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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Nov 08. 2018

경영계획, 디자인이 아닌 엔지니어링

몇 분이면 만들 수 있는 계획은 만들지를 말자

경영계획의 시즌, 그 아찔한 반복



기획의 시즌입니다. 퇴근도 못하고 사무실에서 늦은 시간까지 있는 기획자 분들이 많을 시즌입니다. 이 맘때가 되면 왜 일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가족을 못 본다든지 수당 없는 야근을 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불만을 떠나서 이 방대한 양의 사업 계획을 누가 다 보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나 말고 또 누가 있을지에 대한 일 자체에 대한 생각말이죠. 보이는 보고서도 양이 어마어마 한데 그것을 만들기 위해 뒤에 작업한 엑셀부터 심지어는 쿼리까지 기획안 시리즈를 내놓자고 리서치한 자료까지 더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만한 실효성이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듭니다. 수학처럼 답이 딱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답이 나온다 한들 그게 당장 어떻게 실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닌 기획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미지의 세계입니다.



더 힘든 점은 알려주는 사람은 없는데 파편적으로 간섭하는 사람이 많을 때입니다. 연역적으로 방법론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일단 기존의 계획과 성과를 비교해 보고 원인과 대안을 생각해보고, 시장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정성적으로 먼저 보고 우리의 경쟁력은 어떤 변화가 있는지 보고 정량적으로 잡아야 할 재무적 목표를 검토합니다. 그리고 변화에 따라 각 부분들이 준비해야 할 이슈들을 정리하고 그것을 어떻게 측정하고 세부적인 지표들을 어디까지 컨트롤 할 것인지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죠. 그것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는 그걸 위한 자원 분배 계획과 지식과 성장 관점에서 어떤 계획을 함께 해야 하는지까지 수립해야 하기도 합니다. 시나리오도 붙죠. 환율의 변화나 금리의 변화에 따라, 혹은 재무적 결정 방안들에 따라 각각 취해야 할 시기별 액션과 그것의 결과를 미리 준비하기도 합니다. 이런 작업은 수시로 위에서 내려오는 관점이 달라지므로 늘 출근 준비를 부르곤 하죠. 이런 장황한 방법도 방법이지만 이것을 정리하는 기술도 기존 템플릿에 어떻게 이번에는 변형을 해서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구성을 할지, 첨부는 어디까지 할 지에 대해서도 준비합니다. 중간에 각 단계별로 이야기 하는 사람도 무지 많죠. 생각만 해도 지치네요.





방향이 틀리면 이후는 모든 것이 허사




이왕 할 것 잘 해야 합니다. 조직에서 미래를 그리고 뭔가 준비하는 역할은 사실상 기획만의 몫이므로 기획은 무슨 기획이든 정기적인 계획은 지적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산출물이 곧 밥값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사실 경영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아젠다 수립은 대부분의 회사에서 큰 고민 없이 이뤄집니다. 보통 현재 하는 일이 잘되고, 거기서 파생되는 사업이 나오고, 원래 사업은 글로벌 진출을 하는 식의 설계가 된 기업이 많습니다. 이런 구성은 명사만 갖다 붙이면 비슷할 정도로 되어 있는데 경영계획을 엔지니어링 한 개 아니라 단순히 디자인만 해서그렇습니다.



계획을 디자인 한다는 것은 전략 프레임이나 템플릿에만 내용을 덮어 쓰고 세부적인 내용은 설계하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즉 겉만 따라한다는 것이죠. 지금에야 그렇지 않지만 레벨이 낮은 컨설턴트들이 현업을 깊게 고민 없이 기존 프레임과 몇 리서치 자료를 모아 만드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듣기 좋고 그럴듯한 이야기 같지만, 기업 고유의 역량과 하기 위한 자원에 대한 고려, 시장 내에서의 포지션, 원천 기술의 변화에 대한 숙고가 빠져 있습니다.



화장품 시장에서 ‘뷰티테크’가 도래하리라는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대기 질이 계속 좋지 않고 바이오 기업들의 상장세를 볼 때 명명까지 그럴듯 하게 해서 ‘테크’라는 말에 모든 미래를 다 걸고나면 모든 화장품 만드는 회사들이 이걸 해야 할 것처럼만 보입니다. 그러면 계획을 이렇게 짜겠죠. ‘뷰티테크 원천 기술 확보 - 뷰티테크 제품 출시 - 중국 시장에 모델 브랜드 런칭’.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단순히 프로세스를 전략 단계라고 나열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필요하죠. 하지만 각 단계마다 생각해봐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왜 그걸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점입니다. 모두가 그걸 할 수 있다면 그걸 하는 게 딱히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현재 마켓쉐어가 높은 고객층이나 기능성 화장품에 대한 고객 인지, 기술 확보 상황, 연구 투자 성과를 보고 하면 언제하고 뷰티테크를 한다면 그 중에 세부적으로 무엇을 먼저 할 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시장을 리드할 자본이나 기술이 없다면 꼭 지금 이것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필요하죠. 좋은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언제 할 지 정하는 게 경영계획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을 위한 보이지 않는 것




프로세스의 나열을 막기 위한 것 중 하나가 원천 기술 변화와 확보를 보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수요하는 트렌드 자체가 아닌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우리 역량의 변화를 경영계획의 뿌리에 두고 변화관리를 하는 것이죠.



방위 사업체는 중장기적인 기술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계획의 시작입니다. 미국 국방부 무기 체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지금 원천 기술의 변화에 따라 앞으로 20년 정도까지 나올 제품을 미리 추정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그 기술이 국내에 어떻게 도입될 지 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죠. 우리나라 방위 사업체가 아무리 규모가 커도 직접 월등한 성능의 전투기를 만들 수는 없으니 거기 들어가는 레이더를 만들자는 식이죠. 그러면 바뀌는 탐색 환경에 맞는 레이더 기술을 연구하는 박사급 인재를 국내외에서 찾아 연구하게 만듭니다. 이런 경우 연구 기간이 길죠. 연구는 시제품으로 이어지고 수주를 거쳐 양산 단계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국내 무기 도입 정보와 국방부의 아젠다에 대한 치열한 정보 탐색이 이어집니다.




사실 어느 기업이든 이런 과정 같은 것을 겪습니다. 원천 기술이 없는 기업은 어떻게 협업할 수 있을 지 파트너를 찾습니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단기적인 방법이지 뭔가 자생적인 전략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쿠팡이 최근 물류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물류와 시너지나는 일을 찾고 있는 것은 비교우위에 있는 것을 잘 알고 자원의 최적화를 꾀하는 좋은 방향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이렇게 준비가 없이 계획만 수립하는 회사도 적지 않습니다. 경영진이 하고 싶은 것들만 나열하게 만들고 할 수 있게끔 만드는 투자에 인색하고 기술도 잘 모르는 회사들 말이죠.



저는 그 점에서 국내 패션 산업 쇠퇴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옷을 구성하는 어떤 것에도 투자하지 않는 회사가 많기 때문이죠. 그 동안 대부분의 기업에서 준비한 것이라고는 더 싼 임금의 노동자가 있는 해외로 가서 저렴한 원가의 옷을 만드는 것 뿐이었습니다. 옷의 디자인은 해외 브랜드와 국내 인디 브랜드를 카피하기에 바빴고 원단은 사서 쓰는 데 급급했습니다. 유통망도 리테일러들 손에 모든 주도권을 내 주었죠. 디자인을 위해 해외 투자를 하거나 캐릭터를 육성하는 노력이나 적어도 IT 투자를 하는 것도 매우 드물었습니다. 원단도 유니클로가 싸고 기능성 있는 제품을 출시할 때 그저 쳐다보고 몇 년 뒤 카피 제품을 사기에 바빴죠. 이미 만든 생산이나 물류 프로세스는 재투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망설이고만 있었습니다. 유통은 백화점이나 아울렛, 마트에 좋은 샘플을 제공하는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 표현으로, 경영계획을 디자인해서 그렇습니다. 엔지니어링하지 않았죠. 역량에 대한 준비가 없었습니다. 사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매니저를 하기에 가능한 일이죠. 국내 패션 산업 뿐만 아니라 사업에 대한 이해가 생길 수 없이 낙하산으로 책임자가 교체되고 처우가 나빠 회전율이 빠른 기업에서는 비슷하게 겪고 있는 일입니다. 국내 금융이나 중공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지 못하거나 잃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종적으로 큰 투자를 할 사람이 사업에 대한 이해가 적고 일반인에서 조금 나은 수준으로 산업 동향을 파악하며 기술은 모르기에 트렌드를 기반으로 결과물만 요구하는 계획. 그리고 현재 자원이 거기에 맞게 준비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아래 직원들만 돌려가며 경력 망치고 혹사 당하는 게 선배가 겼었듯이 너희가 인내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 이런 잣대들은 준비되지 않고 보신하는 기업들만 만들었습니다. 무슨 기업가 정신이 있을까요? 경영계획에서 다루어야 할 지점이 여기 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기업 문제죠.



하지만 지금 그것을 계속 논할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야죠. 퇴근을 빨리하고 무난한 평가를 위해서는 경영계획을 기존처럼 디자인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그 결정도 혼자 혹은 몇몇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뭔가를 만들어야 할 때는 시간을 갖고 미리 준비할 역량들을 챙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블의 프리퀄 무비가 어느 날 시리즈를 다 만들고 생기지는 않았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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