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재미있는 꿈을 꾸었다. 풍채가 좋은 선비가 붓을 들고 글을 쓰고 있는데, 뭔가가 잘 안 풀리는 듯이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앞에 앉아있던 하인이 도와드리고 싶은데 자신의 신분 때문에 감히 붓을 들 수 없다고 말했다.
선비도 하인도 나다. 글을 쓰고자 하는 풍채가 좋은 사람도 나고, 선비가 어려워하는 부분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인도 나다. 하인이 자신의 신분 때문에 어려워하고 있는데, 그 신분이란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생각된다. '네가 할 수 있겠어?' 고질적인 내 안의 의심이다. 2023년은 신분제 사회가 아니다. 우리의 유기체는 높고 낮음이 없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면 하면 된다. 주춤거리며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 안의 하인에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하인에게 붓을 들게 하라.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수년 전에 작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 때, 그런 결심을 한 나를 격려하는 선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였고, 이 책은 지금도 글쓰기 동력이 약해질 때마다 곁에 두고 힘을 얻는 오래된 글쓰기 선생님이자 동료다.
'자신의 느낌을 믿어라! 자신이 경험한 인생을 신뢰하라! 뼛속까지내려가서 내면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어라! 지금 이 순간의 것을 잡으라! 조절하지 말라! 살아 있으라! 제일 아끼던 만년필은 온데간데없이보이지 않고, 고양이 새끼는 최근에 쓴 습작노트를 발기발기 찢고 있다. 그래도 또 다른 노트를 꺼내, 다른 만년필을 잡고, 쓰라, 그냥 쓰고, 또 쓰라. 세상의 한복판으로 긍정의 발걸음을 다시 한번떼어 놓아라. 혼돈에 빠진 인생의 한복판에 분명한 행동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그냥 쓰라. "그래! 좋아!"라고 외치고, 정신을 흔들어 깨우라. 살아 있으라. 쓰라. 그냥 쓰라.그냥 쓰기만 하라.'
본문 중에서 가져온 문장들이다.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 이게 통할까?' 자의식의 안개가 뭉개 뭉개 피어올라 처음의 명료한 결의를 가둘 때, 나탈리 골드버그의 강력한 메시지는 일거에 뇌안개를 걷어내고 산뜻한 세상의 색채를 보게 한다.
천 개의 고원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자의식 과잉을 해체시키는 한 바가지의 찬물이라면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은 시간이 가면서 초심을 흐릿하게 만드는 엔트로피조차 긍정하게 만드는 마술적인 힘을 충전시킨다. 저자들의 발명품, 리좀 개념을 다시 읽으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도 새롭게 생성할 수 있는 생명력에 접속한다.
무언가가 준비되어야 할 수 있고, 언젠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자의식이 신체를 무겁게 만들고 불안을 조장하고 불행한 감정을 만들어 낸다. 언젠가, 무언가를 위한다는 자의식의 무게를 떨쳐버리고 언제 어디서든 눈앞에 있는 것을 붙잡으라고 말한다. 가벼워지고 작아져서 무엇으로든 되기(becoming)로 기뻐하라고 말한다. 어렵고 무거운 학문으로 여겨지던 철학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다반사를 새로운 각도로 보게 하는 수정 구슬처럼 재미있게 다가왔다.
리좀, 다양체, 기관 없는 신체, 얼굴성, 도주선, 전쟁기계, 리토르넬로, 유목론, 되기......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철학적 개념들은 매우 난해하지만 하나의 개념이 나의 삶의 경험과 접속될 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스쳐 지나가지만 내 안의 인과 외부의 연이 닿아서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