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부러 계산하고 고른 단어는 아닌 ‘저예요.’. 하지만 남자의 반응에 쓸데없이 가슴 졸이고 있다. 무심하게 ‘누구?’라고 되물으면 전화를 끊어버릴 거라는 원대한 계획도 함께…
“미안, 내가 그날 이후 너무 오래 걸렸지?
먼저 전화하려고 했는데…
진짜 거짓말 같겠지만 오늘에서야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막 씻고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집안 어른이 아팠었는데 이제 괜찮아지셨거든.”
병원?
아… 역시 집에 누군가가 아파서 일이 있었던 거구나… 아까보다 더 동태가 된 몸이 고통스러울만치 추워야 하는데 갑자기 봄볕이라도 쬔 양 온몸의 긴장이 풀리려 한다.
“아… 그랬구나…
오빠… 사실은… 내가 지금 사고가 좀 있어서 설악산 워크샵 가던 길에 오도 가도 못하고 국도 한켠에 찌그러져 있거든… 와서 좀 구해줄 수 있어? 미안…”
“사고?? 괜찮은 거야?? 너 혼자야??”
때로는 문장의 내용보다, 단어의 선택보다, 그저 그 사람의 목소리 만으로도 충분히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는 갑자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나 멀쩡해. 걱정 마… 그리고 내가 운전한 건 아니고… 고등학교 선배 오빠가 데려다주는 길이었거든…”
“… 말했었지? 필요하면 나를 부르라고… 내가 그날 이후 전화가 없어서 그랬던 거니?”
살짝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그 사흘을 못 참고 다른 이를 불렀냐’는 따가운 질책이 묻어 있었다.
“아니, 원래 부장님이 데려다 주기로 했었는데… 우연히… 하여간 말하자면 복잡해…”
“아니 근데 바람 소리 왜 이렇게 세게 들려? 얼른 차에 들어가서 히터 켜고 앉아서 기다려. 얼른 갈 테니… 문자로 좀 더 자세하게 어느 위치인지 보내줘. 나 얼른 차 시동 걸게.”
이미 남자는 차를 움직이려는 중인 듯 분주한 소리가 났고 차문을 여는 소리도 들린다.
“알았어, 여기서 꼼짝 않고 기다릴게, 오빠. 고마워.”
“빨리 들어가. 춥대도.”
오빠… 이 차는… 창문을 여는 순간 닫을 수 없는 최첨단 신식이야…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난 이미 차 안에서 전화를 하는 중이었는데… 오빠는 자꾸만 찬바람 맞을 나를 걱정하며 차 안으로 들어가란다… 오빠야… 이 차는… 쓰레기 중에서도 상 쓰레기야… 창문을 내릴 순 있어도 한 번 내리기로 했음 돌이킬 수 없어…
“오!! 그 서울대 백수?? 온다나?
아 그라고 보니까, 니 지금 엄청 뜨거울 땐데 왜 첨부터 그 사람한테 데려다 달라고 안 했는데? 아직은 그런 거 불편하나?”
“아 몰라… 좀 보통 인간은 아닌 거 같다.”
나는 더 이상 속에 담고 있기가 답답해서 그간의 짧은 이야기를 강일이 오빠에게 털어놓았다.
“… 뭔데… 뭐 숨겨야 하는 그런 가족의 비밀 이런 거 있는 거 아이가? 돈도 많은 거 같다매… 알고 보면 아부지가 일본 야쿠자라던가 그런 건가? 충호가 그라던데 눈썹이 완전 시꺼먼 것이 사무라이 상이라고…”
“아 그 새끼는 일본 막부 만화 너무 많이 처 봐서 뵈는 게 다 그런 거고… 갑자기 사라진 게 가족 중 누구 병원에 있다는 소리 듣고 급하게 가더니 그 이후 깜깜무소식이었다니까.”
“근데 엄마가 아픈 건 아니라매. 아부지도 돌아가셨고… 직계 가족 아닌데 막 시작한 여자 친구한테 전화도 며칠씩 안 할 정도면 누가 돌아가셨나?”
“그건 아닐걸… 그런 거면 사촌 형이 뭘 알아야지… 사촌 형은 할거 다 하고 지금 워크샵도 가 있는데?”
“이종이라매. 친가 쪽이랑 별 상관없을 수도…
마 우쨌거나, 우리를 이 지옥 같은 상황에 도와주러 오신다카이 우리한테는 생불이시네. 나이 내 보다 많제?”
“어. 그래도 자부심 가지라. 얼굴은 오빠야가 더 들어 뵌다.”
“욕을 칭찬같이 하지말랬제!”
티격태격하면서도 대체 그 남자의 비밀은 무엇일까에 대해 오빠와 함께 여러 고찰을 나누었다.
“마 잘 모르겠지만서도, 니가 그랬다이가.
내가 경주 때문에 힘들어할 때, 그리 죽을 만큼 힘든 거는 진짜 사랑 아니라고… 니가 그랬다. 그니까 니도 너무 힘들어진다 싶으면 아예 때려쳐. 아프기 전에 발 빼. 알긋제? 오빠야는 니 아픈 거 싫다.”
“체.. 위해 주기는.. 맛 간 쓰레기에 태워서 죽일 뻔한 게 지금 세 시간도 안 됐거든예.”
“의도치 않은 불의의 사고를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억울 하제. 그 순수했던 인텐션만 보라케도!!”
알맹이 없는 언쟁을 얼마나 한 걸까…
“오잉? 저 찬가…?”
추위를 이기는 방법으로 말싸움을 택했던 남녀 앞으로 까마귀를 닮은 반지르한 까만 세단 하나가 미끄러져 오고 있다.
“진짜가? 저 차라고?? 저거 재규언데?? 나 저 차 우리나라에서 실물로 첨 보는데?”
“몰라, 나도. 자기 차 갖고 온 적 없어. 맨날 택시 탔거든… 그래서 차 없는 줄 알았는데…”
“역시. 부자들은 사치스럽게 게을러. 내가 저 차 갖고 있으면 하루 종일 운전할 낀데…”
“오빠야는 저 차 갖고 있음 택시 운전수 됐겠네. 하루 종일 운전하고 싶어서.”
“히히. 그런가.. 에이 아이네. 저 봐라 그냥 간다이가.”
아무래도 장 선생의 냄새를 풍기던 까만 차는 조금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그렇네… 우와 어떤 부자가 교외에 저택 짓고 사는 갑다.”
스쳐간 까만 차를 잊고 다시 기다리는 중인데 어라, 아까 그 까만 차가 이내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더니 세련되게 차 머리를 돌려 우리가 서 있는 정차 공간으로 들어와 뒤쪽에 주차했다.
명차에서 나는 맑은 신호음을 울리면서 차 문이 열리고 차만큼이나 까만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