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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26. 2024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호기심…

(2)

“노쿠노쿠! 외가가 서울 토박이인 세련된 서울러 한 대리님?”


“흥! 왜! 어쩐지 짠내가 난다 했더니 우리 어촌 아가씨 김 대리네?”


이 아저씨는 일찌감치 아줌마화 되었다고 몇 번 말했지. 대체 왜 아직도 샐쭉한 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신경 쓰는 척해야 한다. 본론에 도달하기까지 비굴함은 사회생활 다방면의 필수조건이다.


“참 나, 한 대리님이 딱 봐서 서울 남자, 그중에서도 세련되고 멋진 남자 중의 남자, 상남자 인 걸 누가 모른다고 그래요. 그걸 모르면 진짜 센스 빵점이게? 가끔 보면 의외로 농담 캐치 못하고 그러시더라.”


“아냐, 나도 괜히 그래 본 거. (이 아저씨는 어미를 생략하는 센텐스 자주 구사하는데 이건 내가 알기로 서울도 경상도도 아닌 수원 사투리임. 알고 보면 사투리 수집가인 거? 외가 내력인 거??) 그나저나 전화 왔디?(이건 또 어디 지역?)”


“무슨 전화요?”


알면서도 진짜 희한하게 괜히 한 번 정도는 나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아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해야겠다는 유치한 발상이 든다. 나는 꽃다운 나이고, 싱글이고, 충분히 좀 유치해도 되는 상태니까.


“내 사촌! 당신이랑 국수 말아먹은 그 사람이요. 내가 아까 전화번호 받자마자 화장실 간 김에 문자 보냈는데? 답장도 왔는데?

고맙다고??”


“안 왔는데? 난 또 깜빡하고 있었네… 뭐 바쁜가 보죠.”


“왜 안 했지? 얼마나 심심하면 나더러 아까 슬램덩크에 백 호열이 어떤 새끼길래 정 대만보다 인기냐고 묻던데? 아니… 어느 또라이가 슬램덩크를 보면서 강 백호, 서 태웅, 채 치수 제끼고… 그래… 정 대만까지는 그렇다 치자. 백 호열은 뭐니? 그런 농구하지도 않는 주변인 좋다고 하는 인간이 있으면 그건 또라이 아니니?(흥분할 때 어미를 무조건 ~니?로 마무리하는 걸로 보아 서울 사람 맞긴 한갑네. 그나저나 그 또라이가 낸데…)”


“아니 대리님이 앙케트 조사라도 해봤어요? 백 호열이 장 대만보다 인기 없다고 누가 그래욧!”


“…. 요거 봐라… 김대리야… 니 방금 장 대만이라고 했다이. 내 이 뚫린 귓구녕으로 똑똑히 들었데이… 윽수로 수상하다이…”


“아니거든요? 그냥 그분 이름이 정 대만이랑 비슷해서 헛소리로…”


“노노. 내가 교양으로 사회심리학을 에이 뿔라스를 받은 자 아니가. 니 지금 너으 그 깊디깊은 잠재의식 중, 무의식 중! 이노마가 들어가 있구마 뭐. 우리 김대리 애간장 그만 타구로 내가 전화 퍼뜩 너으까? 어여 전화라도 한 번 때리라고?”


“아니거든요!”


아니라고 강조하며 화를 내는 것은 참으로 하수 중 하수의 행동거지이지만 역시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배우는 천직으로 하늘이 내린 이가 해야 한다.


괜히 머리카락을 세게 흔들어 한쪽으로 정리하면서 최대한 도도하게 돌아 자리로 돌아오려는데(뭐 어차피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므로… 그자가 나의 핸드폰 번호를 입수했는지가 궁금했고, 현재까지 상태로는 매우 괘씸하다. 번호 받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감감무소식? 정성이 매우 부족하고, 첫날 재까닥 번호 안 물은 것도 새삼 빈정 상하고… 만나기도 전에 사무실 사람 반은 다 아는 것 같아 화나고… 그렇다.) 뒤통수에 대고 한 대리가 또 쓸데없는 한가닥 희망을 날린다.


“근데 아마 오늘 안 할 수도 있겠네. 내가 오늘 우리 TF 회식이라 전화해 봤자 김 대리 못 만날 거라 그랬거든.”


알고도 전화 없다는 것에 심히 분노했던 것이 혼자 부끄럽게 금세도 가라앉는다. 그래, 29년 동안 혼자였던 데는 당연히 마땅한 연유가 있게 마련인데 말이다. 어쩌면 놈의 계산은 내일 황금 토요일에 만나겠다는 것이렷다. 오늘 밤에는 수면 전에 필히 피부 관리에 힘써야겠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국수 뒤 죽을 과감히 포기하는 배포를 발휘할 테다.


“오늘은 경미 씨도 참석하네? 웬일이야?”


이 기름집 아재들이 썰렁하고 좀 시덥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또 나름 여직원을 엄청 대해주는 젠틀함을 가지고 있다는 숨은 장점이 있어 회식에 참여하기를 싫어하는 나보다도 어린 경리 아가씨는 열외 시켜주는 적도 많았다. 그들은 정말 회식을 업무의 연장으로 생각하기에 시끌벅적한 회식 중 갑자기 내일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다시 한번 다 같이 고찰한다던지, 다음 해 예산 이야기를 한다던지 하는 일은 흔했는데 아무래도 업무와 크게 상관없는 어린 아가씨가 힘들어 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는 이 아가씨와는 좀 다른 처지다. 이 회사의 돈을 받는 또 다른 회사의 일원으로써 해외 나가면 나 하나의 행동이 한국인 전체의 그것으로 평가받기 쉽듯 이 회사에서 나는 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사절단이므로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그래야… 이 회사가 내년에도 나 불러서 maintenance (유지보수) 연장 계약 할거고, 우리 회사 프로그램 새 버전 나오면 유저수(*소프트웨어를 동시 사용하는 사용자수) 대로 또 사줄 것이고… 그래야 나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안 잘리고…


“네. 저 어차피 이제 할 일도 없거든요. 저 남자 친구랑 깨졌어요. 그러면 술 마시는 계절이잖아요. 아하하. 실연의 계절. 기왕 마실 거 내 돈 안 들이면 좋잖아요. 히히.”


이 회사는 정말 대놓고 미모 순으로 경리를 뽑는다고 내 감히 말하겠다. 서울 시내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의 미녀들을 보는 일은 사실 극히 드물다는 것에 많은 이가 동의할 것이다. 특히 여자가 여자를 평가할 때는 더욱 서슬 퍼렇고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법. ‘흥! 코가 예쁘장하긴 하지만 콧볼에 저 저 화이트헤드들 좀 보라지. 곰팡이야 뭐야’ 라던가… 눈이 예쁘긴 하지만 저 비립종은 애석하군’ 등의 처절한 잣대들 말이다. 남자는 덩치 크고 돈 잘 벌면 팔자 눈썹에 희극상이라도 훈남은 일단 깔고 들어가는 평가인데 말이지…. 


그런 단호한 여성평가단의 평범한 일원인 내가 보기에도 이 빌딩의 층층 담당 경리 여성분들은 정말 출중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경미 씨는 단연 돋보인다. 가지런한 치열로 상큼하게 웃을 때는 여자인 나도 반할 지경이다. 허리는 한 23인치나 될까, 개미허리라는 표현은 저 여인을 위해 탄생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그 허리를 돋보이게 할 충분한 크기의 가슴과 엉덩이도 갖추었기 때문이다. 기름 회사 경리분들은 세미 타이트의 무릎 바로 위 길이의 단정한 정장 치마를 기본으로 착용했는데 경미 씨는 바탕이 예쁘면 천편일률적인 사무직 여성용 보세 정장도 장 폴 고띠에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곤 했다. 내가 이 여인과 같은 공기를 들이마신 지 거의 일 년이 되었는데 그 사이 이 여인의 술 마시는 계절은 세 번째 돌아왔다. 오늘 좀 피곤할 예정이다. 나는 되도록 그녀와 매우 멀리멀리 또 멀리 앉을 생각이다… 왜냐고? 서서히 알게 된다. 듣도 보도 못한… 그녀만의 독특한 주사의 세계…


“상무니임!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아! 그럼 가실까요?”


따로 상무 비서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경리라는 직무에는 상냥함이 필수인지 모르겠지만 경미 씨는 상무에게 유독 깍듯했다.


“필기시험 진짜 별로였는데 상무가 붙여서 면접까지 올렸거든. 그리고 다른 애들 진짜 야무졌는데 경미 씨가 제일 야무진 외모로 당첨! 그런 거 아니겠어? 나도 내 동기보다 점수 별로였는데 뽑혔거든. 잘 생겼다는 건 어디나 호감이라는 가산점을 얻으니까 말야.”


“대리님 이제 서울 토박이 해결하고 잘생긴 거 세뇌시키실 건가 봐요? 그건 만만치 않아요. 저에게 주술을 걸거나 최면 걸지 않는 이상 어려워요.”


“나 또 삐진다아? 

그나저나 아직 전화 안 왔지?”


“저 전화 안 기다리거든요?”


“걔가 그렇다니까. 연애를 하고 말고는 다 그 미세하고 섬세한 타이밍인데 말야, 이렇게 김새게 하고 전화 나중에 하면 될 턱이 있어?”

이전 08화 아파야 할 만큼 시작은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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