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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10. 2024

심사숙고하지 않은 만남

(2)


 "우와,
 이렇게 일 시켜 먹고 밥값 포함해서 만원 준다고??

본봉도 그냥 그럴 텐데 이 털은 뭔 돈으로 걸친 거야? 진짜 파트타임 어부야?"
 
 “가짜거든? 그리고 방수돼서 비나 눈 오는 날 딱이거든?"


 스포츠머리보다 좀 긴듯한 머리를 죄다 세운 신기한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가 언제 봤다고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건넸다.


 저기요...
 제가 사실 그 아이디 더블유 어쩌고...

라던가,
 안녕하세요, 혹시 ‘인어’님?

이렇게 나왔더라면 참 김새고 참 어색하고 그리고… 또한 나도 그런 식의 대답을 했을 테지.

그러고 보면 이 남자는 신기하게 세련되었다.


"어차피 이 시간에 할게 술 마시는 거밖에 더 있나 싶어 차는 두고 왔는데, 괜찮지? 택시는 저기 밖에서 깜빡이 켜고 기다리고 있어."


"...
 택시를...
 밖에다가 30분이나 세워뒀다고??"


 "어. 언제 나올지 모르잖아. 전화해도 되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어.
 어차피 할 일이 있다면 내가 전화한다고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리고 처음 보는 사이에 택시 잡기 힘든 종로 한 복판에서 택시 잡느라고 한 이십 분 날리기 싫었고.


 가자."
 
 설마...
 오늘....
 ‘오백 원만’ 방의 방장인 불쌍한 나에게...

택시비 씌우러 나타난 양아치는 아니겠지?

모르는 사이는 오히려 편할 수도…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을 연신 훑어보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같이 택시에 올랐다.


"아저씨, 신사동 사거리 한우리요."


 뭐지?
 이 시간에 샤부샤부 먹자고?



그래도 남자 만나는데 좀 얌전한 눈이 오면 좋으련만 진눈깨비가 몰아치냐… 망토식으로 된 털 자켓을 추켜올려 최대한 비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면서 전진하는데 아무리 봐도 어딘가 모르게 혼혈스러운 남자가(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흑이나 백 쪽은 아님) 은근히 행동도 빠르게 한 발 앞서 나아가 택시 문을 열고 돌아본다. 종아리 부분에 옆으로 슬릿이 들어간 롱스커트에 10센티짜리 앵클부츠를 신고 내 몸뚱이만큼 부한 털 자켓을 업었는데 저 좁은 택시 안 자리로 나를 지금 안내하는 건가. 고민하는 순간 내가 택시 문에 도달할 걸음에 남자가 또 한 번 센스 있는 민첩함을 발휘하여 본인이 뒷자리 안쪽에 자리 잡았다.


“아저씨, 신사동 한우리 좀 가주실까요?”


“센스 있는 듯? 매너 있는 척하려고 택시 문 열어주고 안쪽으로 고생스럽게 여자 밀어 넣는 남자 많은데…”


분명 이미지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은 자잘한 행동이다. 

아저씨에게 상냥하게 행선지를 말한 남자가 내 칭찬에 흘긋 돌아보더니 웃는다. 미소가 아니라 진짜 웃기다는 듯.


“너 지금 곰 하나 지고 있잖아. 그거 메고 안에 들어가려면 고생스러울까 봐 내가 너랑 니 짐승이랑 넉넉하게 앉으라고 양보한 거지. 그나저나… 어디 보자… 아까 그 건물은 기름회사 건물이고, 네가 맨날 토로했던 지긋지긋한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견해를 미루어 볼 때 절대 너는 패션계통에서 일하지 않고, 겁이 없는 듯 한 번도 못 본 남자를 만나기로 하면서도 또한 철저해서 이 회사 로비로 들어오려면 신분증 맡기고 그 신분증 복사 보관되고, 감시카메라 녹화되는 것까지 생각해서 이리로 오라고 한 거지. 어때, 벌써 많이 털린 거 같지?”


처음 본 남자가 꽤나 본인이 예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적극적인데 애쓴다는 생각이 든다. 또는 이 남자는 오래 많이 심심했는지도 모르겠다. 


“… 뭘 어떻다는 거야? 어차피 좀 있다가 샤부샤부 먹으면서 서로에 대해 대충은 다 알게 될 예정 아니었어? 뭐 근데 먼저 나에 대해 썰어보기 시작했으니까 나도 해도 되지? 일단 내가 봤을 때 머리 젤 바른 지 얼마 안 되었네, 집에 하루 종일 심심하게 있다가 진짜 심심해서 막 미치기 직전에 나올 거리 생겨서 그제사 씻은 거 아냐. 대부분이 공사다망한 대한민국 평범한 국민으로서 금요일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군 자라면… 재충전이라던가 사업구상 중이라는 좋은 직업군을 가진 백수 같은데… 그리고… 여자들을 웃기려고 할 때 그 여자의 외모나 차림을 이용하면 절대 안 된다는 기본 중의 기본도 모르는 걸로 보아 하수 중 하수라는 걸 모르는 진짜 하수. 맞지?”


이 남자는 분명히 낯선 남자인데 희한하게 만만하다. 만만하기도 하고 신기하게 편한 것 같기도 하다. 짧은 시간 사이 대체 왜 그런 것인지 생각해보려 하는데 아직 모르겠다. 그다지 잘 생긴 편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남자의 반격을 기다리며 빤히 바라보는데 그는 별 대답 없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딱히 할 말도 없고 남자가 내 공격에 대꾸도 없어 김이 새는데 계속 묘하게 웃으면서 쳐다본다.


“… 뭐 또, 내 곰 이야기하려고?”


“아니, 아직 가늠이 안 가서.”


“뭐가!”


“예쁜 건지, 못생긴 건지… 재밌게 생겼다고 해두자.”


뭐 이런 게 다 있노.


“내가 그런 말에 상처를 받거나 해서 하는 말은 아닌데 말야, 차라리 못생겼다고 해라. 여자한테 재밌게 생겼다가 뭐야! 대체 그건 정의가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 생긴 게 재밌게 생긴 건데.”


아니 만만한 놈이 아주 단시간만에 열 받게 하는 놈이 되어간다. 만난 지 고작 한 15분 되었는데 이 남자가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공격을 하고 있다.


“… 너 같이 생긴 건데.. 근데 너 같이 생긴걸 처음 봐서 어떤 게 재밌게 생겼다고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진짜 예쁘고 어떻게 보면 진짜 별로고… 그런 거?”


“이기 미친나…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라는 니는! 니는 억수로 심각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나!”


“오오!! 인어(채팅방에서의 별명)님 맞네예!! 내 섭섭했는기라. 그리 맨날 밤마다 재미난 사투리로 훌륭한 말씀 많이 해주시더마는 왜 현실세계에서 갑자기 서울어를 하시는지 내 마 많이 당황했는기라. 참말로 반갑데이.”


남자는 누가 들어도 초급 1에 빛나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서울식 경남 사투리를 흉내 내면서 호들갑을 떤다. 좀 전까지 깐족거리며 놀리던 놈이랑 같은 사람인가 싶다. 마치 팬이 스타를 만났을 때의 눈빛을 쏘고 있지 않은가.


“아 뭔데. 진짜 또라이가…”


“꺄악!! 언니, 너무 좋아예! 사투리만 쭈욱 써주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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