 다 돌아서 테스터를 사 와 똑같은 결과를 다섯 번째 보는 참이었다.
“이런... 옘병...
누구는 갱생의 길을 정성스레 닦아줄라꼬 지 대신 빚 갚으러 다니는데 ... 뭐 곧 스스로 인생 샤타 내리겠구만. 저번부터 아주 민들레 체질인지 약해터졌더구만...쯔쯔...아고... 환기라곤 안 시키나보구만. 아주 그냥 숨이 답답하다 ... 캬악! 퉷!!”
주정뱅이 영은 꼼짝도 않고 같은 자세로 쭈그리고 있는 미나 옆에 바짝 다가 앉아 같은 모양으로 쭈그리고 앉아 미나를 살펴보다 혀를 차기 시작했다.
“얘랑 상관도 없으면서 여긴 웬일이세요.”
한주는 아까부터 미나를 차갑게 내려보고 서 있었다.
“나야 니 찾아 온거제. 전할 말이 있응께... 그나저나 학상은 왜 여기 섰소?”
“나는 쟤한테 받을 빚이 있어요.
언젠가 쟤가 나한테 지 목숨을 걸고 별 것도 아닌걸 구걸했지... 그래서 지금 그 빚을 받을까 어쩔까... 보고 있는 참이오.”
한주의 눈은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그럴거 같음 거 왜 네 친구 윤조한테 미리 귀뜸을 했어야제. 그라믄 그 학생이 며칠씩 그 개고생을 안해도 되었을 터인디... 쯔쯔”
“..... 그게.....
아.. 진짜 하 윤조 걸리적거리네…”
한주는 뭐가 고민인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오늘 밤에 별 일 없제? 없는거 다 아니께 나랑 같이 청계산 좀 가드라고.”
“야밤에 산을 왜 가요.”
“아 가보면 알어. 재미지고 유익할 것잉께 꼭 같이 가드라고잉. 오케?”
주정뱅이영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한주는 여전히 남아 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