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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Nov 20. 2023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읽으면서

 

사려 깊은 글쓰기 상담 선생님


 어릴 적부터 일기와 편지를 비롯한 신변잡기적인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꾸준히 써왔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다. 글쓰기 수업을 제대로 받아보고 싶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는 했지만 왠지 탐탁지가 않아서 글쓰기 책을 사보면서 혼자 쓰고 있다. 그동안 많은 유명 작가들의 글쓰기 관련 책을 읽어왔는데, 지금 읽고 있는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혼자 쓰다가 주저한다면''일단 써보고자 한다면''섬세하게 쓰고 싶다면''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네 개의 챕터에 의문문으로 이루어진 마흔여덟 개의 글이 실려있는데 한 꼭지, 한 꼭지, 한 문장, 한 문장... 내가 품고 있는 질문에 꼭 필요한 답을 해주는 것 같아 행복한 마음으로 읽고 있다. 보통의 책 읽는 속도보다 천천히 느긋하게 읽고 싶은 책이다. 천천히 느긋하게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의 에피소드마다 떠오르는 장면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힘


 은유 작가님에게 한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라고 물은 대목이 있다.(16쪽) 

 작가님은 '다 큰 어른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앞으로도 ㅇㅇ고등학교 학생들과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답변하셨다고 한다.


 진심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그걸 또 성실하게 세상에 전달하는 사람, 더 많은 고통과 기쁨에 연루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싶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사랑받는 사람의 얼굴을 갖고 싶다. (......)그래서 나는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 듣는 사람, 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즉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17쪽)


 전율을 느낀 문단이었다. 성실, 전달, 고통, 기쁨, 인간다움, 얼굴, 사랑의 능력, 듣는 사람, 나누는 사람, 쓰는 사람...... 단어 하나하나가 나의 내밀한 욕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을 위한 공부


 코로나 펜데믹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기 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3년 정도 공부 모임을 했다. 시작은 이러했다. 신분석을 받으면서 심리학을 비롯한 철학, 신학, 문학, 예술, 뇌과학 등 전박적인 기초 학문을 두루 공부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느끼게 되면서 나를 알기 위해서 세상을 알아야만 했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는 인생의 한가운데 어두운 숲 속에서 멈춰 섰을 때,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자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도 시간이 날 때 도서관을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도 좋았지만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가진 질서 정연한 성스러움을 무엇보다도 사랑했다. 세파에 흔들리다가 모처럼 도서관을 찾으면 시간이 흘러도 한결같은 어떤 나의 정신, 말하자면 고결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인문학적인 소양을 갈고닦는 것이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면, 신분석을 받고 무너져 내린 내 삶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의식하게 된 학문은 풍요로움이 아니라 생존 키트와 같은 것이었다.



숨이 가쁜 사람들


 공부를 계속 이어가고 보다 더 즐겁게, 의미 있게, 생산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과거에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 선생님들과 공부 모임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자신이 쓴 글을 읽는 방식의 이 모임을 통해서 같이 읽고 쓰고 말하는 공부 모임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점도 말할 수 없이 많지만 오늘은 서두에서 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연결되는 내용을 말하려고 한다. 공부 모임에 오신 선생님 중에 기억에 남는 한 분은 책을 읽을 때 띄어 쓴 자간을 전혀 쉬지 않고 쉼 없이 읽었다. 듣는 사람들이 숨이 가빴다. 그분은 말을 할 때도 자신의 말이 요약이 잘 되지 않아서 말이 길어지고 말을 할수록 점점 더 빨라졌다. 나중에 자신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쏟기도 했는데, 숨이 가쁘게 말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말을 누군가가 자를까 봐 자기 말을 다 하기 위해서 말을 빨리 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심리 상담을 받은 경험으로 그분의 상태에 대한 문제 의식을 조금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문가가 아니므로 공부모임을 이끄는 정도 이상의 솔루션을 드릴 수는 없었다.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들었고, 다음 모임 때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집안에 사정이 생겨서 모임을 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이 선생님에 대한 특별한 기억으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 빠르거나 느리거나,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등 언어로 드러나는 마음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충분히 일희일비해야 진실로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


 중년에 들어서 심리적인 문제를 자각하고 직면하기 전에 나는 말이 없고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아니,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심지어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시절에 한 학부모에게 받은 편지에는 '말이 없고 진중한 모습에 믿음이 가고 바위 같고 소나무 같은 선생님'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당시에는 나조차도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런 나의 모습 속에 '잠재된 교만'이 깃들어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모름으로써 저지르는 무지, 어두움의 죄다.


 정신분석을 받고 나의 양보, 배려, 인내, 침묵, 사려 깊음, 속이 깊어 보이는 모습 등등이 억압, 순응, 수동적 공격, 거짓, 가짜, 비열함이란 걸 알았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고, 너무 오래 참아왔던 것이었다. 말의 문이 열리자 나는 결코 바위나 소나무가 아니었다. 자갈돌과 들풀같이 작고 가벼운 내 영혼을 만나는 것은 자유를 느끼게 했다. 바위나 소나무로써 존경을 받을 때는 행복처럼 보이는 불행 속에 살았다면, 자갈이나 들풀로 사는 삶은 불행처럼 보이는 행복이었다. 예전에 쓴 일기를 보면서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다짐의 말이 너무 많아서 놀란적이 있다. 그 말은 그만큼 많이 일희일비했다는 말이고, 일희일비를 억압했다는 말이다. 일희일비를 했어야 했다. 충분히.


 실수를 하고 얼굴을 붉히고 거절도 하고 싸움도 하면서 할 말을 하면서 사는 방법을 배웠다. 호텔에서 룸메이드로 일하면서, 분식집에서 김밥과 순대를 썰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분식집, 미용실 새벽 마감청소를 하러 다니면서 참는 것과 견디는 것의 차이를 배워나갔다. 참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상황 속에 있는 것이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쌓이고 쌓여서 어느 시점에서 폭발하게 되는 암덩어리와 같은 무서운 것이다. 견디는 것은 참는 것과는 다르다. 스스로 나의 감정을 알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아프게 하는 든 말들을 견디는 것은 더 큰 힘이 필요한 일이다. 힘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고 참게 된다. 참으면 안 된다. 참으면 병이 된다. 힘든 말을 견뎌내는 힘이 생길 때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고 계속 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은유 작가님은 나의 이 절절한 외침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으셨다.


  좋은 평가든 나쁜 평가든 이런저런 말이 지나간, 그래서 말들의 풍파를 겪어낸 글을 쓰는 단단한 몸을 얻는 거죠. 쓰는 존재로서 체급을 기르는 겁니다. 그러니 일희일비를 충분히 하셔서 글 쓰는 신체를 단련하시길 바랍니다. 
(66쪽)



진실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옛날 친구들과 모처럼 만나면 아직도 나 혼자 말이 너무 많다. 지난번 친구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톡으로 '오늘도 내 토크 점유율이 너무 높았다.'라고 미안한 마음을 표한 적이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속 깊은 친구들은 자기들은 늘 같은 일상이라서 할 말이 없다면서 다이내믹한 내 삶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며 긴 시간 들어주곤 한다. 다시 만날 다음 모임에서는 조금이라도 말 수를 줄이고 경청하는 노력을 하려고 한다.


 은유 작가와 나의 공통점이 참 많아서 반가운 읽기를 하면서 놀라울 만큼 일치되는 대목이 바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은유 작가가 쓴 글처럼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듣는 사람, 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런저런 복잡다단한 인생사가 연결되면서 글이 길어졌다. 처음의 기획과는 달리 곁길로 샜다가 다시 '듣는 사람'으로 돌아오는 길이 조금 힘들었는데, 마침 은유 작가는 또 한 번의 사려 깊은 글로 유쾌하게 격려한다.


 인생사가 그렇듯이 글쓰기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여행하다가 잘못 들어선 길에서 색다른 풍경을 보게 되듯이, 한 편의 글이 옆길로 새서 다른 지점에 도달한다는 건 그 글을 쓰지 않았다면 몰랐을 자신의 생각을 만난다는 의미이니까요.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시고요. 곁길로 새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오늘도 글 한 편 쓰시길 바랍니다.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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