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보장된 사회
여태껏 연재한 <현대판 노예>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판 노예는 ‘나’라는 정체성 및 자유를 잃고, 쳇바퀴 같은 삶을 사는 보통의 사람이다.
-현대판 노예의 특징은 자발적 복종이며, 이들은 자신이 ‘자유의지’가 있다고 착각한다.
-현대판 노예를 길들이는 것은 ‘시스템’이며, 이는 세상을 구성하는 거대한 판이다.
-현대판 노예가 쇠사슬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다.
-현대판 노예는 디지털에 의해 지배에 순종하는 바보로 전락하기 쉽다.
-현대판 노예는 ‘열심히 살자’를 주문처럼 외우며, 지배없는 자기 착취를 행한다.
-현대판 노예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돈에 종속된다.
-현대판 노예는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속 명백한 피해자가 될 것이다.
-현대판 노예가 노동으로 얻는 경제적 보상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할 것이다.
-현대판 노예는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삶의 목적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현대판 노예에서 탈피하는 방법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다.
-현대판 노예는 자신의 내면에 동면하고 있는 아티스트를 깨워야 한다.
-현대판 노예는 디지털 및 블록체인으로 인해 덕업일치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판 노예를 양산하는 최대 주범은 교육이다.
즉, 미래에 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의 혜택은 소수에 한정될 것인 반면, 다수인 평범한 개인의 가치는 비참한 수준으로 추락할 것이다. 풍요로운 빈곤의 시대에, 번영은 집단의 차원에서만 존재할 것이며, 평범한 개인은 시스템에 제공하는 하나의 데이터,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사회나 국가 같은 조직은 모두 시스템의 하위 집단으로서, 안정을 추구하는 특질을 가진다. 따라서 누군가 자신의 삶을 구제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다소 순진한 생각이다. 즉, 시스템의 관성을 이겨내고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최근 일어나는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는 개인이 감당하기엔 분명 너무나 버거워 보인다. 계층이동의 사다리는 부서졌다. 시스템의 구조가 점점 개인이 탈 (脫) 노예 하기 어려운 상태로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vs 개인 간의 구도에서 시스템은 승리를 거두며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시스템은 '하면 된다'가 새겨진 채찍을 부여쥔 채, 약자들을 가리키며 군중을 향해 엄포를 놓는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너희도 저렇게 될 줄 알아!!". 다수의 개인은 이러한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고, 시스템에 자발적 복종을 하는 현대판 노예로 전락한다.
심지어 시스템의 충실한 정예 노예들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며, 약자들에게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부족을 탓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정예 노예는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이들은 권력을 잡고 현대판 노예의 통치 및 시스템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토피아를 꿈꿔본다. 모두가 탈 (脫) 노예 상태로 자유롭게 사는 세상. 각자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획일화되지 않은 세상. 가면을 쓰지 않고 나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물론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상적인 세계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런 인식을 가진 개인이 점점 많아지고 공동체를 이룰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에 좀 더 근접한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다음의 세 가지 자유가 보장된 사회다.
다름의 자유
사람은 개개인마다 고유한 특질을 지니고 있기에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다른 면이 있다. 따라서 비슷해 보이는 A와 B일지라도, A에게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B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데 우리는 생각보다 이러한 다름에 익숙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자신과 다른 특질을 가진 상대를 접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경계심과 호기심인데 경계심이 커지면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라는 편협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타인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막상 나와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은 자유를 좀 먹는 암세포인데, 안타깝게도 한국은 이 부분에서 무척 후진적이다. 집단주의가 심한 한국인은 남들과 다르게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지랖이 심해 남들과 다른 꼴을 못 보고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고, 건설적인 토론이 아닌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개인이 자신 고유의 색을 드러낸다 싶으면, 집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박멸한다. 한국인의 삶은 마치 파놉티콘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만인이 만인의 눈치를 보는 피곤한 구조로 설계됐다. 우리는 ‘그놈의 우리’ 때문에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불행한 노예의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다.
또한, 관용이 결여된 한국은 사회가 규정한 정답에 어긋난 사람을 냉소적인 태도로 대한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어떻게 살든 본인의 재량이고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는 터인데 한국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남들과 똑같은 공부, 남들과 똑같은 직업, 남들과 똑같은 시기에 결혼 등 일종의 인생 정답이 존재하며, 이와는 다른 행태를 보이는 사람을 부적응자로 보는 시선이 있다. 이런 후진적이고 비효율적인 구조 때문에 막대한 낭비가 발생하며, 이는 구성원들의 자유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교육에 대한 제언에서 밝혔듯 한국 교육은 아이들을 대량 생산된 노예로 개조하는 구조다. 한국 대학 진학률 70%라는 기형적인 구조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풍토에서 기인한다. 대학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곳은 30-40%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들은 노후자금을 까먹어가며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고, 이에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를 억지로 하는 학생들은 자유를 박탈당하며 고통받는다.
사실 모두가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는 없으며, 대학을 가지 않아도 기술을 배우거나 일찍 적성을 찾아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혹은 대학 사교육에 들일 돈을 차라리 자식에게 증여해 자영업을 할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깔보는 사회 풍토나, 대학을 나온 것이 마치 그 사람의 능력 전부를 대변하는 것처럼 여기는 채용문화가 구조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이런 사회적 낭비는 지속될 것이다.
다름의 자유의 핵심은 사회의 구성원이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다채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획일화된 정답이 있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달리기 때문에 등수가 있게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하지만 다름의 자유가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각자의 방향성을 가지고 원으로 퍼져 달리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가 없다. 이들은 각자 자신과 경쟁을 할 뿐이며, 타인이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답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
실패의 자유
훌륭한 아티스트는 당연한 것에 의심을 품고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실패는 당연한 일이다. 에디슨은 수천 번의 실패 끝에 전구를 만들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누군가 에디슨의 실패를 호되게 나무라고 질책했다면, 기가 죽은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창조는 애초에 정답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여러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고, 때로는 처절한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실패에 관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안전장치 속 실패할 자유를 보장할 때, 에디슨과 같은 1%의 위대한 아티스트가 나오며 이들은 세상을 바꾼다.
실패를 교훈 삼아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실패는 성장의 훌륭한 밑거름 된다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에게 루저라는 오명을 씌우고,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낙인을 찍는 경향이 있다. 특히나 한국은 이런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남들과의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실패할 자유가 없다. 한국의 학생들이 어른들에게 지겹도록 듣는 이야기는 “지금 학년이 너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니, 딴생각하지 말고 바짝 공부해서 뒤처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인데, 그렇게 매년 겁을 주고 주입식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현대판 노예로 개조한다.
이처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창의력이 길러질 리 만무하며, 이런 환경에서 자란 보통의 한국인은 실패를 감수하고 감히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보통의 한국인은 그저 오와 열을 맞춰 남들이 시키는 대로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산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실패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한국은 잘해봐야 이류로 남거나 삼류로 추락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실패에 인색한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구글 내 가장 혁신적인 팀이자 자율주행차 같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주도하는 구글 x는 실패할 자유를 보장한다. 구글 x에서는 프로젝트에서 실패하면 질책이 아닌 보상을 받는다. 납득이 되는 명확한 이유로 실패를 한 팀에게는 해고나 승진 누락의 불이익 대신, 보너스와 휴가가 주어진다. 구글 x를 이끄는 텔러 대표는, 실패에 관대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직원들이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도록 실패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세상을 뒤흔들만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실리콘밸리는 실패의 자유를 허용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똑똑한 젊은 인재들이 큰 비전을 가지고 제2의 구글을 창업하기를 꿈꾸지만, 한국의 우수한 인재들은 삼성 같은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실리콘밸리의 기업은 창업에 실패한 사람에게‘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와 같은 경험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남들보다 취업이 몇 년 뒤쳐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반면, 한국 기업은 지원자가 일정 나이가 넘으면 채용할 확률이 희박할뿐더러, 남들과는 다른 경험 (특히나 그것이 창업이나 고시 실패의 경우)을 가진 지원자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아마 다음과 같은 한국 기업 채용 인재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재” 나는 이런 류의 채용 공고를 볼 때마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는 야근시켜도 군말 없이 일하는 순종적인 노예이며, 막상 똘똘한 신입을 채용해도 허드렛일만 시키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게다가 한국 기업특유의 수직적인 군대문화 때문에, 본질적인 일보다는 윗사람 눈치 보는데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도, 채용을 담당하는 면접관이 창의적이고 미래 주도적인 인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있을 확률이 높다.
한국과 실리콘밸리의 특징이 이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는, 절대 한국이 열등해서가 아니다. 외국인과 일해본 사람들은 오히려 어떤 민족보다 한국인이 근면하고, 똑똑하다는 것을 안다. 차이는 단지 실패할 자유의 유무에서 기인하는데 이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실패할 자유는 창조를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다. 실패할 자유가 있기 때문에,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으며 때로는 수많은 실패 끝에 이 무모함이 혁신으로 바뀌기도 한다. 서커스 곡예를 하는 사람들도 안전망이 있어야 마음껏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다. 실패할 자유가 있어야 마음껏 창조를 할 수 있으며, 이런 아티스트들이 많아져야 사회는 혁신을 통해 발전한다.
표현의 자유
개개인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다. 표현의 자유는 다름의 자유와도 연관이 있는데,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포용할 줄 아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유롭게 표현된 개별적인 생각들이 모여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토론을 거쳐 합의에 이르면서, 사회는 전진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채택하고 윈스턴 처칠이 ‘가장 덜 나쁜 제도’라 평가한 민주주의는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민주주의의 뿌리가 된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특히나 이러한 표현의 자유가 충만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아고라 광장에 모여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이러한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초석이 됐다.
아테네 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한 한국은 과연 표현의 자유가 있는가? 헌법 제1조 1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시돼있지만, 나는 한국이 아직 높은 수준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자라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교육받는다. 학교에서 질문하면 특이한 학생으로 간주되고, 회사에선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를 장려하고, 유교 사상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장유유서라는 미명하에 어른들의 생각에 반하는 것은 죄악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미시파시즘이 만연한 한국사회의 구조하에서는, 구성원이 감히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이는 개별성을 말살시킨다.
만약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면, 건강한 토론 및 사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순종과 복종을 요구하며, ‘어른이 말하면 들어야지’, ‘상사가 시키면 해야지’등의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 맞서 당당히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사람은 설사 자신이 정당한 표현을 할지라도, 소위 버릇없거나 싹수없는 사람으로 매도되기 쉽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은 아직도‘까라면 까야지’라는 군대 마인드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다는 점이다. 싫어도 티를 못 내고, 좋은 생각이 있어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으니 참으로 비효율적이다.
따라서 예를 갖추는 범위에서,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표현하는 것이 장려돼야 하며 이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더 높은 수준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자유롭게 손을 들고 질문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해야 한다. 회사는 상사와의 관계를 주종관계가 아닌 동료관계로 정의하고, 자유롭고 수평적인 토론을 보장해야 한다. 어른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변화가 있을 때, 다채로운 색깔을 가진 개개인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고 이는 건강한 사회로의 이행이다.
결국, 다름, 실패, 표현에 대한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아티스트가 되고 탈(脫) 노예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은 현재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먼 편이다.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쉬는데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OCED자살률 상위권을 지키고, 2017년 UN의 행복지수에서 전 세계 155개국 중 56위에 오른 나라가 한국이다.
또한, 세계 가치관 평가에 의하면 한국은 세속-합리적 가치 및 생존가치가 두드러지게 높다. 이는 한국이 얼마나 살기 팍팍하고, 관용이 싹트기 어려운 나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자유의 결핍과 더불어 이런 숨 막히는 가치관 때문에,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삶은 소풍이 아닌, 일종의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시합이 돼 버린다. 내가 진정으로 안타까운 것은, 삶의 주권을 시스템에 양도한 많은 한국인들은, 행복한 일상의 순간에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민주주의 역사가 아직 짧고, 자유로운 사회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있기에 잠재력이 있다. 나는 교육, 점진적인 가치관의 변화 및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치의 변화가 삼박자를 이룰 때 한국이 유토피아에 근접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대한 변화는 단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일단 개인으로서 변화를 추구해야 하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개인이 서서히 모이고 모여 주류가 될 때 한국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삶이 노예로 살기에는 너무나 큰 잠재력과 가치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당신은 인생의 주인공이며, 당신의 생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그리고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를 부디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지 않았으면 한다. 결코 당신이 부족해서 삶이 버거운 것이 아니며, 등수나 연봉 따위의 수치로 삶의 우위를 정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일렬로 쭉 줄을 세워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고깃 덩어리가 아니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생산-소비’의 쳇바퀴를 굴리는 햄스터 수준으로 격하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시스템에 답답함을 느끼고 분노해야 한다. 시스템 저 너머에서 창조하는 아티스트가 되어 작은 변화를 만들고, 우리를 바코드가 찍힌 공장의 양산품으로 만들려는 시스템의 힘에 저항해야 한다.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내가 <현대판 노예>를 통해 시종일관 강조했던 것은 “자유”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노예다. 자유는 대단한 것이 아닌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나는 가급적 더 많은 사람이 나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내가 그 위대한 변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를 바란다. 내가 뿌린 영감의 씨앗이 열매를 맺어 더 많은 아티스트가 배출되기를 바란다.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주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러한 변화에 동참한다면, <현대판 노예>를 연재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우리는 위대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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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 우리의 육체나 정신, 영혼의 건강을 보위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각 개인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이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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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7D_z0pMF37Q&t=23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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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헬조선인가?"라는 주제로 예전에 만든 영상을 첨부합니다. 제가 진단한 한국 사회의 문제는 '자유의 결핍'입니다.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시민들이 연대하여 서서히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MgKQ6r7lvY
한편, 앞으로 바빠서 혹은 두꺼운 책 한권을 끝낼 엄두가 안나 책을 멀리하셨던 분들을 타겟으로, 꼭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책들을 간략히 소개하는 영상을 틈틈이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짧게 만들테니, 통근시간이나 자기전에 보면 좋을 듯 합니다. 더욱 많은 영상은 아래 21세기 살롱 채널에 있으니, 콘텐츠가 맘에 들면 구독해주세요 :)
마지막으로, <현대판 노예>의 연재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추후에 내용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출간하고, 삶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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