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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어들다

(7)

by Hazelle



“…

현재 예산 시스템은 구현하는 프로그램 자체는 요즘 거의 쓰지 않는 ancient(구형)이지만, 로직은 매우 잘 짜여 있어요. 로직이 완벽해서 다른 프로그램으로 이미그런트(이식) 하려면 오히려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구현 프로그램마다 함수와 코딩이 다르니까요. 정확하게 현재처럼 재현될지는 해봐야 알겠는데 그렇게 아예 엎고 다시 얹으려면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 아시지요.

제가 늘 말씀드렸지만,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쓰시는 여러분들이 이 프로그램을 제대로 파악해서 유지보수가 가능한 수준이 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


“아니 그래서 우리 매주 그거 교육하잖아. 김 대리가 직접… 김 대리가 내년에 프로젝트 마무리하고 가면은… 그거 누가 맡아서 운영 가능하겠노?”


이 아저씨들과 1년 넘게 지내 오면서 이렇게 물 뿌린 듯 조용한 광경을 몇 번 보았다. 주로 ‘이거 할 사람??’ 식의 전체 질문이 내려지면 이러하다… 아무도 총대를 메고 싶지 않다. 엘리트들은 더 엘리트인 대장을 모시는 데에 아주 능하니까…


“뭐 이럴 때는 항상 심하게 조용해.

자 그라면, 우리 선생님이신 김 대리가 한 번 고견을 말해봅시다. 누가 이거 맡으면 좋겠어? 누가 제일 똘똘한가?”


“… 현재 상태로는 이거 유지 관리할 만한 실력이신 분이 없어요. 다 그냥 그렇구요. 뭐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자꾸만 본인 숙취 해소의 시간이나 취미생활시간으로 쓰시니깐… 이 프로그램이 그렇게 대충 들어서 이해가 갈 만한 그런 수준은 아니거든요. “


하는 수 없이 담임한테 이르는 반장의 심정이 이럴까… 하지만 나도 살아야지. 그들을 감싸줬다간 내가 실력 없는 선생이란 얘기를 들을 판이니까…


“뭐??

아니 어떤 자가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한단 말이야!! 이것들이 진짜… 비싼 돈 들여서 교육시키니깐! 회사가 자선단체냐!!”


놀러 와서 이리 쥐 죽은 듯 고요하기도 힘들다.

원래 어릴 땐 아버지가 제일 무섭고, 크면 선생이 무섭고, 돈 벌기 시작하면 내 월급줄 거머쥔 상사가 제일로 무섭다. 절대 권력자가 포효하자 대역죄인들은 그저 고개를 수그리기 시작했다.


“내일 조식 먹고 바로 특별 수업 실시한다. 수업 후에 인수인계 책임자는 김 대리 의견 백 프로 반영해서 정할 테니 그리 알아!”


뭐지…

그러니까… 황천길을 유턴해서 겨우 도착한 이 워크샵의 목적이 그놈의 인수인계 회의였는데… 그걸 내일 한다고?? 그래서 오늘 처음 만난 어른 수컷 둘을 억지로 붙여놓았는데?


“내일 아침에는 수업하고 회의해야 하니까네, 스키는 지금 탈까?”


아니, 지금 수업하고 회의하고 내일 오전에 스키 타는 거랑 지금 스키 타고 내일 수업, 회의하는 거랑 뭔 차이가 있다는 거지? 차라리 할 거면 지금 하지…


“역시 명견이십니다. 스키는 아무래도 야간 스키가 운치 있지예!”


상무의 말은 곧 성경이다. 가만히 보면 나이 많은 자들의 아첨은 단시간 내에 이루기 힘든 고난도인 것을 수시로 느끼게 된다.


“어차피 김 대리님 오기 전에 이미 상무님이 오늘 밤에는 ‘무신 회의고 나발이고’ 라더니 스키 탈거라고 미리 말해서 대리님 거랑 제 거랑 장비 다 빌려놨었어요.”


경미 씨가 은근히 다가오더니 커다란 음모라도 밝히듯 조심스럽게 정보를 전달했다.


제기랄… 그럴 줄 알았었다… 설악산까지 달려와서 신나 죽겠는데 무슨 회의겠어. 저 서울대 출신자들은 너무 기를 많이 써서 그런가 졸업 후에는 학업을 매우 경시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이 늙은 너구리 아저씨들은 오늘 밤에 수업, 회의 진행하면 내일 내가 회사 핑계 대고 서울로 튈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2박 3일을 온전히 묶어두려면 이 수밖에 없겠다고 중지를 모았음에 분명하며 평생 하던 공부는 손 놨어도 타고난 아이큐는 멀쩡해가지고서는 내가 아저씨들 수업 안 듣는다고 푸념할 것도 미리 상무와 다 손발 맞추고 상무가 심각하게 아저씨들을 혼내키는 걸로 각본도 짰을 것이다. 이제야 그들의 꼼수를 눈치채다니… 둔한 나를 탓할밖에… 그나저나 이 어색한 수컷 두 마리는 어디로…


“오빠야, 어딘데?”


두 수컷 중 누구한테 전화를 할까 살짝 망설였지만 결국 만만한 강일이 오빠한테 전화를 하고 있다.


“… 어디기는, 리프트 기다리는 중이지. 가시나야, 니 섭섭하다이. 흑마 끌고 달려 구하러 와 준 남자 친구 놔놓고 왜 선배 오빠한테 전화하는데? 그라고 선배 오빠야 한테는 오빠야 소리 아주 자연스럽네? 이래도 되는 기가?”


분명 강일이 오빠한테 전화를 했는데 장 선생이 전화를 받았다. 장난처럼 하는 그의 말에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기운이 느껴져 살짝 찔린다.


“아… 근데 왜 오빠가 전화받아? 그 작자는 어디 갔어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화장실 가야 한다고 갔어. 핸드폰 산 지 얼마 안 된 거라고 나한테 맡기고… 근데 문제는 우리 여기서 기다린 지 꽤 오래되었거든? 그 작자 오빠가 화장실을 세 번째 가고 있어… 기다리는 사람 별로 없어서 리프트도 금방인데… 근데 넌 회의하는 거 아니었어?”


“아… 그게… 이 아저씨들이 내일 한다고… 그래서 지금 이 무리들도 스키 타러 갈 작정이거든? 어쨌건 그렇다고요… 눈에 띄면 매우 귀찮게 할 예정이란 것을 미리 알려드립네다…”


“우리 사촌 형 있지? 고글 써도 대번에 알아볼걸… 걸리면 뭐 사실대로 말하지 뭐. 혹시 알아? 우리 방값도 경비 처리해 줄지? 하하. 아… 저기 너네 선배 오빠 작자님 오시네… 좀 있다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야밤에 아저씨들이 스키는 무슨… 바로 술판이나 벌이겠지…라고… 하지만 운동광인 상사를 모시고 있는 아저씨들은 다르다. 좀비도 미국 좀비, 한국 좀비 다르듯이(한국 좀비는 엄청 빨리빨리임) 다 같이 배 나온 아저씨 집단이라도 모신 상사에 따라 그들의 활동영역은 광범위하게 달라지는 법. 운동광 상무 밑의 엘리트 집단은 토요일에도 수시로 끌려 나와 관악산을 올라야 했고, 기름집 야구팀이 시합하는 날은 총동원되어 목이 쉬도록 응원, 지금처럼 추워서 동태로 눕기 직전인 날씨에도 스키는 꼭 타야 하는 것이다. 분명히 남보다 간이 두 배는 더 클 거라고 안 부장이 뒤에서 항상 중얼거리듯, 운동 끝나면 당연히 대장부답게 말술도…


그 와중에 추운 몸은 좀 풀고 타야 한다며 맛은 밍밍하지만 가격은 헉하게 짠 라운지의 어묵탕을 굳이 먹이겠다는 한 대리에게 잡혀서 들어서는데 눈에 익은 두 작자가 보인다. 그런데 분명 어색하기 짝이 없어야 할 그 두 사내 사이엔 희한한 핑크빛 기류와 함께 이 야밤에 수컷 둘이서 뭐 그리 웃을 일이 있는지 껄껄대고 난리도 아니다.


“… 아니 그 와중에 절대 지는 내랑 같이 저승 안 간다고…

마, 어디까지 본모습을 공개했는가는 제가 아직 모르겠지만서도, 경고드리는데 절대로 평범한 여인네가 아닙니더. 행님, 조심하셔야 되예.”


입구 쪽에 등을 돌리고 앉아서 술 한 방울 안 마시고도 수다가 폭발한 강일이 오빠 등 뒤에 바짝 다가선다. 눈치 만점인 장 선생이 다행히도 모른 척을 해주고 있다.


“엄청 아끼는 후배 아니었어요?”


“물론 그녀를 아끼지예. 아끼니까 이 위험한 것이 남을 해하지 않도록 또 단도리도 하는 기고…

그나저나 행님, 말씀 편하게 하십쇼 행님.”


“언제 봤다고 행님이냐! 동생 없는데서 좀 씹으니까 맛나냐??”


이 인간이 오늘 저녁에 나를 황천길로 동행하려던 것도 모자라 뒷담화를?? 소매를 걷고 야무지게 한 번 응징하려는데 3분 어묵탕 다 되어서 기쁜 한 대리가 이내 따라붙었다. 경미 씨와 함께…


“야!!! 너 뭐야!!!!!”


뭐냐니… 이 인간은 어째서 제 사촌동생을 볼 때마다 식상하게 같은 인사인 건지…


“그러게… 형을 3년 동안 만난 것보다 요즘 더 자주 보는 거 같애?”


“옆에 계신 분은 친구야? 처음 뵙겠습니다. 한 형진 대리라 합니다. 이 미스테리 한 놈 이종사촌 형이지요.”


“아 지는 이 훌륭한 선생님 벗은 아니고요, 이 표독스러운 김 대리님 지인인데예. 방금 뒷담화하다 딱 걸려서 좀 맞게 생겼는데, 초면에 죄송하지만 한 대리님이 저 여자 부리는 갑 이지예?

저 좀 보호해주이소.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진짜 팰 생각은 없는데 이 오버가 전공인 선배란 작자가 한 대리 뒤에 숨고 오돌오돌 떠는 연기까지 선보이고 있다.


“근데 둘이… 아까 리프트 기다린다며… 왜 또 라운지에 있어?”


“아… 사고의 여파로 지금 심신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서 고소공포증까지 겹치면 소변을 자가 컨트롤 없이 방출할 위험에 처했다고 환자 본인이 스스로 그리 진단하길래… “


장 선생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적인 투로 읊조리다 본인이 생각해도 기가 찬 듯 풋… 하고 웃어버렸다.


“뭔 사고… 아 그거? 그래도 뭐 별일 없었는데? 그거랑 스키 못 타는 거랑 뭔 상관이야!”


“지금 내가 엄청 기력이 쇠해 있다니깐? 공진단 하나쯤 섭취해야 정상화될 거 같애.”


“한의사가 아니라 공진단 같은 건 휴대를 안 하고 있어 안타깝네요.”


장 선생은 강일이 오빠가 신기한 듯 자꾸만 쳐다보면서 빙긋빙긋 웃어댔다.


“웃기시네. 원래 높은데 못 올라간다이가. 내랑 저번에 남산타워 올라갔을 때도 오줌 마렵다고 금방 내려가자고 난리 쳤잖아.”


“뭐야? 둘이 남산타워도 가는 사이야??”


뭐지…

남산타워가 별거냐… 왜 한 대리랑 장 선생이랑 둘 다 쌍심지를 켜고 동시에 소리를 지르는지 모를 일이다.


“설마 한강 유람선도 같이 탄 건 아니겠지??”


“… 맞는데예… 그라면… 안 됩니꺼?”


이번엔 강일이 오빠와 내가 함께 합창을 하고 있다.


“… 원래 결혼 약속한 사이만 유람선 같이 타는 거 아냐?”


“힉!!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악담을!!”


내가 일 년 남짓 한 대리랑 가까이 일하면서 알게 된 건 이 남자는 신기하게 뻥이 세다는 것이다. 있는 걸 부풀린다기보다 아예 없는 걸 만들어내는 데에 재주가 있다. 유람선은 결혼 약속한 사이만 타는 거라는 둥 이딴 소리가 그의 대표적 뻥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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