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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22. 2024

아파야 할 만큼 시작은 달콤하다.

(4)

“이럴래 김 대리? 나 28이야!”



대충 사촌이나 육촌 있다는 인간은 다 인터뷰한 거 같은데 그 외계 혼혈 서울남의 이종사촌 형은 찾지를 못했다. 뻥인가??


또 살짝 옆길로 빠지자면 나는 나름 희귀한 분야의 전문가였는데 대부분 2차원 DB인 RDB기술자인 와중에 나는 MDB(다차원 DB) 엔지니어였다. 희귀하니까 몸값도 비쌌냐고? 1999년, 여자 컴퓨터 쟁이한테 그런 게 어딨음. 한마디로 희귀하니 하루에 사이트를 두 군데 세 군데 들러야 하는 겁나 바쁜 몸이라는 소리. 분명 나는 기름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중인데 일산 신한 센터를 날아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장 대만을 점점 잊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호기심…



역시 만남의 기간은 극복의 기간에 분명 영향을 미친다. 그 정도의 살짝 짜릿한 호감은 쉽게도 바래져 가는 듯했다.


바쁘고 힘들고 피곤해도 솔직히 채팅방은 매일 밤 짧게라도 들어가곤 했지만 그토록 내 방 죽돌이던 장 대만은 안 보였다. 슬쩍 무심한 듯 관심 없는 듯 고정멤버들에게 장 대만을 보았냐고 물었더니 다들 요즘 안 들어온단다. 그중 한 명만 내게 제보를 해 왔다.


<어젠가, 잠깐 방에 들어오자마자 방장 요즘 안 들어오냐고 찾다가 나가더라? 영어랑 너랑 왜 둘이 그러는 거야? 설마 둘이만 만날라고 하는 거? 그러면 안 된다. 만날 거면 다 같이 번개 하는 거다. 

알았지?>



… 이미 만났네…

아무리 읽어도 의미가 없는 그 남자의 아이디는 방에서 ‘영어’로 통했다. 살짝 나를 찾았다니 마음이 또 방정맞아지는가 싶다가 짜게 식어간다. 흥.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한테 쪽지를 남길 수도 있고, 그 이종사촌 형을 통해서 나를 찾으면 될 거 아냐. 진짜 웃긴 놈이네…





“아 진짜!! 대리님!! 그분이 저더러 대체 모르는 사람인데 왜 전화했냐잖아요!!”


3일 동안 혹시나 우리나라 금융계에 큰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밀레니엄 버그 5차 점검하느라 출장 뛰고 왔던 참인데 사무실 들어서는 순간 경영지원팀 경리 경미 씨가 삼복더위에 눈치 없이 담요 주는 주인한테 화내는 고양이 같은 목소리로 따지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경유예산팀의 한 대리가 민망한 듯 얼굴이 토마토처럼 익어서 경미 씨 앞에서 머리를 괜스레 긁으며 멋쩍어하고 있다.


“아 진짜? 모른대? 이 희한한 자식이… 아니 이 자식이 우리 층에 있는 여성분이랑 야밤에 국수를 먹었는데, 그 여자가 자기 쪽지도 수신 거부해 두고 채팅방에도 안 나타난다면서 연락 제발 좀 하라고 해달랬는데… 우리 회사고, 이 층에 여자면… 그리고 그 자식이 그렇게 애타게 찾을 정도면 미인인데, 경미 씨 밖에 더 있어? 게다가 본인이 그 여성분이 경리인 것 같다고 했다고!”


헉… 말 많은 한 대리 레이더에 포착되어서 30분 동안 커피 수다할까 봐 축지법 발동해서 지나가려던 참인데 발바닥에 지뢰 감지한 양 딱 얼어붙게 된다. 생식 선생님이 나를 찾는다고?? 아니 근데… 나는 여자도 아니냐??? 왜 나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야??


나야 나! 이보소, 아재요, 그 미스터리한 여인네가 나란 말이오. 속으로 목청껏 외치고 있지만 겉으로는 그럴 수 없다. 그저 제발 저 수다쟁이 한 대리가 나를 발견하기만을 바라고, 나를 발견해서 제발 바보 도 터지는 소리 ‘아…!’를 외치면서 ‘바로 저기 있네! 국수를 같이 먹은 인어!!’라고 해주면 좋겠다, 마구 바라면서… 그런데 쓸데없는 데에는 센스 백점인 이 아재가 오늘따라 저 미인 경리 아가씨한테 너무 집중하여 나를 그림자로도 인식을 못하고 있네…


“에취! 추운데 있다가 들어왔더니… 한 대리님 잘 지내셨어요?”


어쩔 수 없다. 만고 진리는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고, 배 고픈 자가 라면 끓이고, 수컷 두더지가 봉사임에도 암컷을 찾아 헤매고, 다급한 김 대리가 한 대리를 찾고…


“어머, 김대리님! 이제 복귀하신 거예요? 오는데 너무 고생했겠어요. 오늘 회식 콜? 김 대리님 오면 바다로 갈지 들판으로 갈지 고르라고 했어요. 상무님이. (회 먹을 거냐, 소 먹을 거냐 소리. 이런 게 바로 밀레니엄 시대의 아재들의 개그. 본인이 매우 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자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지금 바로 예약할게요. 금요일이라서 빨리 예약 안 하면 딴 회사들한테 다 뺏겨서…”


그 남자를 만난 지 일주일 된 날이네. 

그 남자를 만난 이후 나의 달력은 대만력으로 변해갔다. 그를 만난 후 하루, 이틀… 그리하여 오늘은 대만력 7일이다.


그나저나 지금 회식이 문제냐. 대체 왜 여자 한 명을 찾는데… 이 층에 여자 딱 두 명인데… 쟤랑 나 둘인데 쟤가 아니래잖아. 근데 왜 나를 그냥 같이 제끼는 거야? 나 좀 봐봐. 나도 여자라고…


“음… 저기 교보 뒤쪽에 국수 샤부샤부집 거긴 어때요? 난 날이 추워서 국수 샤부샤부 같은 거 당기는데…”


갑자기 눈앞의 두 남녀가 동공을 눈이 띠게 확장시키며 나를 쳐다본다. 


“… 김 대리야??”


“어머, 김 대리님이세요??

아, 진짜!! 한 대리님!! 저만 쪽팔리잖아요. 그러게 왜 처음부터 국수 먹었다는 얘기 안 해가지고는… 그분이 그냥 나를 좋아한다면서요! 그래서 전화하게 만들고! 이게 진짜 뭐예요 정말!!”


경미 씨는 정말 단단히 화가 나서 빨개진 볼을 하고는 한 대리의 등짝도 같은 색으로 물들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표명하며 그의 얇디얇은 실크 와이셔츠 등짝을 결재서류로 쳐대면서 포효했다.


“오잉? 김 대리 채팅 이런 것도 해? 난 김 대리 남자한테 완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러면 저기 18층 감사팀에 정 승근 씨는 왜 깠어? 걔가 내 이종사촌동생보다 훨씬! 잘 생기고 키도 큰데?? 승근이 김 대리 땜에 힘들어했다… 거 참 취향 신기하네.”


“제가 한 대리님 이종사촌동생이랑 국수 먹은 건 맞는데요, 그분이랑 사귄다던지 좋아한다던지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 맞다, 딱 한 번 만났댔지? 뭐 그럼 그 자식 혼자 그러는 거네. 좀 희한한 놈이라서 별로 안 권하고 싶거든.”


“그렇더라고요. 권할만하지 않더라고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도 자꾸만 한 대리를 쳐다보게 된다. 평소 자기를 보면 미친 듯 도망가던 내가 안 가고 서성이니 한 대리도 의아한 듯 쳐다보더니 아무래도 대기업 면접을 통과한 자의 눈치라는 것을 좀 꺼내기로 했나 보다.


“아. 그러면 혹시 내가 그 자식한테 김 대리 핸드폰 번호 줘도 돼? 하도 귀찮게 해서 말야… 안 가르쳐주면 업무 중에 나타날 기세라.. 그 자식 요즘 백수거든.”


“네, 그렇다 하시더라고요. 백수한테 얻어먹어서 좀…

 미안하더라고요.”


“백수는 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 세상엔 여러 종류의 백수가 있는 법이야.”


생식 선생님 알고 보면 땅부자집 아들이고 그렇나?


“뭐 그래도 빚졌으니 저도 밥을 한 번 사야 할 듯해요. 전화번호는 뭐 그쪽이 원하면 알려주셔도 돼요. 한 대리님 이종사촌동생인 거 확실하니까 뭐 신원이야 괜찮겠죠.”


“… 그럼 가르쳐 준다? 자꾸 보면 좀 위험한데… 걔가 희한하게 좀 웃기는 재주는 있어서…”


“저 쉽게 안 웃어요. 근데… 그 동생… 뭐 하는 사람이에요?”


“백수라니까?”


“백수 전에는 뭐 했는데?”


“그거 말하지 말라던데?”


이런 치밀한 놈… 가재는 게 편이란 속담은 사촌끼리 뭉친다는 것에서 나온 것인지도… 


“… 별 있으시고 막 이런 거 아니죠?”


“푸하하하. 소시민이야. 그건 안심해도 돼.”


“그럼 전 바쁜 엔지니어니 대만 씨한테 제 핸드폰 번호 알려주세요. “


“오호… 김 대리 의왼데? 원래 핸드폰 번호 물어보면 삐삐 쓴다는 둥, 씨티폰이라는 둥 그러지 않았어?”


“저번에 상무님의 은총에 힘입어 포상금 받아서 손전화기란 거 하나 구했어요.” 


“하여간 모든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니까. 알았어, 내가 알려줄게. 그럼 우리 이렇게 오다가다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가서 커피나 한 잔?”


이것이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는 30대 직장인의 아저씨스러운 또 다른 혼자만 인정하는 위트 내지는 센스로 한 대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나와 마주치면 저 식상한 멘트를 날린 후 층 한켠에 있는 휴게실로 데려가 한참 수다를 떨곤 했는데 어떤 남자들은 수염과 아줌마 호르몬 모두를 가진 욕심쟁이들. 하긴 진짜 아줌마인데 수염 난 분들이랑 같은 건가?


“아, 맞다!!

저 상무님이 임원회의에서 쓰실 시스템 최종 점검해야 해요!! 나중에 봬요 한 대리님!!”


아뿔싸…

저 인간을 잊었었네.

아니… 왜 내가 저 인간을 열외 시켰더라? 그렇다… 이제 고작 32인 한 대리는 2차 단란주점만 가면 열심히 누군가가 홍경민의 '내가 죽일 놈이다 친구야’ 라든가 좀 지났지만 흥으론 최고봉인 박미경 언니의 ‘말로 할 때 똑바로 해라 이 자식아… 내 경고한다이’ 혹은 방정맞은 클론 노래로 모두의 손을 초고속 강강술래 시키는 쾌거를 이룩해 놓으면 쥐오디의 ‘짜장면 아리랑’ 이라던가 독립유공자 자손 돋는 ‘소나무 송’, 가진 건 수명복뿐인 듯 한 조용필의 ‘한오백년 길게 견뎌 벽 똥칠 원츄 송’, 하다 하다 안 부장도 부르면 욕먹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지만 어딨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전설의 산, ‘칠갑산’을 그다지도 목놓아 찾아 쌌길래 만 프로 저 인간은 산골 출신으로 서울대 붙어서 동네 초입에 플래카드 걸렸을 거라고 내가 너무 확신했었다. 


“참… 대리님 서울 사람이에요?”


“몰랐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나 얼굴에 써 있잖아. 세련된 서울 매너남.”


“… 그러게요… 그게 안 쓰여 있어가지고… 나는 칠갑산에서 올라온 줄…”


“… 있지, 김 대리, 내가 아까 말실수했네. 내 이종사촌 잘 만나봐 봐. 내가 볼 때 둘이 비슷하게 이상한 거 같애. 잘 맞겠어. 아주. 내가 어딜 봐서 산골 출신이니? 딱 보면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이잖아.”


“아닌데… 말투에 어딘가 모르게 생소한 사투리의 기운이 있던데…”


“흥! 그건 우리 아버지가 너무 심한 남해분이라 그 영향이거든? 외가는 완전 서울 토박이라고!”


“넵! 적어둘게요. 한 대리님은 외가가 완전 서울 토박이다.”


여러 나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샐쭉한 한 대리를 뒤로 하고  발길을 서두른다. 진짜 내일 상무 발표가 있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정확한 세계가 컴퓨터의 세계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놈의 컴퓨터의 세계만큼 에러 투성이, 반전 난무, 심장 엘리베이터 태우는 서스펜스가 가득한 곳도 없다. 분명 다 점검한 듯해도 갑자기 에러가 나는 일은 너무 흔하니까. 그래서 중요한 발표가 있을 때 사용되는 DSS(의사결정시스템)의 알고리즘 짜고, 설계하고, 다차원 구축해서 보이는 프레젠테이션 화면까지 다 해야 하는 것이 내 일이다. 언젠가 화면 디자이너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일주일치 야근으로 대충 때웠는데 상무가 내 화면이 더 마음에 든다고 쓸데없는 칭찬 한 바람에 내가 디자이너 일까지 맡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한마디로 죄다 내 일이고… 그리하여 나는 일이 겁나게 많다. 분명히 내 사정 상관없이 상무가 내일 아침 술 깨면 대빵 큰 오리발로 ‘내가 언제 그랬어! 그건 알아서 했었어야지!’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꺼낼게 뻔하면서도 오늘 저녁에는 ‘아 대충 해. 내일 에러 나면 뭐 내가 빛나는 기지로 잘 넘기지 뭐. 회식은 절대 빠지면 안 되지.’라고 나를 구슬려 끌고 나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윗사람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똥 싸러 들어갈 때와 나올 때는 사뭇 다르다’이다. 그러니 오늘도 분 초를 다투어야 한다. 미친 듯이 점검을 순서대로 진행하는데 것 봐… 뭔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희한하게 화면중 사각형이 약간 움직인 것도 있고 막 그런다. 세 번 정도 점검을 겨우 마칠 때쯤 시간을 보니 다섯 시. 오늘 회식은 상무가 배가 많이 고파서 좀 일찍 간단다. 그러다가 불현듯… 한 대리가 과연 전화번호를 전달했을까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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