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틱> 19화. 그림형제 동화 <홀레 할머니>
한 과부에게 딸이 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아름답고 부지런했지만 다른 하나는 못생기고 게을렀다. 그런데 그 과부는 못생기고 게으른 딸을 훨씬 더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친딸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부지런한 의붓딸은 하녀처럼 재를 뒤집어쓴 채 혼자서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 불쌍한 소녀는 매일 큰길 옆에 있는 우물가에 앉아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실을 잣고 또 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얼레가 피에 흠뻑 젖자 소녀는 그걸 닦으려고 우물 위도 몸을 숙이다가 그만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얼레는 우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소녀는 울면서 계모에게 달려가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계모는 소녀를 무섭게 꾸짖고는 차갑게 말했다. "얼레를 빠뜨렸으면 그걸 다시 건져 와야지!" 소녀는 우물가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얼레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고민 끝에 소녀는 그것을 건지기 위해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소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눈을 뜨고 의식을 되찾은 소녀는 자신이 아름다운 풀밭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고 많은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소녀는 그 풀밭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빵이 가득 들어 있는 오븐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빵들이 소녀에게 소리쳤다. "우릴 꺼내 주세요! 우릴 꺼내 주지 않으면 우리는 다 타 버리고 말 거예요. 우리는 이미 충분히 익었거든요!" 소녀는 오븐에 다가가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빵을 모두 꺼냈다.
그런 다음 소녀는 계속 걸어가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사과나무 앞에 이르렀다. 그때 사과나무가 소리쳤다. "날 흔들어줘요! 날 흔들어 줘요! 내 사과는 모두 익을 만큼 익었어요." 소녀가 그 나무를 흔들어 주자 사과가 비 오듯이 떨어졌다. 소녀는 사과나무를 계속 흔들어 그 나무에 열린 사과를 모두 떨어뜨렸다. 소녀는 그 사과들을 모두 주워 한 무더기로 쌓아 놓은 다음 다시 걸어갔다.
마침내 소녀는 어느 조그만 집 앞에 이르렀는데, 집안에서 한 늙은 여자가 내다보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아주 커다란 이들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는 그만 겁을 먹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소녀에게 소리쳤다. "얘야, 왜 날 두려워하지? 내 집에 머물지 않으련? 네가 집안일을 모두 제대로 해내고자 한다면 네게 좋은 일이 있을 게다. 넌 내 이불을 깃털이 날릴 정도로 잘 털어서 깔끔하게 정돈해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그 깃털들은 눈이 되어 지상에 내리게 되지. 난 홀레 할머니거든." 할머니가 아주 다정하게 말을 건넸으므로 소녀는 용기를 내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형제의 동화 <홀레 할머니> 중에서.
눈에 띄지 않음의 원리는 동화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홀레 할머니"가 그 일례이다. "홀레(Holle)는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 총애, 은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은총을 베풂"은 헤르메스적 원리의 종교적 형태이다. "천부의 재능"은 그것의 심리학적 형태이고, "천재"는 그것의 예술적 형태이다. 이 형태들은 모두 동일한 불가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일상적 오성에게는 동일한 문제 거리로 등장한다. 그들은 타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도, 스스로 부여한 것으로서도 파악될 수 없다.
"천부적 재능"은 인간의 능력 내에 있는 것,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것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것은 소질이 아니며, 은총 받은 자가 단지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순간으로부터 획득되어야 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대해 발견되어야 하며, 행운이 따를 때 실현될 수 있는 어떤 힘이다. "행운"은 단지 헤르메스를 대신하는 한 낱말일 뿐이다.
행운은 "얻을 만한" 자에게만 주어진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얻을 자격을 스스로 갖출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 그 상태에 이를 수 없다. 헤르메스에게로 인도하는 길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모든 길을 그를 통해 나아간다. 헤르메스는 길의 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떠한 "길"의 신인가? "천부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는 자신이 그러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로부터 그가 그 재능을 얻었는지, 그리고 얼마동안 그가 그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는 때로는 그 재능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이 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믿으면, 그는 그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거꾸로 그것을 의심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중의 입은 이를 간단한 정식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이것이 헤르메스이다.
홀레 할머니는 상과 벌을 배분해 주는데, 이는 공정성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카리스마적 원리에 따라, 즉 헤르메스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홀레 할머니의 은총은 공덕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공덕이다.
골드마리(금으로 덮이는 소녀)와 페히마리(오물을 뒤집어쓰는 소녀)의 차이가 그렇다. "홀레 할머니" 동화에서 골드마리는 우물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아무도 몰랐던 한 지하 세계에 도달한다. 지하세계에서는 사물들이 말을 한다. 그래서 빵들이 오븐에서 외친다: "우리를 꺼내 주세요!" 골드마리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원하는 것"을 행해주는 겸손한 소녀다. 그녀는 "때가 된" 것과 "그 자리에 적합한" 것을 행할 뿐이다. 그녀는 사태에 합당한 행동을 한다. 그럼으로써 그녀에게서 모든 것이 성공한다. 그녀는 본래 "부지런한"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동화는 이 점을 오인하고 있다. 그것은 부지런함을 보다 강하게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도되지 않는다. 성공(잘됨), 그것은 헤르메스적 현상이다. 성공이란 어떤 한 사태가 그것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가게 인도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도는 사태들의 지지를 받는다. 배경을 이루는 현실전체가 그것을 돕는다. 그러니 그것이 어떻게 실패하겠는가! 무엇이 그것에 저항하겠는가! 헤르메스적 원리의 압도적 힘은 주관성이 사라진 창조적 즉물성이다.
다시 말해 사태에 입각한 창조성, 즉 공-창조성이다. 공-창조성에서는 인간과 사태가 함께 어우러져 하나를 이룬다. 헤르메스적 인간은 말하자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출현하는 단 하나의 과정 속으로 녹아들어 간 것이다. 고유한 행동들의 자의식적인 출발점으로서의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한 세계상황의 중심적 의지의 발견일 뿐이다. 그가 사태들을 부르기만 하면 그들이 당장 생겨날 정도로 그는 세계상황의 중심으로 뛰어든 것이다. "사물들에게 그들의 고유한 노래를 연주해 주는 자는 그들을 춤추게 만든다." 헤르메틱의 힘은 사물들의 춤이다.
이 연재 브런치북 <헤르메틱>은 헤르메틱에 대한 필사로 이어가면서 헤르메틱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다.
헤르메스는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꾼 수많은 꿈들 중 유일하게 보인 신의 이름이다.
오랫동안 헤르메스라는 키워드로 찾아 헤매면서 헤르메틱이라는 정신적 지향, 작가적 고향에 도달했다.
헤르메틱은 어둠 속에서의 비상이다. 헤르메스적 근본 경험은 붕괴와 근원적 도약, 발견, 건너감이다.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찾아내고, 끝까지 살아남으며, 스스로 힘을 갖는 존재 방식이다.
헤르메틱에 대해서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는 H. 롬바흐의 저서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현실에 관한 사유의 전환: 철학적 헤르메틱>의 내용을 필사. 요약하는 것으로 '존재의 헤르메틱', '예술 작품의 헤르메틱'에 대해 소개하고 정리해 나가려고 한다.
이 정리본이 차후에 어떤 형상으로 드러나든 그 뼈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