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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어들다

(8)

by Hazelle

“근데 이 저승사자같이 차려입은 놈은 내가 아는 놈인데… 저분은… 정확히 누…구? 김 대리 지인 이랬는데 너랑 더 친한데?”


“음… 만난 지 몇 시간 되었으니까 친구해도 무방하긴 하지만, 내 여자 친구에게 심하게 친한 척을 해서 아직 고려 중인 사이라고나 할까? 리프트도 못 타서 자꾸 화장실 가는 걸로 봐선 별로 신경 안 써도 되는 것 같긴 하지만 말야. 핫핫. 농담입니다.”


농담 아닌 거 다 아는 농담을 하면서 장 선생은 강일이 오빠를 밉지 않은 눈길로 소개했다.


“그러니까, 그럼 누구? 오다가 히치하이킹이라도 해드린 건가?”


“오! 어떻게 딱 맞추지? 사실 내 여자 친구를 히치하이킹하러 갔던 건데 덤으로 모신 분이라고나 할까?”


“아 참… 한 대리님 답답하시겠네… 그러니까요, 제가 아는 놈의 친척한테 사기를 당해서 쓰레기를 차랍시고 샀는데예…”


아까도 말했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도 안다는 이유로 저 인간이 참 부끄럽다. 뭐 자랑이라고 자세하게도 타임스탬프까지 찍어가며 사건의 경위를 한 대리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어이없는 것은 한 대리는 갑자기 수사반장으로 빙의한 듯, 사뭇 심각하게 듣는가 싶더니 아예 호주머니에서 메모랑 볼펜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보자… 우리 김 대리를 만나 칼국수를 같이 땡길 때 까정만 해도, 설악산으로 데려다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워크샵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즉흥적으로 설악산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고… 아! 열심히 일하는 후배를 돕겠다는 순수한 의도로다가! 그거 중요하다고요? 네네… 근데 여기서 핵심적인 거 또 발견하는 우리 한 형사 아닙니까. 그니까, 김 대리야… 네 내가 전화해서 데려다주겠다 할 때, 분명히 너네 부장이 데려다줄 거라고 퇴짜 놨지? 거짓말이네? 이 오빠야가 데려다 주기로 해서 나는 그렇게 뺀찌를 맞아야만 했던 거네? 그러다가… 그 똥차가 … 어떻게 되었다고요?? 뭐?? 본네뜨가 열렸다고?? 아니 그게 가능해? 우하하하하하하. 경운기야 뭐야…”


세상에…

것 봐. 맨날 결혼하자고 헛소리 하더니 그것 또한 뻥이었다. 나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미래의 각시가 죽을뻔한 대목에서 저렇게 미친 듯 웃을 수가… 해파리 수염만큼 남아 있던 한 대리에 대한 일말의 호감이 투명하게 사라져 가는 순간이다.


“아… 오해하지 마. 지금 멀쩡한 김 대리를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거니까… 으흐흐흐… 난 처음 들어봐, 달리는 차 본네뜨가 열린 경우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으하하하…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고? 그래야겠네. 창문 열고 있는 대로 목을 빼서… 그렇지. 그렇지. 잘했네요. 신이 도왔네. 뭐? 아… 본인은 원불교고, 김 대리는 카톨릭이라고?

아… 그럼 어느 신이 도왔는지는 모르겠네요? 도움 준 신의 정체는 불명… 오케이…”


대체 왜 이딴 소리를 장황하게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시점에 왁자지껄 부장, 과장급들이 말단 꼬봉들을 하나씩 달고 라운지로 들이닥쳤다. 3분 어묵탕은 누가 개발했는지 한 3단계는 특진했어야 옳다고 본다. 다들 어떤 로바다야끼 어묵탕보다 맛있다고 극찬 중이니까… 스키장에선…


“김 대리!! 어디 갔나 했더니… 한 대리랑… 아 잠깐만!! 이 뭐꼬 또!! 우와… 김 대리 그리 안 봤는데… 기회 활용 죽이네. 남자 친구도 델꼬 온기가?”


짜증…

상무랑 안 부장이랑 다 나타나 있다. 심심하던 차에 이런 구경거리가 있냐는 호기심천국 표정을 하고… 그 옆에는 내가 급박하게 열다섯 번이나 전화를 해대도 묵묵부답 열심히 운전만 했을 금 부장도 피곤에 쩔은 얼굴로 눈치 하품을 한 껏 해대면서 서 있다. 역시 모두가 집중해 있는 낯선 이들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 그게 아니라요… 저도 아직 진술 듣는 중이긴 합니다만, 일단은 여기 현재까지 조사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진짜 가지가지한다.

한 대리는 방금 본인 수첩에 시간별로 쓸데없이 기록한 오늘 나의 더럽게 운수 좋은 날의 기록을 궁금해서 신나 죽는 두 중늙은이 앞에 상납했다.


“이기 뭐꼬… 잉?

그니까… 열 두시에 김 대리는 연대 댕기는 고등학교 선배 오빠야를 만나서 칼국수를 사 줬고… 오, 잘했네. 세상에서 가난한기 남자 복학생인기라. 나이는 서운찮게 먹어서는 그 나이 남자가 돈 없다카기는 부끄럽고 근데 돈은 없고… 심적으로다가 한 두 배로 가난한기 복학생 아이가. (참 신기하지… 사람마다 같은 정황들을 들으며 인상 깊은 부분이 다르니까. 상무는 가난한 복학생 시절 좀 사무쳐 봤는지 다른 이들은 주목하지 않았던 강일이 오빠의 신분에 깊은 이해를 표해 마지않았다.) 그다음에… 12시 40분쯤에 칼국수 집을 나와서… 한양증권 근처에서 금 부장을 만났고… 금 부장이 차 상태 별로로 보인다고 경고했음에도 복학생 오빠야가 문제없다고 우겨서 똥차 타고 출발. 잠만 있어봐라. 이 대목! 이 오빠야 안 가난한갑지? 똥차기나 말았기나 우째 가난한 복학생 주제에 차를 사노?”


상무는 또한 복학생으로써 바르지 못한 강일이 오빠의 소비 벽(?)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데예, 단 돈 20만 원 주고 샀으예. 전혀 과소비는 아닙니더, 상무님. 참고로 저 과외로 한 달에 조금 버는 돈 있습니다. 하하.”


“똥차기나 말았기나, 그 차는 어데 물로 굴러가나?

비싼 기름 들어가야지.”


역시 기름집 부장답게 안 부장은 유지비용을 지적했다.


“어쨌거나 계속 읽어보시면 유지비는 별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십니다. 핫핫”


뭐 자랑이라고 27살 돈 헤프게 쓰는 가난한 복학생 강일이 오빠는 그 와중에 성난 관중을 안심시키고 있다.


“우째… 보자… 그래서… 서울을 출발해서… 휴게소는 하나도 안 들렀고… 내 보기엔 뭐 이미 똥차 프라블람이 있다는 거 감지했구만. 이게 운전자는 차를 느낄 수밖에 없는기거든. (역시 나이는 그냥 먹는 게 아니다. 상무의 예리한 지적에 순간 경외심을 느낀다.) 그래서 차가 퍼짔나? 뭐 우찌 됐노… 뭐?? 본네뜨?? 이기 말이 되나? 우리 김 대리 죽다가 살았네 오늘…

아이고 마. 내가 수업이라도 없애주길 잘했다 마. 참 잘했다.”


“수업은 차라리 하고 내일 일찍 보내주시는 게 더…”


“무신. 단체생활에서 사정 있어서 조금 늦게 오고 조금 일찍 갈 순 있어도 그리 따로 놀면 쓰나.”


그치만… 난 이 회사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면 나도 연봉 센 기름집에 넣어주던가. 이 말도 하고 싶다…


“아하!! 그러니까… 그런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여, 우리 장 선생이 또 흑기사로 날라왔구만?”


“그렇습니다.”


귀찮게 이러쿵저러쿵 설명할 필요 없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자 장 선생은 세련되게 살짝 고개만 끄덕이면서 모든 정황이 그러함을 확인만 하고 있다.


“다 보셨으면 그 수첩은 이만 제게…”


대체 저 사건 일지를 왜 적은 것인지 알 수 없건만 한 대리는 그 와중에 본인 노트는 내놓으라더니 날짜까지 적어서 곱게 접어 넣는다.


“대리님… 학교 다닐 때 요점이 어느건지 몰라서 통째로 달달 외우던 그런 족이었죠?”


“오! 좀 비슷한데? 어떻게 알았어?”


“그 쓰잘데기없는걸 괜히 공들여 적는 거 보고 알았죠.”


“어이! 이제 마 다들 신나게 함 타 보자! 갈 길이 바빠. 얼른 타고 얼른 마시고 얼른 자야 내일 또 얼른 수업하지!!”


아… 듣기만 해도 한 몇 사이클 돈 양 피곤하다.


“너네 오빠야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영 안 될 것 같고, 나는 알다시피 백수라 오늘 안 자도 상관없는데… 여기까지 모셔다 준 공으로 스키라도 같이 타 주는 거지?”


“오빠랑 얼마든지 놀아줄 수 있는데… 문제가… 나는 스키를 못 타…”


“가르쳐 주면 되지. 나 대학 때 스키캠프 강사 알바했었어!”


라고… 장 선생이 말했으면 좋으련만…

한 대리는 안 끼는 데가 없다.


“잘 됐네. 형도 꽤 타니까… 강사가 둘이면 좋지. 가자.”


“너무너무 잘 되었네요!! 저도 세일할 때 스키복 사놓기만 하고 써보지도 못했는데… 저도 가르쳐 주세요!!”


“그럼, 오라버니는 심신도 약한데 먼저 방으로 올라가서 뜨신 물에 샤워하고 쉬시지요. 우리는 그럼…”


“오데예!! 온몸의 수분을 다 빼내서 이제 화장실 안 가도 됩니더. 지도 이번 기회에 한 번 제대로 배워 볼까예?”


“어머, 복학생 씨도 가게요?”


브랜드 좋아하는 경미 씨가 가장 흥미 없어하는 남자류가 두 부류인데 하나가 백수, 하나가 복학생이다. 다만 집안 좋고 돈 많은 백수는 당연히 열외.


“네, 갈라고요. 뭐 그 짝 때문에 가는 거 아니고 순수하게 학구열로다가 함 배워 볼라꼬요.”


복학생 오빠도 눈치가 살아 있다. 본능적으로 본인을 싫어하는 여자들은 잘도 감지하는 것이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비호감을 싹 틔운 두 남녀까지 다섯 이서 초보 코스에 올랐다. 태풍 속에 휩싸인 갈대 모양 옆으로 몇 번 쓰러지고, 무작정 내려가다가 발레 전공도 아닌데 강제로 다리 찢기 몇 번하니까 기절하게 피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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