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래서?”
“뭘 그래서야... 주정뱅이 아저씨랑 같이 있겠지.”
“.... 진짜로... 죽었어?”
“...응... 그런데... 웃기더라... 하하하하”
갑자기 한주는 뭐가 그리 웃긴지 허리를 꺽어가며 폭소를 터뜨렸다.
“..... 누군가가 죽은 것이 그렇게 웃길것 까지야... 너 원래 이리 잔인했니?”
“같지도 않은 착한 척은 그만둬.
치워달라고 한 건 너야.”
갑자기 한주가 매섭게 노려보자 윤조는 섬뜩해졌다.
“관심도 없는 인간들이 조금 더 평화로와졌는데 우리한테 고맙다고 해야하는것 아니냐?
그나저나 주정뱅이 영은 죽은 지가 십 년도 훨씬 넘었었는데 자기가 어떻게 죽은지도 모르고 있었거든? 그런데 오늘 알게 되었지 뭐야. 본인이 늘 술취해서 동사했다고 말했는데 아까 그 변태 죽는 것 보니까 벽에 머리를 박아서 죽었더라구. 그래서 그 아저씨가 이마에 혹을 달고 다니는거였어. 하하하.”
“그래.. 참 웃기기도 하겠다....아.. 나 속이 안 좋아.. 토하고 싶어…”
윤조는 갑자기 어쩌면 자기가 변태를 죽인걸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속이 메쓱거렸다.
“들어봐.
그 자식은 죽어서도 아랫도리를 보여주고 싶어 할거야. 그렇지만 아무도 더 이상 그 흉물스런 것을 보지 않아도 되지. 대부분의 사람은 그 자식을 볼 수 없으니까... 잘 된거야. 갑자기 왜 그러는거지?
쓰레기의 문제는 냄새가 아니라 깨끗한 것마저 오염시킨다는 거야.“
그래.
그럴지도...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것은...
하 윤조로써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그것이기도 했다.
“학생, 며칠동안 나한테서 수거해 간 돈은 다 갖고 나타난거겠지?”
아직 미나의 빚에 못 미치는 돈이 모였지만 윤조는 침착했다. 약속 시간 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이 사장 패거리는 이미 윤조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 흠... 자기 실력으로 안 되니 대타를 데리고 왔군... 저 대타는 흠...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힘들겠어. 아주 가끔 나타나는데 말 한마디 없이 대국 몇 번하고 돈을 쓸어 간다구. 한 때 프로기사였다던가... 하여간 온갖 도박은 다 좋아하는지 번 돈을 포커판에서 잃곤 한다지...저런 뇌가 내 머리로 들어왔으면 전국 1등은 나 박 규원 차진데말야…”
기원에서 일하는 규원은 이사장이 데리고 온 사내를 아는 눈치였다. 사내는 말 없이 등을 돌리고 서서 더러운 기원 창가에 기대어 밖을 보고 있었다. 중키에 머리가 덥수룩한 사내는 왠지 느낌이 익었다.
“하 기사! 이리 와서 앉지. 학생이 왔으니 말야…”
이 사장이 부르자 사내는 그제사 천천히 돌아섰다. 뿌연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선 사내의 모습은 거무스름해 금방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윤조는 단번에 삼촌 하 중섭인 것을 알았다.
“어…”
윤조는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흘렸다.
“바둑을 좀 하긴 하나보군. 한 물 간 프로기사를 알아보는 걸 보면…”
하 중섭은 윤조의 입을 얼른 막았다.
‘훗. 쉽겠군.
설마 삼촌이 나를 코너로 몰진 않겠지. 오늘 좀 걱정되었었는데 말야... 이 사장이 대타를 데리고 올줄이야 이미 예상했지만 그게 삼촌일줄이야... 나한테는 정말 잘되었지 뭐야. 이 한주. 네가 굳이 필요하진 않겠어.’
“그건 아닐걸.
지금 네 삼촌은 저 이사장한테 빚이 한보따리야. 잘 들어. 도박에 미친 인간은 거의 빙의된거나 마찬가지라구. 이성도 감정도 마비되어 있지. 조카따위 신경 쓸 여유란 도박쟁이 삼촌에겐 없다. 내가 없음 너는 오늘 네 삼촌 빚을 좀 갚아줄 순 있겠어. 하지만 미나는 그렇게 되면 물 건너 가는거야.”
윤조는 한주의 말에 흠칫 놀라 대국을 준비하고 앉아 있는 중섭을 쳐다보았다. 중섭의 동공은 텅 비어 있었고 손톱은 하나 같이 물어뜯어 뭉그러져 있었다. 천재로 태어났지만 심약해 도태된 중섭을 윤조의 아빠 만섭은 경멸했다. 그래도 예전에는 간혹 중섭이 집에 들르곤 했었는데 윤조를 기원에 데리고 다닌 이후 중섭은 몇 년 째 소식이 두절되었었다. 윤조는 시니컬하지만 똑똑한 중섭을 잘 따랐었다. 그는 무엇이든 한 번만 보면 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어디서건 한 번 본 이야기나 지식을 기억하는 중섭은 윤조에게 처음으로 별자리들을 가르치고 피타고라스의 공식을 증명해서 기억할 수 있게 하고 어떤 인수분해도 해 낼 수 있는 본인만의 비법을 알려주었으며 유럽의 지배역사나 노예제도의 기원 등 시험과는 별 상관없는 유익한 지식들을 조곤조곤 알려주곤 했었다.
“그렇지...
이 인간도 등에 업고 있는 영이 하나 있군. 도박쟁이들 중엔 악령이 붙은 인간들이 꽤 있지. 그래서 도박이 무서운거야. 죽어서도 계속 그짓을 해야해. 그러니 그 그릇된 욕망을 풀어줄 인간 숙주가 필요한거야. 그래서 이 세상에 도박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거지. ..
야...
기대 않는게 좋겠어. 저 인간은 꼭 너를 이기려 하고 있어 지금. 그리고 내가 보는 삼십 분 후 상황은 내가 관여 안 한다면 넌 꼼짝없이 일주일간 고생한 돈을 다 삼촌 도박 빚 갚는데 내 놓아야 할거야.”
‘ 아... 어쩌지...
일단 삼촌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해야겠어. 어차피 이 돈을 다 잃어준다 해도 빚을 다 갚을 수 있는것도 아닐테니…’
“새발의 피도 안되는 수준이지... 그래도 그만큼 급박한거야. 저 인간은... 그리고... 오늘 밤에 또 이 사장에게 빚을 지고 포커 하우스를 들를 예정이지.”
윤조는 한주의 말에 조금 흔들리던 마음을 굳게 먹었다.
‘도와줘. 이겨야 돼.’
“좋아. 그 태도. 드디어 너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군. 으하하”
한주는 윤조가 급하게 부탁을 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대국이 시작되었다.
윤조는 분명 꽤 실력이 뛰어난 편이었지만 여전히 중섭을 대적하기엔 역부족이다.
“너 지금 장난하냐? 내 말 듣기로 해놓고 왜 네 마음대로 놓고 있는거야? 중앙에 대마 뺏긴거 안 보이냐? 너 이제 변두리 짜투리 땅이나 모아야 한다고 지금. 너 한 번 더 내 말 안 들으면 나 간다!”
‘아우... 삼촌이 너무 헤깔리게 하니까…’
“그걸 실력차이라고 한다. 이 애송아.”
‘어쩌라고!’
“너의 문제는 네가 최고가 아닌 곳에서도 최고인척을 한다는거야. 그냥 나한테 맡기라고. 미나 죽이기 싫으면…”
“... 죽는다니?? 무슨…?”
윤조는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쏟고야 말았다.
“학생... 바둑 두다 말고 잡념에 싸이면 안되지. 대마는 죽었다고 봐야지. 얼른 다음 수나 두게.”
중섭은 잔뜩 때가 낀 손으로 바둑판이 놓인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봐라. 여기도 나름 리그다.
너희 아빠는 내가 프로기사로 승승장구할 때 참 자랑스러워했지. 그런데 바둑을 예술이라고, 스포츠라고 부르는건 그건 지들 맘이고... 모든 행위나 현상이나... 그 자체로 값어치나 의미를 가지는건 없어. 그런 이미지따위 다 허상이라고. 어차피 프로도 큰 도박판에서 움직이는 경기마일 뿐이고 기원도 하나의 게임장이야. 잔혹한 세상이 축소판으로 들어 있는 곳이야. 배웠으면 써먹어야지.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온갖 추잡하고 어두운 기술이 난무하니까...
원래 마술도 흑마술이 최고인 법.”
중학교에 갓 입학한 윤조를 기원에 처음 데리고 온 날 하중섭이 한 말이었다.
몇 년 만에 다시 마주한 삼촌은 예전보다 더 폐쇄적이고 더 무기력해 보였다. 그의 텅 빈 눈에 그나마 살아 있는 것이라곤 승부에 대한 집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