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쩔 수 없지. 목숨은 본인이 선택하는거니까... 그런데 쟤 목숨을 내가 쥐게 되면 뭐가 좋은거지?”
죽어보기 전에는 삶과 죽음이 어떻게 갈리는지 알 수 없다.
한주가 기억하는 단편들은 이랬다.
“너 ... 뭐냐, 이거?“
몇 십 만명이 우루루 몰려 들어 함께 같은 출발선에 선 마라톤을 상상해보라. 시작하고 몇 십 분이 채 되지 않아 나머지 몇 십 만 명이 내 경쟁 상대인것이 아니란 것은 자명해진다. 내 경쟁 상대란 내 주위 기껏해야 몇 몇 정도인 것이다. 그마저도 경기가 길어지면 이렇게 된다. 바로 옆에서 헐떡이는 타인따위 내겐 존재하지 않는다. 내 경쟁상대는 바로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내 자신일 뿐이란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끝도 없어 보이는 경쟁속에 매 달 뒷통수에 붙이는 성적이란 족쇄는 피아노마저 관둔 한주를 어지간히 조으고 있었다. 한주는 제대로 칭찬 한 번 해 주지 않는 아버지 이 정구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었다. 부모의 사이는 늘 냉랭했고 출장이 잦은데다 집에서도 일하느라 서재에 박혀 있기 일쑤인 아버지는 어쩌다 건네는 말에 얼음이 서려있기 마련이었다. 아이들이 몸서리를 치는 학교가 오히려 편했던 한주는 피아노마저 관둔 후 현경의 약에 손을 댔다. 개교 기념일이라 야간 자율학습이 없던 날에도 한주는 학교에 남아 공부를 했다. 개교 기념일은 대부분 임시휴교이지만 지역내에서 상위대 합격율이 가장 높은 한주네 학교는 예외였다. 그 날 그는 마지막 성적표를 받았다…
분명 나쁘지 않은, 아니 아주 훌륭한 성적이다. 다만 1등이 아니란 것 뿐... 한주는 분명 긴 말은 없을테지만 부모의 싸늘한 눈초리와 경멸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필통 밑에 숨겨 온 약을 삼키고 수학문제를 풀기 시작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집에 갈 마음도 들지 않고 공부도 되지 않아 망연자실해 있던 한주는 결심한 듯 가방을 싸서 텅 빈 교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나오는데 학교 증축 공사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남기고 간 소주병이 눈에 들어왔다. 한주는 가방을 놓고 물끄러미 소주병을 바라보다 단숨에 반 병쯤 되는 소주를 들이켜 버렸다.
술을 마셔 그런지 이 정구의 싸늘한 눈도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한주는 무슨 용기에서인지 거실 한 복판에 서서 가방을 열어 성적표를 꺼냈다.
“너... 뭐냐, 이거?”
무심코 성적표를 받아 든 이 정구는 금방 눈에 들어오는 등수가 1이 아니란 것을 이런 식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한주는 한꺼번에 들이킨 소주가 약과 섞여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애써 붙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가만... 이 새끼...
이 자식 이거 술 처먹었잖아! 당신!! 이리 좀 와 봐!! 에미나 새끼나 술이나 처먹고 잘 돌아가는 집구석이야!!”
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 정구는 한주의 뺨을 세게 올려붙였다.
현경은 포효하는 이 정구의 옆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지만 결코 한주를 안쓰러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새벽, 한주는 잠들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천정에 붙은 전등을 떼내고 목을 맸다.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사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의 장치는 완벽에 가까웠고 어느 순간부터는 고통을 즐기는가 싶더니 까맣게 기억이 끊겼다. 다시 그가 기억을 하기 시작하는 부분은 허공에 매달린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고 고통으로 눈은 튀어나와 있었으며 혀를 길게 빼 문 채 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때? 좋냐?”
문득 옆에서 들리는 쇳소리를 닮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보니 정체불명의 까만 모자를 쓴 남자가 까만 모포를 몸에 두르고 서 있었다. 남자가 쓴 모자는 갓 같기도 하고 또 어느 중동지역의 전통 모자 같이도 생겼다. 어쨌건 높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모포속에서 장부같이 생긴 책을 꺼내 뭔가를 갈겨쓰기 시작했다.
“제가... 죽은거죠?”
“... 눈깔 없냐? 뭘 묻고 그래…”
사내는 핀잔을 주면서도 연신 무언가를 기입하는 중이었다.
“그럼 저는 이제... 지옥으로 가는건가요?”
“…왜?”
사내는 잠시 손을 멈추더니 그제사 한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내의 눈을 처음으로 마주 한 한주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은 십분의 구가 흰자위였고 노란 고름 같은 것이 잔뜩 끼어 차마 마주 보기 힘든 그것이었다.
“자살은... 큰... 죄니까요…”
“엄밀히 말해서 죄는 죄지...
어떤 면에서 죄냐면 말야, 일단 니가 뒈짐으로써 마음이 썩는 인간들이 있다면 그거 진짜 큰 죄고, 한 놈도 울어줄 놈이 없는 호로새끼가 자살을 했다치자. 그 새끼는 분명히 지옥 당첨인데, 문제는 걔가 지 목숨 지가 끊었다는게 큰 죄가 아냐. 울어주는 놈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잘 못 살았다는거 자체가 죄인거지. 어쨌거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 처럼 그렇게 지옥, 천당 이런건 나눠져 있지 않아. 분명히 달리 존재하긴 하지만 들어가는 문은 같다는거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지금은 갈래야 갈 수도 없지만…”
사내는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줄줄이 읊고 있었다.
“그럼... 전 지금 어디로 가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