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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Nov 16. 2023

텅 빈 페이지의 가능성


패터슨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 주 작은 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운전사 '패터슨'이 하루하루가 비슷한 일주일을 보내는 잔잔한 영화다. 패터슨은 일어나자마자 시리얼로 혼자 아침을 먹고, 아내가 싸준 샌드위치 도시락을 들고 출근한다. 매일 정해진 같은 코스로 버스운전을 하는데 매일 다른 쌍둥이가 버스에 탄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와 저녁을 먹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동네 바에 들어서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중에 조금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바로 시를 쓰는 것이다. 패터슨은 이 마을 패터슨에서 나고 자란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좋아한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점심을 먹고 나서 폭포 앞 벤치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서 수첩을 꺼내서 오늘 본 풍경이나 떠오른 영감을 시로 쓴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월요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동안 이 비슷한 무료함을 깨뜨릴 어떤 영화적인 사건을 기대하게 되는데, 최대의 사건이란 집을 비운 사이에 강아지가 시를 써둔 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이다. 복사해두지 않아서 복구할 수 없게 된 시 노트 사망 사건이 시처럼 잔잔한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다시 돌아온 월요일, 패터슨은 늘 점심을 먹고 시를 쓰던 폭포 앞 벤치에 앉아있다. 노트 없이 울적한 기분으로. 그때 한 일본인이 다가와서 옆에 앉아도 되냐고 하고는 패터슨 옆에 앉는다.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시인이었고, 이 도시 패터슨 태생의 시인, 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좋아해서 여행 왔다고 말한다. 두 시인은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일본인 시인은 떠나면서 노트를 한 권 선물로 준다.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는 말을 남기며. 노트 한 권 들고 시냇가 벤치에 나가 앉고 싶어지는 한 편의 같은 영화였다.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힘


 이 영화를 보고 백업해 두지 않은 중요한 자료들을 외장하드에 백업하는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

 이십여 년 전 웹디자이너로 일할 때,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틈틈이 글을 썼다. 수년간 쓴 글들이 꽤 쌓였었는데 백업해두지도 않은 채 해킹을 당해서 하루아침에 날려먹은 적이 있다. 마침 회사 일도 복잡한 문제가 생겨서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수년간의 노력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재난이 되었다. 너무나 원통한 일인데, 그때는 그 상실의 분노를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노력이 무너지는 일을 많이 겪음으로 인해서 대항할 의지를 상실한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 어찌 됐건 텅 빈 페이지에서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페터슨 속 일본 시인이 말한 '텅 빈 페이지의 가능성'을 믿고 또 믿으면서.

 

 그 홈페이지를 해킹당해서 잃어버린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이제 그 홈페이지의 존재가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아득해졌을 무렵, 홈페이지 글을 오랫동안 읽었다는 한 독자에게서 메일이 왔다. 웹상에서 우연히 연락처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안부를 해본다고 하면서. 홈페이지가 갑자기 사라져서 섭섭했다고 하면서. 우연히 날아든 한통의 메일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뒤늦게 작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잃어버린 홈페이지의 기억을 되찾아주고 '작가님'이라고 불러주는 단 한 명의 독자를 만난 것은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다가왔다.

 세상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우리를 울적하게 만들지만 또한 세상은 이후에 우연한 선물로 보상해 준다.

 패터슨의 벤치에 앉은 일본인 시인이 건낸 노트처럼, 수년 전 홈페이지 독자로부터 날아든 한통의 안부 편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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