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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미 Sep 12. 2021

굴러 들어온 돌로 살아남기

이직러가 밥값 하는 법

사회초년생일 땐 밥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크지 않았다. 신입에게 주어진 연봉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월급을 받았으니까. 월급은 아주 작고 소중했으며, 그저 시키는 일을 할 뿐이었다. 쌩신입으로 시작한 회사, 박힌 돌로 매년 연봉 계약을 하고, 여느 때처럼 일을 하는 것에 부담 없었다.


이직을 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새로운 환경에서 밥값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는 일이다. 새 회사에서도 시간이 흐르면 박힌 돌이 되겠지만 이건 잘 적응했을 때의 이야기고.


경력 이직자는 회사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지만 그게 밥값을 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봉이 적든 많든 단기간에 업무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기대와 우려, 견제도 버텨야 한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 '쟤는 우리 업계 잘 모를 텐데', '우리 회사 방식으로 일 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


새 회사에 들어갈 때마다 그런 기대와 견제, 우려 속에서 긴장 상태로 일을 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를 테스트한다. 뭘 해도 불안하다. 일을 하면서 '지금 이렇게 일을 해도 되나' 싶다. 회의에 참여해도 '너무 아무 말도 안 했나' 혹은 '알지도 못하면서 나댄 건 아닌가' 별 생각이 다 든다. 이직이 위험한 액션인 이유다. 모르니까.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하는 기분이다.


나의 새 회사들은 늘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이었으며, (직무는 같았지만) 모두 다른 업종이었다. 그렇다고 저 이거 몰라요, 처음이에요 할 수는 없었다. 주어진 미션들을 수행해야 하고, 미션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 미션을 발굴하고 키우고 적극적으로 티 내야 했다. 첫 회사에선 박힌 돌이었지만, 이직과 동시에 굴러 들어온 돌이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전임자의 잘한 점과 못한 점을 파악하는 것은 적응에 도움을 줬다. 잘한 건 더 잘하고 못한 것도 내가 잘하면 되는 단순한 진리. 전임자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면접 당시 인터뷰어의 워딩, PC에 남아있는 인수인계 문서들, 점심시간을 활용해 동료들에게 얻은 짤막한 코멘트를 종합하면 대략 알 수 있다. 한 전임자는 외부 평판은 좋았지만 C레벨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업무 능력이 평가절하됐다. 이런 경우 후임자가 회사에 적응하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중간만 해도 밥값은 할 수 있다.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던 회사도 있었다. 일단 전임자가 없었다. 팀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인원을 충원한 케이스. 부서장과 신입만 있던 팀에 처음으로 경력직 TO 2개가 생겼고, 그중 한 자리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 쉬운 상황은 아니다. 기존 직원들이 쓸데없이 많은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비슷한 경력을 가진 팀원과 은근한 경쟁구도까지 펼쳐졌으니 참 골치 아픈 상황.


맡은 업무의 퀄리티는 물론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제시하며 능력을 어필해야 했다. TO 하나 받기 어려운 회사 분위기에서 경력직, 그것도 5~10년 차 TO를 2개나 받아낸 부서장 면도 세워줘야 했다. 경력직 홍보는 이런 것이라는 것을 거의 뭐 전사에 알릴 기세로.


그렇다고 너무 열정 넘치면 안 된다는 걸 직장인 모두가 잘 안다. 미션을 받았을 때 어느 정도의 퀄리티로 언제까지 완성하느냐도 중요한데, 너무 빠르게 처리하면 이 속도에 길들여진 상사로 인해 피곤해질 나의 미래를 알기 때문에(이런 건 첫 회사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의 롱런을 위해 스마트하게, 적당히 밀당했다. "오 생각보다 빠르게 했네" 정도의 반응이 나올 정도만 알아서 적절한 타이밍을 찾아야 했다.


내 편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해야 한다. 하! 진짜 밥값 하기 ㅈㄴ 힘들다. 이직은 익숙한 회사에서의 나의 위치와 영향력, 일을 원활하게 도와줄 수 있는 동료들을 떠나 0에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힘들게 갈고닦아 놓은 친분과 신뢰, 적응해 온 프로세스 등 모든 게 리셋된다. 새 회사에서 업무로 연을 맺은 사업부 담당자와 따로 점심을 먹고, 맡은 부서의 일을 빠르게 처리해 주고, 가끔씩은 그들의 일을 같이 고민하며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까지. 감정 소모가 생기긴 하지만 이렇게 내 편이 생기면 회사 생활이 그래도 조금은 수월해진다. 운이 좋으면 나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상사의 귀에 들어가기도 하고.


새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은 대부분 면접에서 알게 된다. 이 회사가 어떤 문제를 겪고 있고, 왜 사람을 뽑고 있는지, 특히 그게 왜 나여야 하는지 대략은 알 수 있다. 면접에서 회사가 나를 파악하듯, 나도 이런 부분들을 파악한다. 그래야 입사 후 제대로 밥값 할 수 있다.


입사 후 첫 3개월을 버티고, 그 기간에 좋은 평가를 받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그나마 순조로워진다. 물론 업무를 하는 하루하루가 시험이고, 나를 끝없이 증명해내야 하는 일의 반복이지만. 적어도 3개월 이후부터는 나도 회사의 진짜 직원이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최종 데뷔 인원에 들기 위해 치열한 서바이벌을 하는 기간이 입사 후 3개월이라면, 이후부터는 최종 멤버로 선정된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물론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시험대에 올랐다가 최종 멤버가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밥값을 해야 한다.


어찌 됐든 밥벌이는 하루하루 힘겹다. 갓 입사한 회사든, 10년을 다닌 회사든, 얼마를 벌든 관계없이 밥값을 하는 건 고통이다. 나는 오늘도 밥값을 하기 위해 아등바등 할 테고, 그러니까 맛있는 걸 많이 사 먹어야 한다는 엉뚱한 합리화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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