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틱> 9화. 피카소 '아비뇽의 아가씨들'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라는 제목 아래 파블로 피카소는 1907년 다음의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헤르메스적 사상의 증언을 "해석"하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다음의 숙고를 위한 몇몇 시사점만을 여기서 취하고자 한다.
이 군상(群像)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그림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는 두 아가씨의 낯설게 표현된 얼굴들이다. 다른 모든 조형 계기는 아직 서양의 그림 전통의 전체도(圖)에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도처에서 이미 거부, 부수기, 보다 강한 빛을 비추기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틀 안에" 머물고 있어서 신체의 아름다운 형상과 얼굴이 드러나는 모습을 아직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기본적 형상들의 해체와 복잡하게 얽힘 그리고 입체상(像)의 깨짐이 진행되어 결국은 어떤 민속박물관에서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악마적인 가면들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 악마적인 가면들에는 오른쪽에 있는 형상들의 그로테스크한 동작 모습도 대응한다. 마치 공간의 한 파편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전면 중앙에는 과일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배치는 학교에서 전수되는 전통 형식들에 그나마 가장 부합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러한 가면들이고, 어째서 이러한 깨뜨림과 쪼갬인가?
이 그림은 어떤 '건너감'을 보여준다. 우리가 보기엔 이것이 이 그림의 주된 진술이다. 이 건너감의 시작과 종결은 대충 왼쪽과 오른쪽 구석에 있는 인물의 얼굴로써 고시되고 있다. 그것은 고전적인 형식에서 한 낯선 표현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물론 후자는 1907년 당시에는 이 건너감을 이미 거쳐 온 우리 시대에서보다 더욱 생소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프리카 목조(木彫)에서 따온 오른쪽 얼굴들의 기본형태들은 마치 어떤 다른 세계로부터 보는 것처럼 장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들에게 대응하는 것은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들] 망아적인 동작과 입체파적 요소들에 의해 보다 강화된 유체(有體)적인 몸의 형태이다. (왼쪽에 있는 세 형상에서는 아직 억제되거나 은폐되거나 억압되고 있는) 어떤 악마적인 것이 표현되고 있다. 이제 어떤 내적 상태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단지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춤 가면에서 아마 제일 먼저 알아볼 수 있었던) 악마적이고 활력적인 것만을 보는 것은 잘못이리라.
이 그림은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표현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두 형상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틀림없이, 이러한 조상(彫像)들과 형상들도 "아름다우며" 서슴없이 아비뇽의 아가씨들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미의 전형과 유럽의 미의 전형이 여기서, 말하자면 실험적으로 만나게 되고 어떤 특정한 배경 구조에 의해 그 구성이 가능해진다. 배경 구조는 각 형상에게 각기 고유한 환경세계를 떼어 내주고 그럼으로써 형상들 사이를 같음(즉 공간, 시간, 조형원리의 통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같지 않음(즉 각기 다른 근본구조 속에 옮겨 놓음)을 통해서 매개한다.
중요한 것은 오른쪽에 있는 다른 동작 유형이다. 그것은 개별 국면들로 분해된 다음 다시 하나의 새로운 전체로 합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 시각적 단위에서 다른 시각적 단위로 건너갈 때마다 매번 눈에게 도약을 요구하는 일련의 형상이다. 동작의 추이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미끄러짐이 아니라 도약이며 아프리카의 춤을 연상시킨다. 이 그림은 말하자면 잘게 부순 다음 잘게 부서진 고유성들을 가지고 새로운 종류의 통일성을 만드는 그림이다. 동시대인들이 단지 차이나 대립만을 볼 수 있었던 곳에 하나의 통일성을 수립하고자 한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20세기 벽두에 일어나기 시작하여 조형 예술로부터 모든 문화 영역으로 퍼져나간 유럽의 한 운동을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운동에는 고전주의와 인상주의에 대항하며 전개된 회화만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파, 초현실주의, 점묘주의, 다다이즘 그리고 (동시대인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에게 닫혀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모든 주의(主義)도 속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단초들을 시도하며 잡을 수 없는 어떤 원리를 잡고자 했다. 그것은 헤르메스적인 것의 원리이다. 이러한 전개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헤르메틱이 현대 문화의 본래 관심이라는 것, 그리고 헤르메스적 원리를 잡지 못하면 현대도 잡지(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이래 끊임없이 새로운 반대세계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서양의 전통과 (마지막으로는 스스로를 "시민"사회로 이해한) 사회에 반대하였는데, 방랑생활의 세계, 유겐트 양식과 청년운동의 세계, 블랙 파워의 세계와 (1970년 전후의 학생운동과 80년대의 국제적 청년운동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헤르메스적 저항 운동들이 그것이다. 또한 동양 문화의 명상 운동들도 -예컨대 요가 운동, 선(禪) 운동 등 여러 운동- 헤르메스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헤르메스적 운동들이 유럽 사회의 해석학적인 세계와 충돌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근본적인 부정합성이 드러났으며, 헤르메스적인 것은 언제나 다시 자신을 상실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로부터 헤르메스적인 것은 가망 없는 사태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헤르메스적인 것에서 부족한 것은 일시적인 박동들을 넘어 그것에게 한 진정한 문화 형식의 원리, 아니 어쩌면 한 시대 전체의 원리가 될 자격을 부여하는 밀도와 자기 확신을 가져다줄 수 있는 자의식이다.
그렇다면 헤르메스적 원리란 무엇일까? 헤르메스적 원리와 해석학의 원리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해석학적 원리가 이해와 이해가능성에 온 주의력을 기울인다면, 헤르메스적 원리는 비(非) 이해와 불가능성에 온 주의력을 기울인다. 전자가 전적으로 개방성과 공공성을 향해 매진한다면, 후자는 폐쇄성과 고유성을 향해 매진한다. 전자가 섬과 지속을 목표로 한다면, 후자는 소멸과 무상함을 목표로 한다. 사람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파악하건, 그 둘은 항상 완벽한 대립 속에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은 하나의 동일한 뿌리에서, 즉 신들과 인간들 사이이 매개자의 이름인 "헤르메스"에게서 유래한다. 헤르메스적 원리가 이 신성(神性)의 근본경험으로부터 해명될 수 있을까?
이 글은 H. 롬바흐 지음. 전동진 옮김. 서광사.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현실에 관한 사유의 전환: 철학적 헤르메틱> 1장. 헤르메스적 원리 5.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이 연재 브런치북 <헤르메틱>은 헤르메틱에 대한 필사로 이어가면서 헤르메틱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꾼 수많은 꿈들 중 유일하게 보인 신의 이름이다.
오랫동안 헤르메스라는 키워드로 찾아 헤매면서 헤르메틱이라는 정신적 지향, 작가적 고향에 도달했다.
헤르메틱은 어둠 속에서의 비상이다. 헤르메스적 근본 경험은 붕괴와 근원적 도약, 발견, 건너감이다.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찾아내고, 끝까지 살아 남으며, 스스로 힘을 갖는 존재 방식이다.
헤르메틱에 대해서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는 H. 롬바흐의 저서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현실에 관한 사유의 전환: 철학적 헤르메틱>의 내용을 필사. 요약하는 것으로 '존재의 헤르메틱', '예술 작품의 헤르메틱'에 대해 소개하고 정리해 나가려고 한다.
이 정리본이 차후에 어떤 형상으로 드러나든 그 뼈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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