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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0. 2024

어째서 신인가?

-<헤르메틱> 10화. 



이 글은 H. 롬바흐 지음. 전동진 옮김. 서광사.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현실에 관한 사유의 전환: 철학적 헤르메틱> 2장. 헤르메스 1. 어째서 신인가?(47-52쪽)를 필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헤르메틱에서 이제 힘 있게 새로운 형성을 요구하고 있는 한 잃어버린 현존재 방식을 구한다. 

호메로스의 시대에 헤르메틱은 살아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헤르메틱을 헤르메스 신의 형태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도, 우리가 새로이 획득하고자 하는 현존재 방식을 위장됨과 왜곡됨이 없이 재구성하려면, 다시 헤르메스 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이면 헤르메스인가? 아니, 어째서 신인가? 어때서 도대체 신들인가? 예전의 신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인간 현존재는 언제나 삶의 한 근본 윤곽을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하다. 

이 근본 윤곽 내에서 자연과 역사, 진리와 가치, 근원과 목표에 관한 가장 중요한 근본 태제들이 하나의 정합적인 얼개로 결합된다. 즉 인간다운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재들을 포함하는 기본적인 삶과 실존의 학(가르침)으로 결합된다. 이 근본 테제들과 보는 방식들, 감각 습관들, 삶의 지침들이 함께 어우러져 형성하는 얼개는 정합성에 의해 효력을 유지하며, 인간이 그의 생활세계와 더불어 훌륭한 조화를 이루게 한다. 

다시 말해 그 얼개는 의미로 충만하고 의기 충천하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이 기반구조는 고대인들에게 이론으로서, 즉 개념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직관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어째서 하필이면 신인가?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의 근본형태를 자기 자신에게서 자아낼 수 없었으며, 운 좋은 발견을 통하여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 정합적인 근본경험에서 개현(開顯)되는 삶의 방식은 이전에 주어졌던 어떠한 욕구 구조에도 대응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충족 가능성들과 더불어 새로운 욕구 구조를, 즉 고양된 현존재를 -바로 인간다운 삶을- 비로소 개현 한다. 



삶의 근본방식은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현실 전체에서, 한 지방의 정신에서, 온 얼개의 고양시키는 힘에서 발견되었다. 즉 신적인 것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신인 것이다.



신은 근본경험의 담지자이며, 밝혀지고 고양된 차원에서의 삶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발견을 가져다주는 자이다. 신들이 없었다면 인간다움의 척도가 없었을 것이고, 인간성이 인간들 사이에 역사적으로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서 인간은 높은 곳에 신전을 지어 신에게 바쳤다. 신전은 멀리서도 보이는 역사적 고양의 상징이고, 분명한 근본 윤곽(평면도) 위에 세워진 잘 짜여진 삶의 밝혀진 질서의 상징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전 건축의 의미를 발견한다. 신전 건축은 (그 현존재적 근본 윤곽을 단지 당장의 목숨 이어가기로부터가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근원으로부터 얻었으며 그 역사를 자각하고 있는) 한 생활공동체의 고양된 삶의 가시적인 상징적 형상이다.



신들의 형상은 각기 하나의 위대한 현존재적 봉인이다. 하나의 수수께끼이자 하나의 해결이다. 그것은 자체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하나의 존재기투인데, 의미 있고 완성된 삶을 위해서 필수적인 모든 지침이 이 존재기투로부터 얻어진다. 신들은 개별자에 그려 넣어진 전체성의 모습들이다. 전체를 감지하고 만나고자 하는 자는 이 흔적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신의 신성(神性)은 단순히 외관이 아니라, 모든 개별자의 지평 위에 떠올라 모든 것을 밝게 비추는 전체의 "광휘"이다.



헤르메스는 하나의 신이다. 아폴론처럼 하나의 신이다. 제우스와 헤라, 아테나와 아레스, 호루스, 아후라 마츠다, 보탄, 야훼, 알라,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등장할 때부터 인간을 동반해 온 수많은 모든 신들과 같이 하나의 신이다. 비록 신은 각기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성된 진리이고 다른 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두말할 것도 없이 "질투가 심하기는" 하지만, 모든 신은 서로 교류할 수도 있다. 신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곳에선 상이한 생활양식을 가진 민족들도 서로 교류하고 서로 자극을 주면서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신들이 거주하는 천계에서의 사건은 원래 사람들과 민족들의 (삶에 관한) 근본진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풍부한 관계 맺음의 사건을 반영했으며, 아직 세계 평화를 위한 기구가 없었던 시절, 신들의 향연은 인간들 사이의 평화의 축제에 대한 가시적이고 설득력 있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한 신적인 사건에 여러 신들이 결부되어 있는 경우, 이는 씨족의 영웅들 및 종족의 신들과 더불어 하나의 생활공동체로, 하나의 "민족"으로 결합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신들의 진리는 아직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완전히 등장하지조차 않았다. 그것이 아직 이론(異論 )의 여지없이 통용될 수 있었던 시대에도 그것은 완전히 충족되지 않았었다. 실로 그것은 많은 기형을 산출했고 인간의 인간성을 손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신들의 밤맞이와 (영원한 평화를 정착시켜야 했지만 오히려 더욱 비인간적인 전쟁만을 야기한) 모든 이성체계의 좌초라는 긴 시기를 거친 지금, (보다 생동적이고 형상적이며 세분화된, 그럼에도 타협 이상의 것인, 즉 근본진리들을 참으로 마음껏 살리는) 민족들의 공동체를 추구할 준비가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근본 진리들이 반드시 신으로 표상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들에게서 중요하고 대신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보는 것은 불가피하다.



신들은 죽을 수 없으며, 또한 죽어서도 안 된다.
C. G. 융, <무의식의 심리학> 




'처녀의 집'이라는 뜻의 '파르테논'은 '아테나 파르테노스', 즉 처녀 여선 아테나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아테네를 둘러싼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 모인 올림포스 12 신의 재판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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