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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20. 2024

아파야 할 만큼 시작은 달콤하다.

(3)

인정한다.

성급하고 촌스럽고 그리고 다급한 멘트였다는 것을… 그래도 기약할 수 없는 온라인 세상에서 알다 현실에서 만난 이 남자를 오늘 헤어지면 선녀처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국수 같이 말아먹을 때는 몰랐는데 택시 내리니 갑자기… 밀물처럼 들어온다. 나 이 남자 마음에 드나 봐… 뭐 하는 놈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렇지.

그 짧은 순간에 갑자기 울컥 억울하다. 아니 몇 번이나 다시 보자고 헛소리를 이 밤 내내 하더니… 니 아까는 내하고 아구찜 묵자 안 했나. 끝까지 웃긴 놈이네. 세 번 채워서 오빠 소리 듣는다매! 지금 이 엔딩은 무엇이지? 



“아, 맞다!!”


그러면 그렇지, 꽤 꼼꼼해 보이더만 덜렁대는 구석이 있네. 핸드폰 번호 묻는 걸 깜빡한걸 이 친절한 내가 깨우쳐줬네. 갑자기 웃음이 배실배실 나오려 한다. 안도와 만족의 웃음을 보이는데…


“자!”


남자가 미리 준비한 모양 호주머니가 아니라 손에 쥐고 있던 동전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이게.”


“오백 원.

너 오백 원만 방장이잖아. 오늘 너를 진짜로 만났는데 이거 안 주면 안 되잖아. 여기. 받아.”


“지금 이거 줄라고 잠깐. 한 거야?”(이 정도로 말하면 침팬지보다 나은 영장류는 대충 다 알아들을 법하지 않나?)


“어! 꼭 잘 갖고 있어. 다음 만날 때까지. 알았지? 중요하다.”


“아 됐어! 갖고 가!”


“내가 말했지,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건 엄청난 일이라고… 우리 사이는 얼마나 엄청난지 한 번 보자고. 어쨌건 또 보자.”


남자가 내 손에 억지로 오백 원짜리 동전을 꼭 쥐어주자마자 신호등이 바뀌고 택시를 가로막고 있던 술 취한 남자가 갑자기 살고 싶다고 정신을 차렸는지 제까닥 비켜서면서 야밤에 격무로 피곤했던 택시 기사 아저씨가 감정을 오롯이 실어 택시를 급발진시키더니 이내 사라졌다. 저 아저씨는 연대 앞 두 신호등에는 감시카메라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베테랑이다. 빨간 불 두 개를 가볍게 무시하고 분단 조국이 앗아간 본인들의 청춘에 한이 많은 술 취한 복학생 독수리(연대생)들을 잘도 피해 이내 슝… 사라져 갔다… 저기요… 아저씨… 저 그 안에 승객이랑 아직 얘기 안 끝났는뎁쇼…


허무하다.

밀레니엄 쇼크를 대비하여 5차 점검 지원 등의 업무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엄청 삭막하게 바빠질 이 중차대한 시점에 그나마 봄바람 흉내라도 내게 마음 좀 설레 보나 했더니… 이 자식이 첫 판부터 재밌게 생겼다는 둥 요상한 소리만 하더만 결국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나 보다. 오늘 일기장에 쓰고 자야겠다. 잘 배우고 잘 큰 서울 남자 조심. 마음만 니글거리게 해 놓고 그건 매너였다며 오리발 전문. 29년간 혼자 썩은 솔로남 조심. 요상한 필살기로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혼자 퇴장 전문.





나는 간이 작은 토끼라서 욕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 그래서 아무리 아파도, 피곤해도… 일어나고 회사 나가는 시간은 그 누구보다 칸트 같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을 하는데 의욕이 이렇게도 없을 수 없다. 심심하다고 괜히 만나서는 심란해졌다. 결론은 재수 없는 놈. 또 그렇다고 ‘야! 네가 나 좋다며!’라고 말하기엔 많이 부족한 그의 매우 밉살스럽게 순진한 모든 행동. 어쩌면 남자가 29년 동안 연애 한 번 안 했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상해. 분명히 그 시간에 국수 샤부샤부는 먹고 싶고 혼자 먹으러 가긴 민망해서 급하게 나를 만났을 뿐인 거야.’


따져보니 기분 나쁠 수도 없다는 게 더 기분 나쁘다. 이럴 땐 매우 빨리 기억을 휴지통에 넣고 영구삭제하는 편이 더 낫다. 뇌 한 켠에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는 휴지통이 있다면 좋겠다.


다시 나의 심심한 생활은 지속되었다. 별 다른 것 없었고, 기름 회사 과장, 부장들이 자꾸만 나를 실험대상으로 시도하는 이상한 개그를 평가해야 했고, 나는 그 팀 일원도 아니고 시스템 구축하러 나온 외부 직원인데도 그들의 매일 같이 이루어지는 로마 네로 황제의 파티 같은 회식에 앉아 있어야 했다. 또 곁가지를 좀 치자면, 프로젝트 파견인으로써 그 본회사 회식을 참여해 보면 이 회사가 잘 나가는 회사인지, 오너의 쪼잔함 레벨은 어느 정도인지가 바로 계산 나온다. 굴지의 S사 같은 경우는 수뇌부 외 몸통이나 팔다리 부서 회식은 삼겹살이 최고봉임. 그런데 이 기름집은 진짜로 돈이 남아 돌아서 회식 기본이 차돌이고 기분 나면 고 옆에 남산 올라가서 하얏트 중식당 코스를 수십 명이 먹는 그런 호탕함을 선보여 오너의 쪼잔 레벨이 바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하여 은근 회식이 기대스러운 그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보통 나는 모나리자의 썩은 미소를 입에 머금고 앉아 있다가(희한하게 같은 부서원인 경리는 회식에 잘 참석을 안 하는데 외부직원인 나만 꼭 필수임) 누군가가 끊임없이 시도하는 썩은 개그에 가끔 빛나는 기지를 조금 발휘하여 아저씨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고, 항시 마지막 코스인 단란주점에서는 반항적인 디제이 디오씨의 각설이 랩으로 그들의 팬심을 사로잡았고 누군가가 칠갑산 따위로 분위기를 깰라치면 적절하게 바로 리모컨질로 분위기 질서를 바로 잡는데 앞장서 특히나 기름회사 상무의 총애를 받는 명실공히 회식의 꽃, 회식의 엑기스, 회식의 다시다 역할을 다 한 뒤, 내가 황금 레시피로 딱 말아준 폭탄주에 세상 호탕해진 기름집 상무님께서 예산 프로젝트에다가 분석 시스템을 더 오더 하시는 은총을 내리사 본사에서 포상금을 받는 등 회식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김길동으로도 대활약했었다. 그러니 그야말로 업무의 연장, 제2의 마라톤 회의, 회식을 마치고는 영혼이 완전히 포맷된 좀비 상태로 집에 오곤 했는데 그 주 회식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더욱 남달랐다. 그 팀은 전체가 다 모이면 80명이 넘었고, 그 80명 중 말했듯 90퍼센트가 우리나라 최고 대학 출신들이다. 술 한두 잔 돌면 과장님, 대리님, 호칭이 사라지고 선배, 형! 야! 가 난무하는 회식장. 대체 이대 출신인 나를 꼭 왜 초대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장이 갑이 원하면 그것도 업무라고 했었으므로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그 전체 회식이 제일 고난도였는데 심하면 3시에 마치곤 했고 다음날 아침 사무실은 각자의 핑계로 사막 같이 텅 비곤했다. 늦게 나올 자유도 없는 을인 나는 갑의 부재로 반나절을 지루하게 보내다가 11시 반쯤 나타난 갑들과 그날 점심 메뉴는 반박 불가 대구탕. 스뎅 그릇에 얼굴 씻어도 될 만큼 많이 나오는 그 대구탕을 한 사발 마셔야 좀비 갑들이 오후부터는 일이란 것을 하게 되는 바로 그 전체 부서 회식 다음 날. 그런데 이번 전체 회식은 반가웠다. 원래 예쁘고 안 예쁘고를 떠나 희소성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그 80명 넘는 아저씨들 사이에 파견 시스템 엔지니어 20대 대리는 인기가 꽤 좋았다. 꽃등심은 나를 위해 존재하고, 다른 사람들은 소주 마셔도 나는 매실주다. 살짝 자리를 옮겨가며 은밀하게 신기한 호구조사를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대리님, 이종사촌 동생 있어요?… 오, 있어요? … 몇 살인데? 아… 14살… 아니에요… 아니에요… 쓰잘데기없네요…”


“과장님, 이종사촌 동생 있어요? 오… 29살?? 뭐 하는데?… 아 왜 여잔거 말 안 해요!! 이 과장님 웃기는 과장님이네.”


“뭐래, 남자냐고 안 물었잖아. 김대리가… 남자 찾는 거여? 나 후배 많은데?”


“아니에요…저 남자 필요 없어요.”


“서 대리님, 서른 쯤 된 사촌동생, 남자 있어요?”




안녕하세요 아젤입니다^^

여러분의 좋아요와 댓글은 좀 더 긴 분량을 부른다는 사실 살짝 알려드려요^^


그리고 더 생생한 20대 을 처녀의 회사생활을 듣고 싶으시다면 제 팟캐스트를 구독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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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Enp1dZfLG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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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odcasts.apple.com/us/podcast/deep-and-real-life-story-of-hazelle/id172907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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