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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19. 2024

아파야 할 만큼 시작은 달콤하다.

(2)

<그림 : Nanette di Crollalanza - 샤부샤부가 끓을 때 이미 사랑은 시작되었다...>


“왜 이러세요. 김 대리. 이런 연약한 척은 마지막에 죽이라도 안 먹고 했어야지요.”


이 남자는 아까 한우리 아줌마가 나를 김 대리라고 부른 이후로 내내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들을 때마다 우리 회사 이 과장이 부르는 거랑 톤이 비슷해서 상당히 불쾌하다. 분명히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 남자가 적당히 중키라 잡아준다고 잡아준 데가 어깨가 아니라 허리다.


“원래 사람들이 이렇게 배가 부르면 자연스럽게 편하려고 허리를 풀게 되거든? 그러면서 내장 자체가 커져. 그 사이즈가 커지면 다시 잘 안 줄거든. 그러니까 많이 먹었을 땐 불편해도 견뎌야 그나마 뺄 희망이라도 있는 거야.”


흠… 이 선생님… 혹시 다이어트 생식 선생님?


“이거 보세요. 29년간 혼자이신 장 대만 씨. 내사 마 제일 싫어하는 류가 쑥맥입니더. 일 없어예.”


내 똥배를 처음 보는 남자가 불상사에 의해 감지했다는 것을 얼른 잊고 싶다. 남자에게 어떻게든 내가 너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천명해야겠다.


“아 또 막상 그리 말씸하시니 마 섭섭합니데이. 나는 특히 이 ‘~데이’ 이 어미가 그리 좋더라.”


“또 또!!”


마침 택시가 섰다. 재미있었지만 나는 직장인이다. 백수가 아니다. 내일 아침에 어김없이 또 저 기름회사 고층 창가에 앉아 있어야 한다. 알고 있다. 내일은 토요일이고 좋은 회사들은 내일 회사를 안 가기도 한다더라… 하지만… 나는 한국의 기름 유통을 좌지우지하는 중차대한 프로젝트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맡은 외국계 기업의 대표 엔지니어로써… 아 다 되었고… 한 마디로 그 대단한 대한민국 굴지의 기름 회사의 한 해 예산 프로그램을 나 홀로! 진짜로 나 혼자 책임지는 프로젝트 리더 겸 매니저 겸 뭐시기기 때문에 내일도 나가야 한다. 갑 아저씨가 나오라고 했으므로…


이제 가야겠다고 말하려는데 남자가 택시 문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 잡고는 재빨리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밤에 수고하십니다. 신촌으로 가주세요. 얼른 타. 너의 그 짐승이랑 같이… 데려다줄게.”


“안 데려다줘도 되는데?”


“아 빨리 타. 너 오백 원도 없는 앤데 택시비 감당이 되겠어?”


“… 그럼… 택시비만 줘도 되잖아.”


설마 택시를 같이 타고 데려다 줄 줄은 몰라서 당황스럽다. 당황스러우면 경상도 여자는 좀 더 까칠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 강남에서 신촌까지 한 번도 택시로 가 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궁금해서… 다음번엔 얼마를 쥐어 보내야 하나 보려고… 내가 넉넉하긴 해도 헤픈 사람은 아니거든. 나름 알뜰해.”


“거 참, 아까부터 다음은 없대니까 말 참 많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자정이 넘은 시간에 혼자 택시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기분이 나았다. 대우받는 느낌은 호감을 가지는 것의 기본이 된다.


“거 뭐랄까, 너의 그 가짜 짐승이… 밤이기도 하고 하니까 말야. 괜히 진짜 같이 보이면서 너무 부티가 난다고나 할까? 괜히 심심한 나랑 잘 놀아주고 불상사가 있으면 안 되잖아. 너는 인기 있는 방장이니까… 보호해야지.”


남자는 정말 친절한 미소를 띠고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이 남자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궁금해졌다. 이 남자, 내게 사심이 없는 건가…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 남자가 내게 두 번째 죽을 떠줄 때부터 이상하게 설레기 시작했었다. 택시 안에 냉큼 앉았길래 옳다구나, 너도 내가 마음에 드는구나… 했는데… 밥을 깔끔히 먹는 매너를 갖춘 것처럼 ‘잘 배운 티로 데려다주는 거’라 한다. 섭섭하다.


참 희한하지.

사람 마음이 요물이지… 아까 이 남자가 남산터널 안에서 막히는 와중에 사투리 열정 불태울 때는 일각이 만년 같더니만 시방 안 막히는 영동대교를 제트기처럼 슝 나는 택시가 참 원망스러운 건 뭘까. 


“점심 먹기 전까지 커피 다섯 잔? 두 잔으로 줄여봐. 내일부터. 피부가 달라질걸.”


오가는 말이 없어도 배가 하도 불러서인지 남자가 만만해서인지 불편하지 않았는데 불쑥 남자가 한 말이었다.


“막 넘겨짚고 그런다이? 대만 씨 아무리 봐도 생식 선생인데…”


“적어도 대여섯 잔을 점심 전에 마실걸? 아침은 당연히 안 먹고… 그러다가 점심 구내식당에서 먹고, 저녁은 술이랑 먹고 폭식. 그러니까 딴 데 다 간디 같이 말랐는데 배만 나왔지.”


생식 대만 씨는 분명 프리랜서다. 이 인간… 절대 대기업 생활을 알지 못한다. 아침에 눈곱 떼고 출근하기 바쁜데 뭔 밥? 그리고 당신… 남자 한 열명이랑 구내식당에서 점심 먹어봤나? 그들은 밥을 마셔… 대한민국 군대에선 밥을 얼마나 빨리 먹나를 먼저 가르치나 봐. 그들이 밥이고 국이고 쓸어서 3분 만에 마시는 어마어마한 쇼를 보여준 뒤 각 잡고 앉아서 괜찮다고… 김 대리는 천천히 먹으라고… 가만히 나 먹는 것만 보고 있음 군대 안 갔다 와도 절로 막 들이마시게 되거든? 그리고 다시 한번, 당신은 대한민국 직장생활을 모른다.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고 아주 성스러운 의식이며 아저씨들에겐 하루를 견디는 원동력이야. 그들의 축제에 내가 빠지면 그들은 엄청 기분 상해해… 나는 어린 을 아가씨. 아… 생각하다 보니 나의 배만 나온 간디 몸매는 이대로 영구 고정인가…라는 절망스러움이…


어쨌건 충격이다…. 나의 가짜 곰이 내 배를 잘 사수하지 못했다니… 한우리에서도 내내 앞치마 따로 달래서 잘 덮고 있었는데… 내 배 쪽으로 보지도 않더니만… 귀신같은 놈이다. 보지 않고도 똥배를 감지하는 더듬이를 가진 저 자는 생식계의 대부, 마에스트로인가…


“배에 근육이 없어서 그래. 좀만 먹어도 튀어나오고 안 먹음 꺼지고 그럴걸? 그런 건 윗몸일으키기만 한 천 개 하루에 해도 다 해결돼.”


것 봐라.

내 분명 말했지. 다이어트랑 상관있는 놈이라고… 다음 만남에선 분명히 상품 카탈로그 준비할걸.


“하루에 한 천 개? 장난해? 직장인이 어디서 천 개를 해. 화장실에서 드러누워 하리?”


“노노. 그런 건 말야, 남자가 마음은 있는데 시간이 너무 없어서 전화 못했다고 하는 거랑 같은 급이거든. 마음이 있어봐라. 똥 쌀 시간 있는데 전화를 왜 못하냐?”


“후진 이론 빠삭하신 29년간 정조 지킨 장 대만 씨! 그러니까! 어디서 윗몸일으키기를 천 개나 하냐고요!!”


“대한민국 정규 고교과정을 제대로 수료한 이면 다 아는 진리를 모른단 말이오, 낭자? 지성이면 감천이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없으랴. 회의실 같은데 잠시 들어가서 한 일 분 문 잠그고 한번에 오십 번, 수시로 들어가서 하던가 탕비실도 있고, 거기 그 건물에 베란다 옆에 다용도실도 있고, 직원용 헬스장도 있더만 뭔 소리여.”


이 남자… 아무래도 파트타임으로 기름 회사 용역이었나… 모르는 게 없냐… 잠깐… 배관공 아저씨도 선생님이라 부르던가?


오늘 처음 본 남자와 내 은밀한 뱃살의 비밀에 대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신촌 한복판 센스 넘치는 국산 편의점, 영어지만 영어 같지 않은 천재적인 네이밍에 빛나는 ‘buy the way’ 앞을 지나고 있다.


“여기서 어디로 가유! 날 춥고 어둡구만 낭자 어쩌고 조선시대 놀이여. 하여간 술 취하면 별에 별 사람 다 있지만 사극 파는 또 오늘 처음 보네 허헛.”


저 아저씨 저리 빈정대고 서울남이 나중에 또 팁 2만 원 주면 민망해서 어쩔라고… 우리의 시답잖은 대화에 질린 듯 택시 아저씨가 잔뜩 부은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해 돌아보니 이미 내릴 곳을 지나 금요일 밤 1시에 낮보다 더 붐비는 연대 앞이다.


“여기 세워주시면 돼요. 저 내릴게요.”


최대한 뜸을 들이면서 문을 연다. 남자가 아직 내 핸드폰 번호를 안 물었다. 회사로 온다길래 사무실의 내 내선 번호를 알려줬을 뿐 핸드폰 번호는 아직 미개봉인데 이 남자가 온갖 여시 짓은 다 하더니 정작 애프터도 없고 베이직 중 베이직 전화번호 묻기도 안 한다. 뭐냐… 너…


결국 내렸다. 더 뜸 들이면 웃기니까…

난 초지일관 쿨했고 쿨해야 하는 유니텔 ‘오백 원만’ 방의 방장 마릴린 인어니까… 내 상한 마음만큼 심도 있게 택시 문을 ‘쾅!’하고 닫았다.


남자가 빙글빙글 얄밉도록 해맑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우리… 또 보자! 나 너 또 보려고!”


“뭐래… 전화번호도 모르는 주제에 뭘 또 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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