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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15. 2024

심사숙고하지 않은 만남

(4)

남자는 가볍게 웃더니 자연스럽게 국수를 떠서 건네주었다.


“우리 이럴래? 뭐든 물어보는 건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 대신 딱 하나만 거부할 수 있는 걸로. 재밌겠지?”


“별로 안 궁금한데?”


“에이… 그러지 말고 좀 궁금해해 주라…”


남자는 이번에는 진짜 기분이 살짝 상한 듯 보였다. 어쨌건 국수가 맛있다. 국수가 맛있으니까 쉽게 재미도 있는 것 같다.


“까짓 거… 그러던가. 딱 하나만 거부할 수 있는 거지?”


“어. 이름이 굉장히 촌스럽거나 민망하면 그걸 거부해도 돼.”


“이름이 예쁘진 않지만 뭐 그 정도로 극비로 붙일 건 아니고.”


“오케이. 그럼 너부터 물어봐.”


“키”


“오… 이름 나이 이런 거부터 안 물어서 신선하긴 한데… 아픈데 훅 들어오네? 뭐 자랑스러운 키는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창피할 것도 아니니까… 178”


“지금 이거 이거…. 키 질문 이거! 거부하는겁니꽈아?”


“아냐. 제대로 말한 거야.”


“… 이거 거부한 걸로 간주할게.”


“한우리 남자랑 자주 온 거 맞네. 딱 보고 남자 키, 컴퓨터로 맞추네.”


“176이지?”


“눼…”


“똑바로 하자.”


“눼… 너 아까 그 기름 회사에서 일하지?”


“뭐 그런 셈이지.”


“아까 내려오는 층 보니까 전략기획 경영지원 그 뭐야, 상무 있는 그 방에서 내려오던데… 내가 알기론 그 팀에 여자는 경리뿐이거든?”


“그래? 그런가 보지 뭐. 아 나 이거 해야겠다. 하핫. 나는 직업을 가리겠음.”


“뭐 뻔한데 가린데. 딱 나왔네. 그 층 경비 담당하는 거지? 맞네. 연말 가까워 오니까 정산할 거 많아서 맨날 야근하고… 사실 이종사촌 형이 그 층에 있거든. 물어봐야겠다.”


“그러던가.”


“아니 왜 뻔한 거를 미스터리한 거처럼 그럴까? 맞아. 그 층엔 확실히 경리만 여자야.”


“근데 선생님이라던데 진짜로 선생님?? 어떤 선생님? 아무리 봐도 뭘 가르치기엔 조금씩 모자란데… 헬스 선생님을 하기엔 좀 몸이 부실하고… 고등학교 선생님이 휴고보스 수트를 입진 않을 거고… 아! 혹시 입시 선생님?”


“아! 나도 그거 해야겠다. 우리 그럼 둘 다 세 번 만날 때까지 직업 말 안 하는 걸로… 어때?”


“뭘 세 번이나 봐. 말해 주기 싫으면 말던가. 궁금해 미치겠고 그런 건 아니거든.”


“에… 웃기네. 너! 난 네가 경린 거 바로 맞췄는데 내 직업은 안 알려줘서 궁금하잖아.”


“별로.”


“이런 거 해도 되지. 안 물어봐도 내가 말해주고 싶은 거 말해주기.”


“지금까지 계속 그러고 있잖아.”


“나 29. 만으로. 너는?”


“스물넷… 만으로… 높임말 해… 요? 나이가 수월찮게 많으신데….”


“아니. 그럼 나도 높임말 해야 하잖아. 우리 이때까지 시원시원했는데 갑자기 말 높이면 할 말이 하나도 없어질걸? 이 밤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나는 우리 심심해서 만났으니까 헤어질 때까지 재밌을라고…. 너는 어때?”


분명히 교포는 아닌데… 한국 토종이 분명한데 화법이 참 신기할세.


“그래, 그럼. 이름은 뭐야?”


“사실 고민했다. 이름을 거부할까, 직업을 거부할까… 근데 네가 미스테리어스 하게 나오니까 나도 직업은 나중에 알려주려고. 이름이 좀 남달라. 장 대만이라고 해.”


“나 슬램덩크에서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 백 호열인데… 정 대만도 좀 좋아해.”


“그러니 내 이름이 너에게 친근하단 소리지?”


“어. 근데 정이랑 장은 참 느낌이 다르긴 하네. 대만 씨.”


“반말은 상관없는데 오빠라곤 해줄 수 있잖아. 넌 이름이 뭐니?”


“내가 오빠라고 부를 땐 각별한 거야. 대만 씨로 낙찰! 앞으로 그렇게 부를게.”


“한 세 번 만나면 오빠로 승격?”


“만약에 내가 댁을 세 번이나 만난다면 그건 좋아한단 소리니까 그렇게 되겠지만서도 뭐 그닥 그래 보이진 않소만…”


“그럴 수도… 어쨌건 오빠라는 호칭을 무겁게 쓴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에 드네. 난 사실 여자들이 아무한테나 나이 많다고 무조건 오빠, 오빠 하는 거 진짜 싫어하는 편이야.”


남자는 옅게 미소를 띠더니 남은 국물에 밥을 넣어 뭉근하게 끓이는 죽에 공을 쏟고 있었다. 이 순간의 큰 고민이란 배가 찢어지게 불러서 타이트한 스커트 옆선이 터질 것 같은데도 저 죽이란 것이 땡긴다는 중차대한 딜레마 한 가지뿐이다.


“내가 얼마 전에 강원도 어느 암자에 좀 들어갔다 왔거든?”


어딜 댕겨 왔다고? 

휴고보스 빼입고 금요일 오후 두 시에 기상하는 백수가 암자에는 왜? 이 강렬한 의문의 메시지를 두 눈에 가득 담아 남자를 쳐다보는데 그는 꼭 내게 죽을 먹이고야 말겠다는 듯 정성스럽게 국자질을 멈추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종교가 없어. 아 물론, 집안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자마자 믿어야 한다고 정해 놓은 종교는 있지. 내가 스스로 고른 종교가 그래도 하나 있으면 좋을까 싶어서 돌아다녀 보는 중이거든. 성당에서 교리도 들어보고 교회도 나가보고… 살아보면 대체 이런 건 정해져 있었나 싶은 일들을 만나잖아. 그건 어떤 과학도 제대로 설명을 못해주거든. 실마리가 종교에 있을까 싶어 보는 중이라고 할게. 어쨌건 그 암자 스님이 그러더라.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인연이 쌓이고 쌓여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 말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어제 이 시간에도 말을 섞던 사이였지만 아는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밥을 같이 먹잖아. 놀랍지 않아?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해. 오늘 나랑 같이 심심해서 고맙다. 너랑 같이 밥 먹어서 나는 꽤 재밌어졌어.”


돌이켜 보면…

우리는 인연이었을까… 초겨울 서울 강남 한 복판에서 우리는 만나자마자 결혼하면 먹는다는 국수를 먼저 먹고 시작하였으니 분명 보통 인연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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