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지기 위한 무한경쟁에서 벗어나야
참으로 불편한 진실은, 시스템은 구성원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시스템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고, 훈육과 획일화를 통해 구성원의 개성을 말살한다. 시스템은 네모난 틀을 만들고, 이 안에 다양한 형태의 아이들을 집어넣으며, 종국에는 반듯한 사각형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네모난 틀이 교육이고, 반듯한 사각형은 현대판 노예다.
시스템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문을 품기를 원치 않는다. 대신, 누가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정보를 많이 암기하는지를 평가하며 (대부분은 시험 직후 바로 잊어버릴 내용), 이러한 획일적 방식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경쟁에서 밀린 루저로 치부해버린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의력과 주체성을 잃고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노예로 길들여진다. 현대판 노예는 자신이 자유의지가 있다고 착각하며, 시스템이 설계한 방식대로 삶을 산다.
한편, 칸트는 교육을‘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작용’이라고 정의한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의 제목처럼,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은 사실 어릴 때 배운다. 하지만 교육의 본질은 인격 성숙에서,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변했다. 이처럼 변질된 교육은, 현대판 노예를 양산하는데 일조한다.
특히 한국의 교육은 현대판 노예를 양성하기 제격이다. 교육기관은 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가르치기보단, 어떻게 하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지 요령을 가르치는데 급급하다. 또한, 왜라는 질문을 하는 학생보단, 앞에 앉아 교사의 말을 빠짐없이 받아 적고 정확히 암기하는 것이 우등생으로 분류되고, 실제로 이런 '북스마트' 학생들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이런 헛똑똑이들이 성인이 되고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해 자발적으로 시스템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목격했다. 실제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명문대 나온 지인이 '자신의 삶을 설계해주고 정답을 알려주는 인생 학원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을 때,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평생을 부모나 교사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인생의 주권을 타인에게 양도하길 원한다니.
게다가 학벌주의 한국 사회 속, 성공과 행복은 성적에 비례한다는 편협한 프레임은, 실로 막대한 낭비를 야기한다. 잔혹한 입시경쟁에 내몰린 학생은 시간과 재능의 낭비, 막대한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부모는 경제적 낭비, 혁신이 결여된 사회는 인적자원의 낭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이 지독한 낭비는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교육을 개선하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탈(脫) 노예 할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스템은 당신이 똑똑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스스로 극복해내야 한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세상을 비틀어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선, 왜라는 질문을 자꾸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왜 교육이 현대판 노예를 양산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는가? 개선 방법은 무엇일까? 다음의 설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보편적 의무교육이 시행된 것은 불과 2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체계적인 교육기관의 수도 부족했고, 서민들은 교육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농경사회에서 가족 구성원이 교육을 받느라 일을 하지 못하면, 이는 가계경제에 심각한 손실이다) 교육은 선택받은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국가 주도의 공교육 제도가 확산되는데 이는 대부분 18세기 고안된 프러시아 교육 시스템에서 비롯됐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러시아는 18세기 대대적인 개혁을 선언하고, 국가 주도의 의무 교육제도를 추진한다. 프러시아 교육 시스템의 주된 목표는, 국가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군인과 군말 없이 일하는 공장 노동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당시 상류층 자제들은 비싼 사립학교에서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사고력을 고양할 기회가 있었지만, 공립학교에 다니는 서민들은 주로 상급자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며 바보가 되도록 교육받았다.
공교육의 일방적인 지식 전달과 훈육의 결과, 비판적 사고를 할 힘을 잃은 아이들은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공장에서는 관리자의 지시에 고분고분 복종하는 충실한 시민으로 길러졌다. 대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훈육하는 프러시아 교육 시스템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지배 계층에서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 따라서 이 교육시스템은 19세기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됐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한국도 이러한 교육의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VLBAV9KLYE&t=8s
그러던 중 농경사회->산업사회->정보화 사회로 주력 산업이 바뀌면서, 노동이 세분화되고 지식노동은 확산됐으며, 20세기 들어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때 임금 소득은 노동자의 신체적 조건이 아닌, 어떤 자격증과 학위를 보유했는지에 따라 결정됐다. 따라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치열해졌고, 학력은 상향 평준화됐으며, 학생들이 사교육으로 소화해야 할 학습량은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특히나 우수하지 못한 성적을 적성이 안 맞는 것으로 여기는 서양과는 달리, 이를 본인의 노력 부족으로 탓하는 동양에서 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 및 경쟁의 강도는 높아졌다.
게다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및 고용에 대한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학교를 졸업한 성인들까지도 평생교육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게 됐다.‘무언가를 배우고, 계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퍼지면서, 사람들은 교육에 집착하고 ‘끝내지 못한 숙제가 남은 개운치 않은 불안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됐다.
한국도 20세기 말 IMF 때 대량 실업을 경험한 이후, 그렇지 않아도 높은 한국의 교육열은 성인들에게도 확산됐다.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 자기계발의 강박에 시달리며 샐러던트 (Salaryman + Student, 공부하는 직장인) 들이 늘어났고, 교육열은 증폭됐다. 이때 교육의 주된 목적은, 인격도야보다는 지식의 주입을 통한 높은 시험 점수, 자격증, 학위 등의 스펙 취득에 치우쳐져 있었다.
한편, 이처럼 사람들이 교육에 목매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경제적 관점에서 교육은 일종의 투자인데, 교육을 통해 얻는 기대소득이 비용 (학비, 포기하는 근로기회비용, 시간 등)을 많이 상회할수록 교육에 대한 투자 수익률은 더 매력적이다. 가령 과거 한국에서 대학 졸업장은 충분한 희소성을 가졌기에, 부모들이 자식 대학 보내기 위해 허리띠 졸라매고 희생하는 것은 납득이 가는 투자였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 진학률이 70%인 수준에서 대학 졸업장은 과거 대비 희소성과 투자 수익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열은 식을 줄을 모르는데, 사교육에 이렇게 많은 자원이 낭비되는 나라가 있을까 싶다. 특히나 한국에 자녀를 둔 학부모의 특징은, 인고의 태도로 자식 교육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공부에 뜻이 없는 학생과 부모에게 모두 비극이다. 남들 다 하니까 불안해서 자식에게 맹목적으로 사교육을 시키는 것은, 계산기를 쓰는 시대에 주판을 배우게 하는 꼴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노동의 종말”에서 밝혔듯, 기술의 발달로 인해 출현할 계급사회는 자본과 플랫폼을 소유한 0.1%, 변화를 창의적으로 이용할 1% 그리고 나머지 평범한 99%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교육은 거꾸로 가고 있는 듯하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모두가 똑같은 목표를 지향한다. 미국이나 중국의 수재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제2의 구글, 알리바바 같은 기업을 세우는 것을 꿈꿀 때, 한국의 수재들은 삼성 같은 대기업에 고용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과연 학생 개인의 문제인가? 나는 후진적인 교육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개성 없는 사람이 AI보다 잘할 수 있는 영역은 많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은 “대량 생산된 평범한 공산품이 되기 위한 무한경쟁”을 부추긴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따라서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억지로 하며 막대한 교육비를 지출하는 것은, 이제는 정말 최악의 투자다. 각자가 고유의 개성과 재능이 있고 잘할 수 있는 분야가 다른데, 획일적인 방향으로 교육하는 것은 끔찍한 낭비다. 이는 마치 숲 속에선 나무를 타는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원숭이에게, 바다에서 살라며 헤엄치는 것을 가르치는 꼴이다.
한국의 교육이 과연 개선될 수 있을까? 점진적인 가치관의 변화와 더불어 현 교육체제가 뿌리째 바뀌지 않는다면, 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육이 학생들의 적성을 찾고 창의성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교육기관도 결국 시스템의 일부일 뿐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문대 진학률 및 취업률, 시험 점수 등의 수치로 평가받는 교육 기관, 이러한 교육기관에서 급여를 받는 교사, 이들에게 돈을 대는 고객이자 자식의 세속적 성공을 바라는 학부모 그리고 이 어른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학생. 이들의 이해관계를 들여다보면, 애초에 교육제도는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만의 적성을 찾기 어려운 방향으로 설계돼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에게 생각할 힘을 길러주는 인문학을 (소위 돈 안 되는 학문) 가르치겠다고 하면 학부모가 반길까? 그 시간에 영어나 수학, 코딩 같은 실용적인 과목을 더 가르치고 아이의 내신 및 수능점수 올려달라는 학부모의 요구에 자유로울 교육기관은 거의 없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모든 교사들을 싸잡아 매도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교사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암기와 경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만드는 참교육을 실천하는 아티스트다. 하지만 그들의 선의마저 고용주인 교육기관과 고객인 학부모들에 의해 좌절되기 쉬운 환경에 놓여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학부모-> 교육기관 -> 교사 -> 학생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 하에서, 학생들이 가져야 할 꿈은 모름지기 부모가 원하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직업으로 정의된다.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촘촘하게 짜인 암기 위주의 커리큘럼은, 학생들에게 위대한 질문을 던질 틈을 주지 않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R6G_OuGTmDo
또한 창의성의 발현은 관용이 바탕이 돼야 하는데, 폐쇄적인 특질을 가진 한국사회는 창의성이 싹틀만한 환경이 아니다. 다음 파트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한국은 다름의 자유, 실패할 자유 그리고 표현할 자유가 없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자유가 보장된 관용 있는 사회인데, 이러한 환경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은 아티스트가 될 수 있고, 이들의 영감에서 비롯된 혁신을 통해 사회는 전진한다.
결국,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시스템 저 너머 소수의 아티스트며, 이들이 주는 영감이야말로 참교육이다. 아티스트는 향기 없는 소품종 대량생산인 시스템의 교육에 맞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빛나는 가치를 보여준다. 아티스트는 자신이 얻은 영감을 활용해 연대하고, 후대를 양성하고,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무채색의 공산품이 아닌 향기 있는 수제품 같은 사람을 길러내는 것. 모두가 남이 정한 똑같은 방향으로 달리며 획일적 기준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이 아닌, 다 같이 원형으로 퍼져나가 각자가 자신의 길을 가게끔 하는 것. 이것이 현대판 노예가 시스템의 지배에서 벗어나 나답게 살도록 돕는 교육이자, 존엄한 자유의 가치를 드높이는 일이지만, 우리는 아직 갈길이 멀다.
본디 이런 위대한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다. 지금 어른들은 '요즘 젊은것들은', '나 때는 말이야' 혹은 '나이도 어린놈이 뭘 안다고'라는 꼰대 같은 태도를 견지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납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 앞으로 어쩌면 참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용이 세대에 세대를 거쳐 전승될 때, 시스템이 좀 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묵묵히 애쓰고 있을 아티스트들을 상상하며 희망을 가져본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님의 대사로 글을 마친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죽은 시인의 사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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