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라이너> 14화. 머그컵
<재생의 욕조> 진행 상황을 공유하면서 머그컵 소식을 올렸다.
사실 머그컵에 대해서 할 말이 참 많았는데 그 페이지에서 다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서 원라이너에서 하나의 토픽 '가정을 의심하라'로 다루고자 한다.
표지 그림이 인쇄된 머그컵을 갖고 싶다
머그컵은 하나의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머그컵에 대한 욕망이 점차 강해져서 처음에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흐릿해졌는데, 아마도 강가 이지성 대표가 나보다 더 머그컵을 갖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내가 자료조사를 맡았고, 판촉물이나 굿즈 웹사이트를 다니면서 적당한 디자인과 가격대를 물색했고 몇몇 업체를 선별했다. 이런 디자인의 머그컵에 이 그림 이미지를 넣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풀컬러 이미지 인쇄는 일자형 머그컵에만 가능합니다."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았다.
약간의 곡선도 허용되지 않는, 위에서 아래 바닥까지 일자로 떨어지는, 그야말로 판촉물 같은 디자인의 머그컵에만 인쇄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제공하는 컵의 세부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우리가 인쇄하고자 하는 수채화 그림으로는 이 방식 밖에 안된다고 하니, 하거나 안 하거나 선택의 여지밖에는 없어 보였다.
이지성 대표에게 내가 알아본 이 상황을 전달했을 때, 카톡으로 본인이 갖고 싶은 디자인 이미지를 마구 보냈다. 컵은 일자형이 아닌 둥근 디자인에, 손잡이는 두꺼웠으면 좋겠고, 이미지는 스타벅스 로고처럼 풀컬러 인쇄가 아닌 원톤 로고 디자인으로 하고, 컵 안과 밖이 색이 다른 투톤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업체에서 기술적으로 그렇게 안된다고 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속으로는 불만이 차올랐다. 불만의 목소리는 이랬다.
그 작업을 누가 할 건데?
풀컬러 수채화 그림을 로고로 만들려면 일러스트 작업을 해야 되고, 전문가가 한다 해도 내가 그린 그림 이미지대로 내 마음에 들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았고, 결국 그 작업은 내가 해야 된다는 결론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예산으로 스타벅스처럼 고급스러운 인쇄가 가능한 업체를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부터 머그컵은 예상에 없던 지출이었고, 현재 알아본 풀컬러인쇄가 가장 기본적인 가격이기 때문에 시도한 건데 갑자기 예산과 상관없이, 방법은 모르면서 본인이 갖고 싶은 디자인만 줄기차게 요구하니까 뭔가 모르게 화가 났다.
일단 생각해 보자고 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 차분하게 생각해 보았다.
왜 머그컵을 하려고 하지?
업체에서 그렇게만 가능하다고 하는 그 디자인의 머그컵이 과연 내가 갖고 싶은가?
후원자들이 과연 이 머그컵을 받고 좋아할까?
이지성 편집장이 갖고 싶다고 하는 이 디자인이 절대 불가능한가?
나는 왜 화가 났을까?
내가 알아본 것이 거절당해서일까?
다시 알아보고,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을 추진하는 것에 대한 회피일까?
그렇게 하기가 진짜 어려울까?
돈이 많이 들어서 못하는 걸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뭔가?
이런저런 애초의 가정들을 하나씩 돌아보며 깨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달했다.
나의 욕망에!
나도 저 디자인이 갖고 싶다!
그리고, 스타벅스 로고를 유심히 살펴본 후, 수채화로 그린 내 그림을 원톤으로 선을 따서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시간적으로도 몇 분 걸리지 않았고,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게, 마음에 들게 스케치가 나왔고, 점점 더 고무되어 갔다.
연필 스케치를 촬영한 이미지 파일과 함께 스타벅스 컵과 같은 스타일로 인쇄할 수 있는지 다시 문의 메일을 보냈고, 업체 측에서 견적서와 함께 곧 답변이 왔다.
"일러스트 파일로 작업해 주시면 레이저로 컵 표면을 깎아내는 방식인 레이저 각인으로 1도 실크인쇄가 가능합니다."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견적도 의외로 비용이 크게 비싸지 않았다.
일러스트 작업도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원하는 이미지가 나왔다.
일러스트 AI. 파일을 보내자 블랙, 아이보리 두 가지 시안 이미지를 보내왔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예산과 상관없이, 방법은 모르더라도 자신이 갖고 싶은 디자인을 굽히지 않고 주구장창 주장해 준 이지성 대표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감사가 올라오면 퇴행하지 않는다!
이 인쇄 방식은 도자기에는 안되고 스텐 머그에만 가능해서 애초에 생각했던 머그컵은 아니게 되었는데, 오히려 파손의 우려도 없고, 아웃도어로도 사용할 수 있어서 더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에서 말하고 있는 욕조의 이미지와도 좀 더 닮은 것 같아서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스타벅스 부럽지 않은 우리만의 컵이 탄생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일 수도 있고, 어떤이에게는 한심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꼭 필요한,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 과정을 복기하다 보니 단지 이번 일만이 아니라 형태가 달랐을 뿐, 과거에도 이와 꼭 같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스톱모션 애니메이터로 일할 때, 제작자인 나, 크리에이터, PD, 매니저 보통 4명이 기획 회의에 참여했다. 소재를 정하고 장면을 구현하기 위한 콘티 작업을 같이 하면서 내 아이디어가 정체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는지 한 번은 PD가 말했다.
작가님이 하고 싶은 게 뭔지 말씀해 주세요.
그 말은 나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어진 PD의 설명은 이러했다. 자신이 팀에 존재하는 이유가 제작자인 내가 구현하고 싶지만 기술상으로 부족한 부분을 돕기 위해서인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기술 안에서만 아이디어를 내는 것 같다고 했고, 부끄럽게도 그 말이 정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도록 기술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해외 유학까지 갔다 온 뛰어난 PD가 참여해서 팀 작업을 하는 것인데, 나는 뭔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불편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기술 안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있었고, 혼자 다 하려고하니 결과적으로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을 무능하게 만들고, 최대한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팀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큰 각성이 들었고, 부탁하는 능력, 기대는 능력, 협업을 하는 능력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내가 기술적으로는 못하는 장면을 PD에게 설명했고, PD는 "그러니까 이렇게 하고 싶다는 말씀이시지요?" 하면서 내 생각을 읽어냈고, 둘이 따로 화상미팅을 잡아서 원격으로 프로그램을 배우고, 내가 구현하고 싶었던 장면을 PD의 도움으로 현실화시키는 일은 그동안 나 혼자 알던 기술로만 완성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성취감이었다.
천재 아니에요?
서로 감탄하고 감사하고 감동하면서 그동안 나 자신의 부족함이 들킬까 두려웠던 껍질을 깨부수고 서로의 잠재력을 끌어내주고 실현시켜 주려는 진짜 팀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욕망이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진실할 것.
의지가 무르익고, 감정이 타오르고, 생각이 빛을 발하면 행동은 오히려 쉽다는 것을 확실히 경험한 사례였다. 하고 싶은 것이 확실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 누군가 해놓은 것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예산이 이러니까 이 정도 선에서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기존의 시스템이 이러하니까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정해진 구조 안에서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한번 더 가정을 의심해보지 않는 정체된 생각, 생각, 생각들...
그렇게 구태의연한, 말라비틀어진 생각으로 예술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이 작은 일들로 양자역학까지 언급하자면 뉴턴역학까지는 '에너지는 연속적'이라는 가정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막스 프랑크가 그 가정을 의심하면서 '에너지는 불연속적'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이 출현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창의적이지 못한 이유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공고한 영역, 단단하고 완고한 가정이 질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Why Not?
비트겐슈타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질문 속에 답이 있다고.
답이 곧바로 있지는 않더라도 질문 속에 단서가 있고, 실마리가 있다.
답을 정해놓고 행동하지 말고, 가정을 의심하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