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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n 26. 2024

헤르메틱과 해석학

-<헤르메틱> 8화. 



이 글은 H. 롬바흐 지음. 전동진 옮김. 서광사.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현실에 관한 사유의 전환: 철학적 헤르메틱> 1장. 헤르메스적 원리 4. 헤르메틱과 해석학을 필사한 것입니다.



낭만파 화가 룽에(Runge)는 아마도 다양한 햇빛을 표현할 가능성들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아침의 빛은 단지 아직 완전히 빛을 발하지 않은 낮의 절반 밝음이 아니라 고유한 빛, 다른 빛이다. 

낮이 되면 아침의 빛은 사라진다. 그래서 낮은 아침의 밤이라고 말하는 것도 훌륭한 의미를 갖는다. 

빛에 대해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침의 빛을 낮의 빛보다 높이 평가한다. 아니 그에게는 아침의 빛보다도 높고 넓은 밤의 빛이 존재한다. 하지만 낮의 빛은 높지도 넓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강하고 피상적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전혀 빛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헤르메틱의 시각일까?



서양의 역사는 처음부터 어떤 특정한 빛과 존재의 사유의 지배를 받아 왔다. 그런데 이 사유는 자신이 단지 아주 특정한 제한된 빛과 존재의 사유일 수 있다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빛의 성격이 사라지는 어떤 빛이 있으며 존재의 의미가 침몰해 버리는 어떤 존재가 있다.



이해를 지향하는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자가 인식됨으로부터 해석된다. 모든 존재자는 본성적으로 시현(示現)이며, 비은폐성의 한 영역인 일반적 존재의 영역에서 나타난다. 비은폐성은 존재의 의미이다. 인간의 인식은 이 의미를 비록 유한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성취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최고의 의미에 있어서 정당화하고 요구한다. 이정당화는 진리라는 표제 아래 파악된다. 진리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초고의 의무들을 획득하며 자신의 본질과 모든 다른 사물의 본질 사이에 (더 이상 단지 단계적으로 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차이성의 근거를 획득한다. 이해의 세계는 모든 사물 위로 자신을 높이는 인간의 세계, 즉 인간주의적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주의적 세계가 인간적일 수 있을까?



이해의 세계는 낮의 세계이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단지 제한된 현실에 불과한 밤조차도 그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있어서 백일하에 드러날 수 있다. 이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근본적인 관련들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보통 수단들을 가지고서는 억압되지 않는 반대되는 생각들이 눈에 띈다. 밤이 낮보다 더 근원적이지 않은가? 빛이 빛일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보다 광대한 어둠으로부터 빛나 오르는 것이어야만 하지 않는가? 모든 현실은, 그의 공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든 그보다 더욱 엄청난 무(無)의 공간 안에 삽입되어 있으며, 존재는 모든 것에 선행하는 무에 대항하면서 자신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경험과 인식은 무지(無知)라는 배경에 묶여 있으며, 그 앞에서야 비로소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것에 있어서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빛과 낮, 밝음과 인식이 더 이상 그 배후가 없는 최종적인 은폐성에 묶여 있는 것이라면 인간은 이 근본적인 구속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불가해성(개념으로 파악될 수 없음)에 관한 앎을- 이 앎은 구속력 없는 유한성 고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고 회의 이상의 것이다 -일깨우고 유지시켜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빛과 존재보다 근원적인 것은 밤과 무()이다. 이것은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광대하다. 물론 낮을 자신의 테두리와 가능조건으로서 전제하는 어둠 현상도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낮은 그 안에서 그가 빛나 오를 수 있는 보다 깊고 보다 압도적인 어떤 다른 어둠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밤과 밤이 구별되고 어둠과 어둠이 구별된다. 즉 밤과 어둠은 한 번은 파생적 형태로, 한 번은 근본적 형태로 존재한다. 유럽 전통의 낮 사유는 단지 어둠과 무의 이차적인 형태만 다루어 왔지 일차적인 형태를 다룬 적이 없다. 이 밤과 무의 일차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형태가 헤르메틱의 고향인 것이다. 



인식과 드러냄의 모든 형식이 이해라 불리고 이해의 학문은 해석학이라 불린다면 반대 생각으로부터 은폐성의 보호가 불가피해진다. 은폐성의 보호는 비록 모든 학(學) 너머에 있는 것을 테마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신도 "학"이라 할 수 있다. 은폐성의 "학"은 역사적으로 거듭 헤르메틱의 이름 아래 시도되어 왔다. 예전엔 사람들이 거듭해서 -"비교(秘敎)"에서 "마술"과 "점성술"에서, "연금술"과 "점복술" 그리고 갖가지 "비학(柲學, 柲術)"에서 -근본적인 헤르메틱을 구했지만 진정한 헤르메스적 원리를 알지 못했기에 무가치한 비밀주의나 온갖 종류의 속임수가 가치 있는 사상 가운데 자주 뒤섞였고, 쓸 만한 것들이 별로 생기지 않았으며 헤르메틱은 악평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두하는 서양의 자연과학은 헤르메스적 부문들을 쉽사리 억압할 수 있었다. 물론 쓸모 있는 헤르메틱의 형태로 평형추(반대추)가 생기지 않은 것이 과학과 과학에 정초해 있는 기술에 무제한적인 이익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언제나 "과학비판"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것 스스로가 아직 과학적 사유의 타당성 및 설명 영역 내에 머물러 있었으며, 설명하고 증명하는 이해에 대한 진지한 대안이 아니었다. 헤르메스적 경험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단초는 우리의 염원에도 불고하고 오늘날까지도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미 관련된 명칭들에서 우리는 뚜렷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해석학(Hermeneutik)이라는 낱말의 근저에 놓여 있는 그리스어 hermeneuein(라틴어로는 interpretari)은 설명, 언표, 서술, 해석, 통역을 의미한다. Ho hermeneus는 포고자, 사자(使者), 군사(軍使), (일반 사람들에 대해 진리를 담당하는) 해석하고 설명하는 자이다. He hemeneuike techne는 해석자들이 사용하는 해석술이다. 아마도 이 명칭들은 모두 헤르메스(Hermes) 에로 소급될 것이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사자로서, 그리고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매개자로서 알려진 신의 이름이다. 하지만 헤르메스에게서 직접 유래하는 "학"은 해석학이 아니라 헤르메틱(Hermetik)이다. 해석학이 개방성과 비은폐성의 "학"이라면 헤르메틱은 폐쇄성의 "학"이다.



이 모순은 아주 기묘하게 느껴진다. 기원적으로는 근친적인 부문들이 목표설정에 있어서는 완전히 상반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기묘한 관계는 신들의 형상에서 반복된다. 왜냐하면 폐쇄성의 신인 헤르메스는 그리스의 신들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가장 빛나는 아폴론의 이복동생이자 친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원적으로 사유된 헤르메틱의 깊은 곳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면 드러냄과 숨김, 빛과 어둠, 이해할 수 있음과 파악할 수 없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진술들이 들어 있는 그리스 신화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사유되지 않은 헤르메틱의 비밀 속으로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미 어떤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필립 오토 룽에 (Philipp Otto Runge) "빛의 백합", 1809 - 쾰른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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