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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08. 2024

당신은 이별이 두려워 미리 이별한 적 있나요

심사숙고하지 않은 만남 (1)


      그 겨울이 정확하게 1999년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 1999에 아주 민감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대에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어머! 그렇게 안 보이는데..."


혹은


"어머 진짜예요?? 수학 전공에 DB 엔지니어라고요?"


한국 사람들의 편견에 넌더리가 날 지경으로 많이 들었던 말들...

화장 좀 세고, 머리 좀 볼륨 넣고, 힐 좀 신으면 수학과는 거리가 멀고 컴퓨터 한다는 게 생소해 보이는 그런 차림새의 나를 두고 처음 보는 이들이 하는 말이었다.


또는...


"어머, 이과 출신이 책을 많이 읽었네요?"


"하루키를 좋아해요? 의왼데?"


- 좋아한다 한 적 없고 그저 그의 책을 몇 권 읽었노라고 물어보니 대답했을 뿐이었는데...


이과생은 시그마나 벡터만 끼고 사는 줄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겨울은… 유독 춥고, 비가 흔했다가 눈이 잦았다. 

그만큼 마음도 시리고 많이 외로웠다. 


한숨이라도 더 눈 붙이는 게 마스카라 질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프로젝트마다 빠듯한 DB 엔지니어.


그날도 망할 일 없다는 정유 회사의 핵심 부서 경영팀에서 쓸 예산 프로그램을 손보고 있는데 '갑'들이 지나가며 다 한 마디씩 했다.


"곧 연말인데… 남자 친구 없어? 있지? 한참 데이트해야 할 나이인데 붙들어둬서 미안한데?"


라고...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미안하단다.


"미안하면 그 빵빵하다는 후배들 중 하나 집어 소개 좀?"


이라고 하면 다들 슬쩍 발을 뺐다.


“김 대리만 한 규수가 어딨어. 그런데 내 후배놈 들은 보통 현모양처를 찾아서 말야. 알잖아 촌스러운 그런 꼰대들..."


그 경영팀이란 게 참 신기했다. 대충 한국 사회가 그렇다 할지라도, 그렇게나 한 집단이 똘똘 뭉쳐 99퍼센트 서울대 출신이기도 힘들지 않을까? 그중 또 80퍼센트는 경영, 경제. 나머지 출신들은 찌그러지는 희한한 사무실 분위기. 나는 외국계 소프트웨어 컨설팅 업체 파견이므로 또 그들을 관찰하는 입장이다. 40대의 서울대 출신 부장은 시큰둥한 얼굴로 앉아 프로그램은 빨리도 짜는 나를 예뻐했지만 회식 때마다 본심을 드러냈다.


"여자가 그렇게 컴퓨터에 도가 트면 남자가 좀 주눅 드는 것도 있고, 그리고 그리 바쁜 여자를 데리고 사는 건 좀 그렇지. 그리고 우리 김 대리가 또 얼마나 똑소리 나. 아무래도 김 대리는 외국 남자랑 결혼해야겠어."


참 신기하지.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더라도 나는 참 알고 보면 매력적인 배경을 꽤 갖고 있었는데 말이지. 교육자 집안에 적당한 공부머리에 예쁜 건 아니라도 못난 것도 아니고 엔지니어에 나름 이름 있는 여대를 나왔는데… 너무 바쁘고 너무 일에 열심인 여자는 좋은 배우자 감이 아니란다.


내 고등학교 선배가 그랬다.


"생각보다 힘들걸? 그러니까 한 서른몇 까지 둘 다 혼자면 그냥 서로 구제해 주자.”


사실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서로 구제해 주는 사이였으니까. 제일 덜 붐비는 삼겹살 집에서(그때는 조약돌 구이가 유행이었다.) 이놈의 돌 유행은 언제 꺼지는 거냐고 맛을 떠나 돌에 들러붙어 삼겹살 떼기 힘들다고 투덜대던... 그런 사이니까.


그날도 추위에 잔뜩 뿌연 창가 옆에서 밖에 쏟아져 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종로 한 복판에서 데이터들을 잡고 있었다.


야근은 분명 일이 많아 하는 것인데 또 신기하게도 누군가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주면 그리 반가울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뭐 해?"


낯선 사람이 메신저에서 말을 붙여왔다.


외롭지만 헤프진 않다. 누군가 있으면 하지만 그렇다고 쉽지는 않다. 내 모토가 그랬다.


"넌 누구냐."


아직도 기억하는 내 대답.


몇 번 유니텔에서 말을 주고받았던 남자다. 따로 말을 해본 적 없고 항상 모이는 직장인 방에서 봤을 뿐인데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나... 아마 말해도 잘 모를 텐데... 

넌 누구냐는 질문은 항상 어려워. 이름을 말하면 되는지, 하는 일을 말하면 되는지, 혹은 왜 말을 건 것인지만 말하면 되는 건지..."


"나를 어떻게 아는지를 먼저 밝힌 뒤 바라는 걸 말하시오."


"음.. 알게 된 건 유니텔 ‘오백 원만' 방이고 (*매일 밤 내가 열었던 직장인 전용 방) 말을 거는 이유는 오늘 정말 심심해서... 너도 심심하다면 좋겠다고"


"나도 심심해.

그런데 난 심심해도 자유롭진 않은 몸이라 아마 9시까진 야근."


"그럼 내가 9시에 너 있는 데로 데리러 갈게"


"그러면 내가 있는 건물 경비 아저씨한테 신분증 맡기고 방문증 받아서 9시에 안으로 들어와 있어."


그때는 그렇게 인터넷으로 사이코가 많은 시절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 내가 한 방비책이었다.


"그래, 그럼... 내가 그 시간에 일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천천히 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날이 많이 추웠고, 마음도 추웠고, 누군가와 따끈한 정종 한 잔 하면 좋겠다 생각했고 그 누군가가 어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8시 반에 갑자기 '갑' 부장이 술 마시다 뛰어 들어와 내일 상무 보고용 프로그램 한 번만 더 보자며 술 마시니 더 샘솟는 애사심을 뽐내러 들어왔고 술 취한 인간에게 반복 학습시키느라 지체하다 내려간 시간이 9시 반.



겨울비가 추적추적 청승맞게 내리고 있었다.



분명히 아까까지 외로웠는데 갑 부장이 와서 진을 빼놓고 가니까 만나기로 했던 남정네는 잊은 지 오래고 그냥 집에 가서 좀 뻗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멈췄는데 문이 열리니… 분명 처음 보는데 나를 아는 것만 같은 한 남자가 뭐가 그리 좋은지 커다랗게 웃으며 서 있었다...


인간이 혼자 갖는 비밀스러운 감정은 크게 ‘~욕'과 ‘~ㅁ'이 있다고  혼자 정의 내리고 살고 있다. 식욕, 배설욕, 성욕.... 따위의 본능과 관련된, 내가 많이 좌지우지할 수 없는 ‘~욕’들 말고 ‘~ㅁ’으로 표현한 감정들은 그것들을 한꺼번에 만났을 때 과연 나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는 분명히 외로움, 심심함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주정뱅이 갑부장의 등장과 퇴장, 고 한 시간 사이에 어느새 귀찮음, 짜증 남, 무기력함, 마구 쉬고 싶음… 등등이 온통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30분이나 늦었으니 제발 남자가 그냥 계속 혼자 심심하기로 결정하고 사라진 후였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22층부터 1층까지 거칠 것 없다는 듯 초고속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랬다. 또한 뻔한 진리란 꽤나 늦었는데도 가진 미덕이 끈기라 계속 기다리고 있는 남자라면 이렇게나 늦는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라며 자존심 생각해 떠난 남자보다 더 별 볼일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남자가 없기를 바랐다.


내가 유니텔에서 거의 매일 밤마다 열었던 ‘오백 원만'이라는 방제의 방은 꽤 유명했다.


 채팅방 정원이 열 명 제한이던 시절, 밤 열 시쯤 개설되던 내 방은 폐방까지 끊임없이 유령(*방에 참여는 하고 있으나 활동 없이 눈팅만 하는 자) 하나 쫓아내고 자기를 넣어달라는 읍소의 쪽지로 쪽지함이 터져나가곤 했다.


 내 방의 룰은 그랬다. 직장인, 그것도 야근 밥먹듯이 하는 불쌍한 직장인들, 야근비 만 원 나오는데 밥 오천 원 짜리 사 먹고 택시 타면 적자인 인생들, 열받아 맥주 한 잔 할라니까 오백 원만 도와주세요...라고 했던 첫 방 컨셉이 인기를 타면서 고정 방이 되었다.(진짜 계좌 트고 돈 받고 했던 것 아님) 고정 멤버만도 수십 명이 되면서 그 고정멤버들끼리도 방에 들어오려고 싸우는 와중에 이 ‘wkdeoaks’이라는 아이디는 항상 채팅방에 껴 있었지만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내 방 안의 또 다른 룰은 현실의 본인 정보를 알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만이라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리고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하루 종일 우리를 미치게 답답하게 했던 그 편견과 

선입견들로부터...
 

작고 동그란 어항 속 금붕어가 밤마다 꾸는 바다쯤 되었다. 

그 채팅방은...


얼굴도 직업도 나이도 키도 모르는 성별만 어찌 알게 된 남녀가 밤마다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이 될 때까지 깔깔대며 채팅을 하던 밤이 무수했다. 현실에서 만난 적 없어도 그렇게 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마 남자를 만나는데 많이 꺼려지진 않았는지도 모른다.


 룰을 모르는 이들이 들어와 호구조사를 하거나 직업을 묻거나 하면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사정을 아는 이들끼리는 재미나 죽곤 하는 유치한 밤을 같이 보낸 사이니까.


 남자를 만나기 전 날 밤 채팅방에서 내 직업은 파트타임 어부였다. 처음 보는 이가 놀래면 어부가 채팅을 안 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라고 했고, 나이를 물어 환갑 지났다고 했을 때 그 나이에 채팅을 할 수 있냐고 묻는 젊은이의 오만함을 꾸짖는 것이 스트레스에 미친 듯 찌든 나의 한가닥 재미였다. 정체가 아메바라고, 아메바가 채팅을 못할 거란 편견을 버리라고 도 지나친 소리 했을 때는 기존 멤버들이 방장을 쫓을 때가 되었다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어쨌건,
 그 아이디를 본 것은 일 년도 넘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언젠가 잠실이 주무대라고 했었으니 적어도 서울 안에 사는 어떤 남자라는 정도...


 


문이 열렸다.

분명 설레긴 했다. 사람이 기대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만이 설렘은 아니다. 때로 사람은 여러 가지 다른 잡감정으로도 충분히 설렌다.


일단은 오라고 했으나, 진짜 왔을까? 

혹은 안 왔으면 좋겠다던가 지금 내가 심히 피곤하고 짜증 난 중이니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던가… 그런 여러 가지로 어쨌건 설레었다.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준비한 듯 웃고 있었다.

솔직히 예쁜 인상은 아니다.

가무잡잡하고, 혼혈인가 싶게 좀 색다른 외모에 중키 정도... 하지만 전형적인 헬스장 + 수영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다부진 몸매의 남자가 넥타이는 생략한 슈트 차림에 브랜드는 모르겠지만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모카상을 신고 계산한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건방진 자세로 8개 엘리베이터 문 중앙에 서 있다가 문이 열리는 쪽으로 돌아서며 웃었다...

나를 향해...

웃었다.
 생판 처음 보는 남자가.

그런데 설렜다.

추웠으니까… 심심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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