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쓰레기차에 앉아서 백미러로 확인하니 확실히 장 선생이다.
“오빠… 미안… 귀찮았을 텐데…”
“아냐, 아냐! 그나저나 나 아까 지나갈 때 이 차 보긴 했거든? 근데 설마 했잖아. 난 누가 차 버리고 간 건 줄 알았거든… 그나저나 이 추운데 왜 창문은 열고 있었어? 아, 그 선배 오빠구나?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장 대만입니다.”
“오!! 슬램덩크!! 이름이 어떻게 똑같지요? 오호호! 놀랍다.”
만화방 죽돌이 아니랄까 봐… 직업 근성은 어디서고 튀어나오게 마련인가 보다.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은 주제에…
“그건 정 대만이고… 이 선생님은 장 대만이라고.”
“아. 그렇구나. 민 강일입니다. 직업은 복학생이고예.”
우리 강일이 오빠는 이러한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있게 자란 티를 낸다고나 할까, 지방 소주회사 집 아들로 커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아서인지 누구를 만나도 기죽는 법이 없었다. 당장 가진 것 없어도 태도만 보면 록펠러를 이기는 것이다.
“오호. 그러시군요. 그럼 저 차는 여기 두고 가야겠죠? 아까 들으니 보험이 없으시다고…”
풋.. 웃음이 스며 나온다.
장 선생은 한치의 트집도 잡을 수 없게 완벽히 예의 바르지만 할 소리는 다 하고 있다.
“네네… 아무래도 내일 아침 견인회사에 전화해서 처리하던가 해야겠지예. 제가 사람이 좋은데 꼼꼼하지가 못해서 이런 실수를…”
“첫 차는 잘 아는 사람하고 같이 가서 구매하는 게 좋은데 말이죠.”
잘 아는 인간한테 당한 거라는 말은 강일이 오빠의 자존심 보호 차원에서 굳이 덧붙이지 않는다.
“얘 언 거 봐… 이리 와. 아니 워크샵 가는데 정장은 왜 입었어? 더 춥잖아.”
코가 체리만큼 검붉게 된 것은 강일이 오빠인데 장 선생 눈에는 나만 보이는지 어정쩡하게 두 차 사이에 서 있는 나를 안더니 차에서 꺼내온 커다란 양모 담요를 온몸에 씌워 준다.
“일단 차에 타. 거기 복학생 오빠야도 타세요.
제 차는 창문이 닫힙니다. 것도 오토매틱으로…”
“아이고 그럼요. 이 차는 창문이 막 무선조종으로도 열리고 올라가고 할거 같은데요? 헤헤.”
내 선배 오빠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되든 태어나 처음 재규어 세단을 타 본다는 데에 상당히 고무되어 있다.
“여보세요?”
이제야 왔다… 워크샵에 도착해서 을의 종적을 확인 코저 하는 갑 아저씨들의 전화…
“김 대리야, 오고 있제? 상무님도 11시에 예산 시스템 방안 논의 참석하신다 하니까 절대 늦지 마래이. 어디쯤이고? 아직 시간 넉넉하니까 천천히 조심해서 온나.”
뜬금없지만 분명 말하자면 내가 일하는 근무지는 부산이나 대구 아니고 서울 한복판이다. 그런데 이 좁은 나라에 신기하게도 둘러보면 희한하게 경상도 출신이 천지다.
“아… 난감하네… 나 이 놈의 워크샵 꼭 가긴 가야 하나 본데? 오빠… 어떡해? 아님 나 지금 한 대리님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해도 돼.”
“지금 막히는 것도 아니고 슬슬 가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백수 남자 친구는 매우 프리 한 존재라구. 어느 콘도야?”
“대명…
근데.. 나 데려다주고 다시 바로 서울 운전해서 가려면 힘들지 않을까? 하기야 저 오빠, 운전병 출신이래. 올라갈 땐 저 오빠 이용해.”
“네, 맞습니더, 형님. 운전은 마 제가 해도 됩니더.”
강일이 오빠는 역시 사업가 집안 아들답게 넉살이 좋다.
“아니에요. 생각을 좀 해보죠. 우리도 그 시간에 다시 서울 올라가려면 피곤한데… 그러지 말고, 대명에 지금 전화해서 방 하나 잡을게요. 일단은 저랑 오늘 방을 같이 쓰시죠. 내일 일어나서 어떻게 할지 결정합시다.”
“오! 화끈하고 좋십니더. 지도 마 제 스케줄 나름 마음대로 조절 가능한 복학생이라 부담 없으예. 내일 뭐 전공 수업 하나 있지만 그건 뭐 째도 되고예. 헤헤.”
이 긍정적인 인간은 분명히 시즌에 공짜로 스키 탈지도 모른다는 데에 설레고 있다.
“니 그라믄 야간 스키 못 타나? 니는 일해야 되나?”
“나 탈 줄도 몰라, 스키.”
“스키는 내일 내가 가르쳐 주면 되지. 그래 좋은 생각이네요. 그러면 강일 씨랑 나랑은 온 김에 야간 스키나 한 번 탑시다.”
“오예! 행님 멋쟁이!”
강일이 오빠는 늘 그랬다.
가진 자에게 좀 더 나이스 한 것이 꼭 욕먹을 일은 아니라고… 가진 자에게 붙어 있음 떡고물이라도 묻는 법이라고… 그런 오빠의 철학을 비판한 적 없지만 또 그렇다고 오빠의 정직한 실천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 우리 김 대리님이랑은 꽤 각별한 사이신갑죠?”
또 또 또 시작이다. 어설픈 사투리 구사… 장 선생은 다 좋은데 저 잡기는 어여 포기하기 바란다…
“그럼요. 우리는 꽤 각별하지요. 친오빠 없는 우리 김 대리에게 저는 뭐랄까, 바른 길을 안내해 주는 길라잡이 같은 존재랄까요?”
“오… 그래서 오늘 저승길도 같이 길라잡이 할라고?? 길라잡이 어쩌고 하는 거 보니 정석 안 풀고 해법 했는가베?”
길라잡이 같은 소리 하네….
풋… 웃음이 배어 나오는데 그 와중에 어이없는 것은 서울 남자는 되지도 않는 사투리 흉내를 내고 있고 토박이 경상도 남자는 갑자기 정색하고 어색한 서울말 구사 중이다.
“각자 본인 지방 방언으로 돌아가시죠? 듣기 엄청 어색한데??”
“뭣이! 저 오빠야 서울말은 진짜 못 들어주겠지만서도 내 사투리는 너무 플루언트 하구만.”
“… 오빠가 운전대 잡은 사람이니까 내가 암말도 안 하갔으…”
생각보다 이 이상한 조합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드디어 휴게소란 곳에 들러 같이 우동도 말아먹고, 통감자도 굴려댔다.
“우째, 오빠야는 음악 어떤 거 주로 듣습니꺼?”
이제 곧 고개를 넘으면 콘도에 도착할 참이다. 장 선생이 디제이를 자청하더니 딱 맞춤이라며 한 곡을 골라 틀었다.
‘꽃 피이이는~~~ 동백 섬에~~~~’
“뭡니까. 이 언유절(unusual)한 음악?”
“가끔은 누구의 취향도 아닌 음악을 들으면 신선하잖아.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언유절 데이니까… 자 감상해 보라고. 왜 이 사람이 가왕인지 느끼게 되니까…”
그렇다.
아까부터 갑자기 눈이 내리고 있는데…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부산항 노래를 들으니까 희한하게 감상에 젖게 된다.
“꽃피는 봄 오면 요 멤버 요대로 부산 가서 꼼장어 한 판 때리까예?”
“좋지예 행님!! 제가 또 마 로칼들만 가는 맛집으로 제대로 안내하겠습니더!”
휴게소에서 같이 우동 먹은 이후로 강일이 오빠는 나보다 더 장 선생에게 빠져 있다. 이 오빠… 알고 보면… 정체성 혼란인 바로 그 사람인가?
우여곡절 끝에 한 삼일은 고생한듯한 느낌으로 도착하니 10시 반. 곧 예산 시스템 유지보수 방안 회의에 발제자로 참석을 해야 한다. 아무리 넉살 좋은 선배 오빠라도 남자 둘을 내버려 두고 적어도 한두 시간은 걸릴 워크샵 메인 회의에 참석을 해야 하는 것이 썩 마음 편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오빠들… 진짜 야간 스키 타게?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내가 바로 회의 들어가야 해서… 미안해서 어쩌지?”
“무슨…
생각지도 않게 야간 스키 타게 돼서 좋은데? 우리는 걱정 말고 어여 들어가 보세요. 알아서 잘 놀고 있을게. 끝나면 전화해. 우리 방은 2층이야. 205호. 시즌이라 그런지 평일인데도 방이 없어서 겨우 잡았어.”
“그래도 방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무슨 암호 같은 거 대사 치던데? ‘저 만인데요…’ 하고 몇 마디 안 하니까 방 생기던데?? 행님, 억수로 멋있어예.”
피도 안 섞인 선배 오빠가 부끄럽기는 참 어려운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