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② | 옷 갈아입히기
코로나 팬데믹의 습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 칼 융의 <기억 꿈 사상>을 읽고 있었다.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 둬 보자.’
칼 융의 독백은 정확하게 그 당시의 내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칼 융은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을 때의 성공적인 경험을 기술했다. 그렇게 하여 칼 융이 얻은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칼 융은 벽돌로 집 짓는 놀이에 열중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감격스럽게 떠올린다.
‘아하, 여기에 삶이 있구나!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게 결여되어 있는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질문했고, 그 시절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 그곳으로 돌아가 아이의 놀이를 하며 아이의 삶을 한 번 더 살아보기를 택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운명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한다. 칼 융은 호숫가에서 돌들을 찾아 모아서 작은 집들과 성과 마을 전체를 짓기에 이른다. 그 진지한 놀이를 통해 자신의 신화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인생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돌과 접촉함으로써 자신을 다시금 안정시키고 도움을 얻었다고 했다.
그 내용을 읽었을 때 나에게도 “아하!” 체험이 왔다. 칼 융이 어린 시절의 놀이를 떠올리고 실행해 옮겼듯이 나도 같은 체험의 일부를 이미 하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코로나 팬데믹의 습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크나큰 체념과 불안 속에서 아이가 만든 것 같은 종이 놀이나 스톱모션 영상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큰 낙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 생각은 곧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실행력을 불러왔다. 칼 융이 돌을 찾았듯이 종이를 찾았다. 색연필과 가위, 풀, 카메라와 조명, 편집 프로그램, 유튜브 계정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아이가 되어 즐겁게 그림을 그리고 촬영해서 첫 작품을 만들 때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세상에 내 보내려고 생각하니 주춤거려졌다. ‘이렇게 못 만든 걸 올리면 욕먹지는 않을까?’
조심스럽다가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종이 놀이를 다시 하면서 이미 마음의 안정과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애초의 목적이었던 구독자 수나 조회수, 좋아요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갔다. 많은 시간과 작업량이 소요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고되었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단함은 실력 향상이라는 다음을 데려왔다. 꾸준한 작업으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단지 취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구독자 수가 늘지 않자 또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1년 동안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해보고 다음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코로나 팬데믹의 암울한 시절을 종이 놀이에 푹 빠져서 보냈다.
스스로 약속한 1년이 되었고, 정신 승리는 했을지언정 수익화는 아득하게 먼 실패라는 냉혹한 결과를 인정해야만 했다. 칼 융이 어린 시절의 놀이로 자신의 신화의 길을 찾았다지만 그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난했다. 칼 융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을까? 체념 속에서 시냇가를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의 유튜브 화면에서 ‘마음속에서 기뻐 어쩔 줄 모르고 꿈틀거리는 것’(앙리 보스코<아이와 강>)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내가 체념하고 있는 대상인 종이 스톱모션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상황에서 즐겁게 보았던 스톱모션 채널에서 애니메이터를 모집한다는 채용 공고였다. 마감 날짜를 확인하자 아직 마감일이 남아 있었다. 응모 요강대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이것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생각으로 준비했던 공모전들과 그것들을 모아서 수익화를 시도했으나 당시로 실패한 유튜브 채널이 오롯이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마치 지난 1년간의 노력이 이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작업이었던 것처럼.
1차 서류심사, 2차 포트폴리오 심사, 3차 영상 인터뷰를 통과하고 취업에 성공했다. 어둠 속에서 바라본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소개하는 영상은 어린 시절에 제일 많이 했던 놀이인 종이 인형 옷 갈아입히기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미야자키 하야오)에 나오는 모자 가게를 조합해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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