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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17. 2024

아파야 할 만큼 시작은 달콤하다.

(1)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랬다. 그 사이에 우리는 정확히 서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여전히 모른 채로 백김치를 둘 다 좋아한다는 것과 압구정 버드나무집은 삼겹살도 맛있고 얼음컵 레몬소주도 적당히 마음에 드는 산도라는 것에 동의했고 남자가 잠실에 사는 것과 여자가 신촌에 산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당구 구력은 500이라는 것과 여자는 200이라는 것도 알았다. 보스에서 부대낀 애들은 새벽 두 시에 하이얏트 제이제이에서도 마주치곤 한다는 것과 하얏트 제이제이엔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춤을 멋들어지게 추는 ‘쏭그리’가 자주 출몰한다는 것이라던지 우동 집은 역시 동부이촌동이 진리이고 야식집 또한 그러하다던가 마포 경찰청 근처에 돼지갈빗집은 최고이고 여의도에 가면 한양증권 지하의 순두부를 꼭 먹어야 된다는 데에 중지를 모았다. 어지간한 강남 단골집도 겹치는 데가 대부분인데 이제껏 마주친 적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라며 별것 아닌 것에 깔깔대기 시작했다.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갑자기 친해지게도, 멀어지게도 하니까… 조각 같은 남자와 밥을 먹었는데 이 남자가 쩝쩝대는 바람에 내 소중한 환상을 고이 깨고 슬펐던 적도 있었지만 이 남자와는 같이 국수를 먹었더니 확실히 친해졌다. 남자는 적당히 복스럽지만 지저분하지 않게 먹었고 누가 봐도 어린 시절을 잘 보낸 티가 났다. 난이도 상쯤 되는 뜨거운 국물 먹기에서도 그는 깔끔했다. 소리 내지 않고, 흘리지 않고… 최근에 암자에 다녀오면서 제대로 발우 공양을 배운 모양이다. 아직도 사찰 생활에 젖어 있는지 남자가 내 그릇에만 소고기를 산처럼 쌓아두고 쑥갓과 미나리는 죄다 본인 밥그릇에 고봉으로 쌓아놨다. 내가 극락왕생 못하면 다 네 탓이렷다!


가짜 매너를 잘 구사하다가도 음식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는 본 투 비 돼지들을 짧은 생에 많이 구경한 나로서는 식탁 예절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삼겹살 2인분 조촐하게 시키고 본인이 한 일 인분 반 먹은 뒤에 나더러 참 잘 먹는다고 하는 남자를 증오한다. 차라리 내가 살 테니 한 5인분 먹자고 하면 대체 본인을 뭘로 보냐고 손사래를 치는 그 허접한 남자들도 꽤 보았다. (뭘로 보긴, 탐욕스러운 김정일 돼지지.) 이 남자는 참 이런 면에서 고급스럽다. 어머니 만나서 장한 어머니상을 친히 드리고 싶은 그런 심정… 샤부샤부도 두 사람 왔는데, 것도 야식인데 넉넉히 3인분에 사리도 소고기로만 추가한 데다 누가 먹는다고 참, 이 시간에 만두에다가… 


만 스물네 살은 대부분 가난한 나이다. 가난한 나이에는 조금만 여유로운 사람을 보아도 쉽게 끌리는 법이다. 쉽게들 말한다. 외적인 것을 보지 말고 내면을 보라고… 그런데… 솔직히 말해볼까? 내면만 보면 세상에 나쁜 놈도 참 많지만 착한 놈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알고 보면 착한 놈이 참 많음. 그것도 어지간히 웬만한 그룹 안에 있을 때는 더 안전하게 그런 편이지… 그러면 그 다 같이 착한 놈 중에 누구를 골라야 하는지? 결론은 매력적인 놈. 매력적인 놈은 주로 내가 안 가진 걸 가진 놈. 평범한 집안의 장녀로 빚 지고 사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지도 않은 월급쟁이인 20대 미혼녀에게 매력적인 남자는 돈 많은 남자이기가 쉽지.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진짜 사람의 내면을 보려면 내가 쉽게 혹할 수 있는 그 가짜 매력들을 내가 다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 때문에 아쉽지 않을 정도의 여유만 있어도 남자의 경제력에 좌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잠깐만… 옆길로 빠지면… 나는 사실 의사가 되고 싶었었다. 손재주가 참 좋은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 내 꿈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리고 나는 여드름을 아프지 않게 잘 짜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공부도 좀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언젠가는 솜씨가 좋은 외과의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체력장을 준비할 때 기술로는 빵점이어도 오기로 하는 것들은 만점을 받았듯 비실비실해도 의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꽤나 잘해 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잘하지도 못하는 수학을 하게 되었고, 조금만 하다 재수하려 했는데… 그놈의 과외가 하도 많이 들어와서 일찌감치 돈 버는데 눈을 떠 버렸다. 어차피 의사도 돈 벌려고 하는 건데… 하면서 나는 쉽게 내 꿈을 잊었다. 그렇게 살다가 알게 된다. 나는 참 잘 가르치긴 하지만 선생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모든 학생을 평등하게 대할 자신이 없다는 것을. 그럴 그릇도 안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선생이 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교육계에서 나는 꽤 지명도가 있다. 적당히 좋은 여대 전공 출신에 스카이 합격률 등으로 평판이 꽤 괜찮은 나는 일주일 내내 야근하고 일요일에는 구기동이나 한남동에서 기사가 와 모셔가는 과외를 하곤 했기에 촌구석 출신이라도 나름 남자의 경제력에 많이 좌우되지 않는 자유는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 남자의 작은 넉넉함은 그렇지 못한 인간들도 많이 본 나에게 신선하다. 


참… 나는 남자 친구를 구하러 나온 게 아닌데… 어쨌든 미혼에 피 끓는 청춘이 아무리 심심해서 시간 때우러 만난다 핑계를 대도 이성을 만난다는 것에는 깔끔하지 못한 어떤 욕심이 끼었다는 것을 이제 와 돌이켜보니 부정할 수 없겠다.


“마지막으로 한 연애는?”


“제대로 한 걸 묻는다면… 한 2년?”


“2년 전엔 맨날 야근 안 했는갑지?”


“몰라 2년 더 되었나… 오래됐어.”


“왜 못했냐 하면 야근하느라 못했다 하겠네?”


“아 진짜… 엄청 본인 얘기하고 싶은가 보네. 마지막 연애 언젠데! 옛다. 내 물어봐준다. 함 찌끄리보소.”


첫 만남에서 본인이 매력 없지 않음을 어필하고자 하수들 중 하수들은 이 어이없는 방법을 쓴다. 지나간 연애 이야기… 나도 여자 친구 있었다 이거야…


“나? 나는 음… 29년”


“뭔 소리야. 웃기지도 않고 의미도 없고 그런 소리 왜 해.”


“진짜야. 연애해 본 적 없는 거 같아.”


“막 그냥 한 번씩만 만나고 다니나?”


“뭐 별로 그럴 시간도 없었고…”


“…. 이보세요… 아저씨. 대만 씨. 당신 기상시간 금일 오후 열네 시란 말입니다. 지금 말 같은 소리를 좀 하세요.”


    “그건 얼마 안 되었어. 그렇게 된 지…”


“그래요? 그렇다 치고. 뭐 하면 그리 바빠서 29년 동안 연애를 한 번도 못한대요?”


“나?… 공부하느라고.”


“… 아… 눼 눼….”


남자는 여전히 당당했다. 정말 당연한 대답을 했다는 표정을 하고 심혈을 기울여 두 번째 죽그릇을 떠다 준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살다가 학창 시절이나 공부 이야기가 나오면 희한하게도 무용담 늘어놓듯 얼마나 본인이 공부에 관심이 없었는지 그리하여 자랑스럽게도 꼴찌를 일삼았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꽤 보았다. 본인은 너무도 쿨하여 천편일률적인 학교 공부를 등한시한 양… 학생이던 시절 공부라는 본분을 다 하지 않은 것은 분명 직무유기요, 루저로써 숨기고 싶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돈이라도 좀 있는 경우는 더하다. 난 공부 안 했어도 이렇게나 잘 산다… 그것이 아마 자랑의 포인트겠지. 하지만 이것보다 더 생각해보면 이상한 경우란, 공부를 진짜 잘했던 사람이 어쩌다 솔직하게 자기는 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그리하여 공부를 매우 잘했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이… 드러내든 아니든 ‘재수 없다’이다. 아니 왜?? 그건 재수 없다가 아니라 그 순간 갖는 나의 자격지심을 가리기 위한 유치한 변명이다. 나보다 더 공부 열심히 했으니 더 잘했겠지. 나는 그리 쓰지 않았던 시간을 이 사람은 잘 썼구나. 대단하다. 이렇게 존경해주고 그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한 사람들이 대부분 더 편리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래서 나는 공부만 하느라 연애는 못했다는 남자를 인정해주기로 했다. 세상에 여자 꽁무니를 5살 때부터 쫓아다니다 다니다 다니다.... 계속 다니다… 서른이 넘어서도 하는 일 없이 온통 관심사가 예쁜 여자 다리인 남자가 널린 만큼 어쩌다 이렇게 공부하느라 여자 못 만난 남자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사람을 안 믿는 것도, 믿는 것도 내 자유지만 나는 이왕이면 사람들을 믿는 편을 택한다. 다른 사람을 향한 무매너 중 최고는 무조건 불신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오늘 내 배를 터지게 해서 죽일 작정인가 보다. 알고 보면 신종 시리얼 킬러인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모토를 가진 미신 쟁이 시리얼 킬러? 여자 막 먹여서 배 터지게 해서 죽이는??


29년 동안 단 한 번도 연애를 못 해 보셨다는 희귀남과 배가 찢어지게 야식을 먹고 나오니 진눈깨비기 거의 그쳤다. 비가 올 때부터 싸늘한 것이 지저분한 진눈깨비로 변신할 줄 알았다. 진눈깨비가 그친 길바닥이 가장 더럽다. 마구 질척거리는 바닥은 어두운데 잘못 디디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니까.


조심해야지 생각하는데 꼭 유치하게 계획한 것처럼 균형을 잃는다. 당연히 장 대만 씨가 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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