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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12. 2024

심사숙고하지 않은 만남

(3)

이 놈… 혹시 서울 놈 중에 경남 여자 말투에 패티쉬가 있어 골라 사귄다는 그 드물기 짝이 없는 경남녀 피버 인가?


“고마해라.”


“싫어예”


“아 진짜 뭐래 정말? 언제 정상적으로 말할 건데?”


내가 지금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고 시답잖은 갑 아저씨들 농담 받이 한 것도 겁나게 피곤한데 이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심심이 하나가 야밤에 나타나서는 새삼 심기를 뒤집는 것을 참아야 하는지 갈등이 생기는 순간이다.


“에이… 어차피 금요일 밤에는 채팅방도 썰렁하잖아. 다들 누군가를 만나러 가니까. 너도 나도 오늘 심심해서 밥이나 같이 먹으려고 만난 거 아냐? 그럼 꼭 심각하지 않아도 되잖아. 나는 누구를 꼬시거나 여자 친구가 필요해서 나온 게 아닌데… 너도 그렇잖아.”


“당연하지. 문제는 네가 지금 하는 말들이 재미가 없다는 거 아니냐, 계속 이렇게 재미없게 나오면 다음부터 방에 발도 못 들이게 한다.”


“그라믄예, 현실세계에서는 우리 서로에 대해서 소개하고 그러는깁니꽈아?”


“… 내 경고하는데, 니 한 번만 더 돼도 안 하는 사투리로 내 고장을 모욕할 시! 내 이 차 돌린다. 바로 집으로 직행한다. 택시비는 니가 낸다.”


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서울 사내는 내가 사투리 비슷한 조만 읊어도 유독 하얀 이를 한 바가지 보이면서 즐거움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사투리로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즐겁게 해 본 적은 또 처음이라 그런가 은근히 살짝 자랑스럽기도 하다.


“… 진지한 소개는 차차 하입시더. 지는예 사실 택시 안에서 개인 프라이버시적인 거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예. 아저씨가 다 듣는다 아입니까. 마 남사시러워서리…”


남자가 갑자기 몸을 홱 숙여 오길래 하마터면 곰을 출동시킬 뻔했는데 기껏 귓속말로 한단 소리가 저랬다.


“남사시럽다는 건 그런데 쓰는 거 아니거든? 쓸라면 좀 알고 쓰던가.”


“아 그래예?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데이. 맞지, 사투리는 거의 끝에 ~데이 가 많이 붙더라? 처음에는 영어인 줄 알았다니까.”


“… 조용히 가자. 내 아까 샤부샤부 얘기할 때는 야밤에 뭔 밥이고 했는데 니가 남산터널부터 시시한 걸로 진을 빼는 바람에 급작스럽게 허기진다.”


진짜 허기도 졌지만 아까부터 꽤 젊은 나이의 택시 아저씨가 어찌나 대체 무슨 관계인가를 파악하고 싶은지 룸미러로 계속 시청 중이시라 그야말로 조금 불편해졌다.


드디어 서울시내에서 꽤 맛있기로 유명한 국숫집 앞에 택시가 섰다. 아까 탈 때 보였던 남자의 매너는 내릴 때 새삼 한 번 더 작게, 그러나 티 나게 반짝였다. 내릴 때 편했다. 뒤 따라 내리는 남자가 기사 아저씨에게 돈을 건네는데 무심코 보니 돈을 한 여덟 번은 접은 것이 뭔가 좀 수상쩍다.


‘… 사투리에 이상하게 환장할 때부터 신기하더니 택시비 속이는 찌질이 아냐?’


내 의심에 힘이라도 실어줄라는 듯 남자가 택시 문을 황급히 닫고 거의 나를 밀다시피 급하게 식당 쪽으로 향하게 하는데 결국 내 의심대로 뒤에서 들려오는 택시 아저씨의 다급한 외침…


“저기요!! 사장님!!(사장님??? 헉… 혹시 내가 이 남자를 너무 어리게 보고 막 반말했는데… 지가 하길래 나도 했는데… 알고 보면 남들이 보기엔 뻔하게 대빵 나이 많은 아저씬가?)”


그 와중에 새삼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는데 피부에 모공도 안 보일 정도로 팽팽한 것이 분명히 노땅은 아니다. 이목구비는 좀 신기해도 거 참 피부미남일세. 그래도 택시 아저씨가 다급히 부르는 이 상황은 파악해야 한다. 


“뭐야, 계산 잘 못 한 거 아냐? 돈 없으면 종로에서 버스를 탔어야지! 아니지, 택시비도 없는데 뭔 한우리여! 어여 아저씨한테 가봐.”


남자는 뒤를 돌아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연신 손을 아저씨 쪽으로 흔들어 댔다. 


“사장님!! 2만 원 더 주셨어요!!”


“아니에요! 잘 드렸습니다. 추운데 안 춥게 잘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택시 아저씨가 분명히 동생뻘인 이 남자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며 다급히 세운 이유는 2만 원 팁을 더 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없어서인지 꼭 돈 잘 못 주셨다고 하시거든. 그래서 일부러 막 접어서 드리는데… 그냥 좋게 받으시면 되는데.”


“… 어디 미국 같은 데서 살다 왔수?”


“어. 좀.”


헐. 그냥 던진 말인데… 나도 그 시대에 택시 팁 주는 한국 남자 처음 봐서… 그런데 맞다네? 낯선 남자에 대해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미국 같은 데서 좀 살아 본 적 있어서 팁 문화에 익숙하단다.


“이 집은 사시사철 항상 사람이 많아. 그치.”


무심코 속으로 생각한 말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머, 언니야는 강남 한복판 맛 집도 자주 와 봤는갑다. 잘 아네?”


택시 아저씨 팁 줘서 살짝 멋있어 보일라 했는데 이 또라이가 다시 아까 그 남산 터널 속의 변태 서울남으로 변신했다.


“뭐 사줄 거야? 나 오백 원만 달라고 하는 불쌍한 앤 거 알지? 여기 비싸서 난 못 사줘.”


“내하고 이 황금 같은 금요일에 놀아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밥값이 대숩니까. 오늘 한우리 국물을 다 잡수셔도 제가 다 감수할께예.”


그 되지도 않는 사투리 당장 집어치우라고 하려는 참인데 마침 아줌마가 주문을 받으러 오셨다. 아는 아줌마다…


“아이고, 웬일이래? 어떻게 이렇게 둘이 왔대? 서울 바닥이 참 좁지 응? 홍홍홍. 세상에… 그런데 둘이 은근 어울린다? 둘 다 엄청 바쁜 사람들 아냐? 아가씨 저기 저번에 어디지? 종로에 있다 했나? 새 프로젝트라고 회식 왔었잖아. 선생님도 한동안 뜸하시더니 오셨네? 잘 지내셨죠?”


“이 아가씨 좋은 남자분들이랑 많이 오셨나 봐요?”


“에이, 뭐 그런 걸 물어. 여자 과거 캐고 그러면 큰 인물 못돼.”


이 아줌마는 이미 우리를 엮어서 보고 있다. 뭐 굳이 오늘 본 사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좀 귀찮다. 그리고 저 남자는… 아직까지 종을 못 잡겠다…


“아줌마, 여기 생맥주는 안되죠?”


“안되지. 식당에 생맥이 어딨어. 생맥은 이거 먹고 이차로 가. 병맥은 있지.”


“그럽시다. 이 아가씨 맨날 야근해서 남는 것도 없다고 슬퍼하는데 내가 오늘 맛있는 거랑 맥주랑 사주려고요.”


“너무 많이 먹이지는 말고. 이 시간에 너무 많이 먹으면 다 살이야. 오홍홍”


주인이 아닌 종업원은 단골에게 진심을 다하는 법이다. 한 그릇 더 파는 것보다 이렇게 단골의 건강을 생각해 주시니까.


“방금 잠에서 깬 채 앉아도 갖다 주면 먹을 만큼 좋아하는 음식 있어?”


신선하다. 이제 제대로 마주 앉아서 곧 보자마자 밥을 같이 먹게 생겼는데 우리는 아직 서로의 이름도 직업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른다. 이름을 먼저 묻지 않아서 좋았다. 나를 처음 만났는데 무엇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한다는 것이 살짝 좋았다. 아까의 밉살스러운 장난기는 거둔 채 멀쩡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니 꽤나 매력이 있는 얼굴이다. 눈동자가 유독 까만 남자는 분명 멍청한 편은 아닌 듯 보였다.


“… 아귀찜.”


“푸하하하하. 것 봐! 뼛속까지 경상도 아가씨네. 근데 나도 아귀찜 진짜 좋아하는데… 다음에 한 번 먹으러 갈까예?”


“뭘 다음에 또 보냐. 오늘 하는 걸로 봐선 별로 다시 볼 만큼 매력적이진 않아.”


“그래? 애석하네. 그럼 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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