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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마녀 Mar 27. 2022

Day 12. 글렌드로냑 증류소

무엇보다 완벽했던 마지막 증류소

나는 운명론자다. 우연이라고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보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감정이 동요하고 추억이 되고 의미부여가 된다. 스코틀랜드 여행 마지막 날, 글렌드로냑과의 만남은 나에게 운명이었고, 좋은 추억과 감정을 떠올릴 수 있는 ‘인생의 소재’들 중 한 개가 되었다.


글렌드로냑은 어쩌다 보니 스코틀랜드를 가기 전 한국에서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스코틀랜드 증류소 여행 계획에도 없었다.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스페이사이드라고 불리는 지역 쪽 증류소 투어를 하기로 했는데, 스페이사이드 증류소들은 보통 차로 30분 거리 내에 모여 있다. 그러나, 글렌드로냑은 1시간 넘게 걸렸기 때문이다. (본인들 스스로도 스페이사이드 증류소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애매하긴 하다.)


비행기 티켓을 끊고 보니, 돌아오는 날(어제)이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페스티벌’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페스티벌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괜히 욕심이 났다. 워낙 증류소 투어 정보 자체가 희귀한 한국이기에, 페스티벌 정보는 더더욱 없었고, 페스티벌 공식 홈페이지의 홍보성 멘트에 잔뜩 기대감만 부풀려져 변경 수수료까지 물면서 돌아오는 날짜를 하루 미루었다. 그러나, 막상 페스티벌은 역시나 동네잔치 수준이었고, 하루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중 어쨌든 ‘쉐리 3대 증류소(멕켈란, 글렌파클라스는 이미 다녀왔고, 글렌드로냑이 남았다.)’ 도장깨기나 해볼까 심정으로 글렌드로냑 증류소를 우리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로 하기로 했다.


증류소 투어를 하면서, 작업할 떄 쓰는 신발이나 옛 도구들을 보여주는 증류소는 처음이었다. 시골정취가 물씬.


글렌드로냑은 스페이사이드 증류소가 아니니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있지도 않았고, 외곽에 있다 보니 투어객이 역시나 없었다. 프라이빗 투어가 된 거다. 이렇게 나와 글렌드로냑의 운명적 만남은 시작되었다.

‘피오나’라는 가이드는 스코틀랜드 억양과 영어가 주는 언어의 장벽 너머에서도 ‘소녀의 감성’이 느껴졌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상세한 묘사와 개인적인 느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위스키의 가장 주재료가 되는 ‘보리’. 위스키를 만드는 가장 첫 단계로 보리를 위스키용으로 다듬어 주어야 하는데, 적당히 발아시킨 뒤 건조해야 한다. 증류소마다 다른 보리를 쓰고, 발아시키고, 건조하는 방법이 달라서 다듬어진 보리에서부터 증류소의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주 예민하지 않은 나로서는 스페이사이드 증류소들의 건조된 보리는 약한 훈연 향이 나거나, 그냥 보리차의 고소한 향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피오나는 글렌드로냑 보리향을 맡으면 어린 시절 살았던 집과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남편은 아일라 증류소의 훈연 처리된 보리향을 맡으면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서 맡던 아궁이 냄새가 기억난다고 했다. 글렌드로냑 가이드와 한국에서 온 30대 남자애가 위스키가 되기 전 보리향을 맡으며 비슷한 기억을 떠올린다니. 투어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감정이 주체 없이 피어올랐다.


피오나는 기억으로 이끌어주는 매개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것을 보거나, 맡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맛보았을 , 느끼는 감각이 과거의 어떤 따뜻하고 좋은 기억으로 데려가  시절의 좋은 감정까지도 되살아나게 하는 . 글렌드로냑을 먹으면서 자신과의 투어를 떠올려달라는 말이 너무 따뜻했다.

최고의 마지막 날을 선사해준 피오나.


글렌드로냑 증류소는 피오나의 말처럼, 모든 관광객들이  증류소를 왔다가 돌아가서 다시 글렌드로냑을 맛보았을  아름다운 감정을 다시 느낄  있게  주려는 듯한 이었다. 분지형태의 지형에 위치하여,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었다. 피오나는 아름다운 환경이 위스키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며, 글렌드로냑은 이 증류소의 아름다움을 담아서 더 맛있고 특별한 거 같다고 말했다. 과거에 글렌드로냑은 외부인(특히 주류세 담당 공무원)들이 오면 까마귀 지저귐에 알아채고, 세금을 덜 내기 위한 준비들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까마귀를 귀히 여긴다고. 또한 '드로냑'의 뜻이 '블랙베리'인데, 드로냑을 한 모금 마셔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글렌드로냑 증류소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서, 글렌드로냑이 그렇게 달콤한걸까?


투어를 마치고 4가지 대표 라인업을 시음해보았다, 피오나가 추가로 병을 더 가져와서 시음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때만 해도 쉐리의 '고년산' 제품들만 마시면 주체가 안되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드라이빙 키트에 잔뜩 담아서 선물해 주었다.

- 글렌드로냑 캐스크 스트랭스 Batch 7

- 글렌드로냑 15년 산 / 18년 산 / 21년 산

- 글렌드로냑 1993년 24년 산

- 글렌드로냑 Hand-filled (1992 distilled, 2019 bottled)


비지터센터 한켠에는 핸드필 할 수 있는 오크통이 마련되어 있다.


글렌드로냑은 3 쉐리 성지라는, 조금은 상업적이고 대규모 증류소의 느낌이 느껴지는 타이틀과는 굉장히 , 감성적인 증류소였다. 멕켈란보다 훨씬 장난기 없이 진지하고, 글렌파클라스보다 감성적이고 따뜻했다.

비지터 센터가 공사를 시작 한다고 했다. 다음번에 갔을 때 어떻게 변해있을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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