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라이너> 13화. feat. 장기하
카페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자주 이용하는 이 무인카페는 테이블이 네 개 있는 열 평 남짓한 공간이라 누군가가 말을 하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 나와 덩치가 큰 젊은 남성, 두 명이 있는 가운데 그 남성이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무시하고 독서삼매를 이어가려 했으나 엿들을 수밖에 없는 사안이 발동했고, 책을 덮고 눈을 지그시 감고 팔짱을 낀채 사색에 잠긴 척 자세를 잡고 엿듣기 삼매에 들었다.
요약하면 간단하다. 이틀 뒤에 군대 가는데 여자 친구가 안 기다려주겠다고 한 모양이었고, 지금까지 당연히 기다려주는 걸로 알았다가 이제야 정을 끊겠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통보에 덩치가 산만한 이 남성은 거의 실신 직전으로 오열하며 스마트폰에 매달렸고, 그 모습이 가련하기 그지없도다.
'기다려 준다고 했잖아.', '기다려 준다고 했잖아'를 반복하며 목놓아 우는 그 청년의 절규는 이적의 노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을 연상시켰다.
다시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
잠깐이면 될 거라고 했잖아
여기 서 있으라 말했었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물끄러미 선 채 해가 저물고
웅크리고 앉아 밤이 깊어도
결국 너는 나타나지 않잖아
거짓말, 음, 거짓말
우우, 그대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우우, 그대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우우우우우, 찬 바람에 길은 얼어붙고
우우우우우, 나도 새하얗게 얼어버렸네
내겐 잘못이 없다고 했잖아
나는 좋은 사람이라 했잖아
상처까지 안아준다 했잖아
거짓말, 거짓말, 음
다시 나는 홀로 남겨진 거고
모든 추억들은 버리는 거고
역시 나는 자격이 없는 거지
거짓말, 음
우우, 그대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우우, 그대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우우우우우, 찬 바람에 길은 얼어붙고
우우우우우, 나도 새하얗게 얼어버렸네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우우, 나나, 오오, 오오, 우우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차라리 잘됐다. 들어가서 통보받고 탈영하니 어쩌니 더 괴로왔을 텐데... 지금 이러는 여자가 어떻게 2년을 기다리겠니. 그만큼 사랑이 견고하지 못했으니 뭐 어쩌겠어. 목욕탕 가서 냉탕에 시원하게 들어갔다가 설렁탕이나 한 그릇 속 든든하게 사 먹고 잊어라. 확실한 건 군대 갔다 오면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좋은 여자 만난다."
한 삼만 원 쥐어주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전생과도 같이 아득한 삼십 년 전, 남자 친구 훈련소 문 앞에 따라갔던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벚꽃이 흩날리던 봄날이었고, 남자 친구는 벚나무 아래에서 나훈아의 사랑을 불러주며 지키지 못할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는 내 사랑아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에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데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잠시 라도 떨어져선 못 살 것 같은 내 사랑아
행여 당신 외로울 때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행여 당신 우울할 때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이 세상에 하나 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는 내 사랑아
얼싸안고 울어주고 싶은 아들내미 같은 청년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와 땡볕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아리따운 여성과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머리에는 새집을 지은채 자다가 끌려 나온 것 같은 외모의 남성이 레이다에 포착되었다. 그들은 필시 데이트를 하다가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았고, 여자는 화가 나서는 팔짱을 끼고 콧바람이 눈에 보일 정도로 씩씩거리고 있었고, 남자는 몹시 피곤하다는 듯이 하늘과 전봇대 사이 그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두 손을 얼굴에 가져가더니 마른 세수를 연거푸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르르 흐르는 아스팔트 위에서 저토록 감정을 발산하다간 실신할 것 같았다.
그들이 서있는 전봇대 옆, 24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로 쏙 들어갔다. 빠방한 에어컨과 알록달록 아이스크림들의 퍼레이드가 펼쳐지면서 선택장애 상황에 돌입했다.
바밤바, 벼볌벼, 배뱀배... 아이스크림들의 변주에 크게 놀랐다.
죠스바 두 개를 사서 아직도 대치하고 있는 바깥의 연인들에게 하나씩 쥐어주면서 날도 더운데 여기서 왜들 이러냐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마음 풀고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하고 싶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색깔 무지개 옷을 입은 아이스크림들이 소리쳤다.
'나를 데려가!', '나를 데려가!'
심한 내적 갈등을 일으키며 쇼케이스 앞을 수차례 왔다갔다 하다가 배배 꼬인 스크류바를 픽했다.
'0칼로리'라는 문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참, 옛날에는 남자 친구, 남편, 자식... 자기는 쏙 빼놓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업적을 자랑하는 친구들 말을 곧잘 들어줬는데, 이제는 짤 없다.
장기하 노래가 생각났다.
야!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어?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니가 가진 게 많겠니?
내가 가진 게 많겠니?
난 잘 모르겠지만
한 번 우리가 이렇게
한번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해보자고
너한테 십만원이 있고
나한테 백만원이 있어
그러면 상당히 너는 내가 부럽겠지
짜증나겠지 근데 입장을
한번 바꿔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고
나는 과연 니 덕분에 행복할까?
내가 더 많이 가져서 만족할까?
아니지
세상에는 천만원을 가진 놈도 있지
난 그놈을 부러워하는 거야
짜증나는 거야
누가 더 짜증날까
널까?
날까?
몰라 나는
근데 세상에는 말이야
부러움이란 거를 모르는 놈도 있거든
그게 누구냐면 바로 나야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어?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전혀
전혀
아 그게 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뭐
아니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게 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아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부러워지고
부러워지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고
자.자자.자 자랑을 하고
부부.부부부 부러워지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부러워지고 부러워지고
부러워지고 부러워지고
아주 뭐 너무 부러울 테니까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어?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어
괜찮어
난 잔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이 노래 제목처럼 젊음도, 커플도, 좋은 남편 자랑하는 여자도, 잘된 자식 자랑하는 여자도 부럽지가 않다.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자랑할 게 없으니까 부러울 것도 없다.
[MV] 장기하 (Chang Kiha) - 부럽지가 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