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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다... 너는 어디로 갈 데도 없고, 꼭 가야 하는 데도 없어. 시방부터 너는 귀신이라는 동물이다. 서식지는 구천이라 불리는 세상인데, 인간들 한테 껴서 같이 사는거지. 지내보면 알게 돼. 더럽게 불편하고 심심할거야. 그래서 결국은 지옥이든 천당이든 연옥이든 어디든 보내만 달라고 아우성들을 치고 있는데 말야. 문제는 문을 통과하려면 꼭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그걸 갖춰야 문을 찾아 지날 수 있단 말이다. “
“그게 뭡니까…”
“그건 네가 찾아내야지...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사내는 시큰둥하게 말하더니 모자를 고쳐쓰기 시작했다. 사내가 떠날까봐 불안해진 한주는 사내의 모포자락을 붙잡았다.
“당신이 그럼 저승사자쯤 되는건가요?”
“아니... 어데... 나는 구천지기일 뿐이고 굉장히 하급이야. 꿈이 언젠가는 연옥문에 선 저승사자이긴 한데말야. 하하.
그리만 되면 이런 거적대기 대신에 폼나는 정장 한벌 할텐데.....
어쨌거나 것도 시험이 쎄서... 하여간에 난 문을 통과하는 조건 같은 고급 정보는 약해. 미안. “
“그럼 다른 죽은 이들도 다 구천을 떠돌다가 그 조건인가 뭔가를 채워 다른 곳으로 가는건가요?”
“다 그런건 아니지. 한마디로 구천은 잡동사니만 모인 곳이라고 보면 돼. 그래서 내가 계약직이란거 아니냐. 내 참 더러워서... 허접한 것들이 죽으면 휴일도 없는 내가 치우러 와야 한다니까... 하여간에, 예를 들어 사람을 여럿 죽인 놈이 뒈졌다. 걔는 구천 안 떠돌아. 지옥 직행! 아프리카에 우물 파고 애들 거둬먹인 복지가가 죽었다치자. 그런 착한 영이 왜 이런 더러운데 있냐. 그 분은 천당 퍼스트클라스. 근데 이도 저도 아니게 애매하게 살다가 애매하게 죽은 인간들이 있지. 그런 인간들은 시험 봐서 갈리는거라고 보면 돼. 너 같은 자살영은 옛날엔 지옥 직행이었거든? 저 높은 곳의 창조주가 굉장히 기분이 상하는 죄거든. 어디 감히 시간 쪼개서 만들어주니까 지 맘대로 인생 셔터 내리고 말이야... 그런데 문제가 인간들이 워낙 더러운 종자라 지옥이 넘쳐나고 있거든... 그래서 자살영도 일단 구천에 담그기로 법이 개정된거야. 근데 내가 지옥에 종종 출장 가는데 말야, 구천이랑 거기랑 그닥 다를 것도 없어. 아니 오히려 구천이 더 구리지. 왠지 알아? 여긴 탈출구가 없어... 지옥은 복역기간 끝나면 어찌 됐건 또 세상으로 기어나와. 그런데 구천을 헤매는 족들은 답이 없어. 잘 들어... 넌 이미 알다시피 대죄를 지었지. 지금 너에게 최선은 어떻게든 빨리 지옥으로 꺼지는거야. 그러니까 네가 이제 돌아댕길 이 구천이 어떤지 대충 알겠지?캬캬... 아마 금방 후회할거다. 왜 내가 뒈졌나 하고...
일단 네 몸에서 냄새가 조금씩 나기 시작하니까 말야, 나가자. 그나저나 네 에미라는 년은 아들내미가 기척도 없는데 방문을 열어보지도 않냐? “
사내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한주는 길 한복판 버스 정류장에 사내와 단 둘이 서 있었다. 이내 회색빛의 번호판도 없는 음산한 버스 하나가 서는가 싶더니 온통 얼굴이 검붉은 못생긴 중년 남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내렸다. 남자는 흘끗 이쪽을 보는가 싶더니 반대편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근데 너 같은 신삥은 또 혼자 던져 놓으면 인간들 놀래키고 이상한 짓들을 해대서 말야... 그래서 우리가 또 사수 영 제를 실시하고 있거든. 조만간 너를 찾아갈거야. 그럼 뭐 좀 이것저것 알게될지도...
뭐 이 생활이 썩 좋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뭐 이미 들어선거 빼도 박도 못할게 생겼으니 어떻게든 얼른 다른 곳으로 갈 궁리나 찾아라, 꼬마야... “
남자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던 회색 버스에 올라탔다.
창가쪽에 기대 앉은 사내는 한주를 쳐다보다 모자를 젖히고 얼굴을 내밀어 은밀히 속삭였다.
“살아 있는 인간이 제 목숨을 스스로 내 놓을 때는 놓치지 말고 받아라. 크게 도움이 될거야… 잊지마... 넌 얼른 지옥을 가는게 낫다는걸...구천을 계속 헤매다 보면 점점 영이 사라지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거야. 갈데가 정 없으면 빚을 준게 있거나 진 인간을 찾아라.”
굳이 한주가 윤조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막 사내가 떠나버린 정류장을 거슬러 오를 때 한주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주가 준 우산을 쓴 윤조였다. 윤조가 알아보는 것에 놀란 한주는 일단 피했지만 이내 그는 쓸쓸함을 견딜 수 없어 그녀를 찾게 된 것이었다. 그때는 한주도 윤조도 '우산'이 그들 사이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목숨을 받는다라...
이 아이는 곧 내놓게 생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