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새해를 맞아
매년 연말 연초가 되면 한 해를 돌아보는 회고록을 쓰곤 한다. 이번에는 책 영화나 보면서 그냥 쉴 까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 이게 무슨 일도 아니고, 좋아서 하는 건데 억지로 할 필요 없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마치고 집어든 책 제목이 인상적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형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상실의 아픔을 느끼고 삶의 방향을 잃은 작가. 그는 선망받던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단순한 일을 하며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리기로 결심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취직한 그는 미술관에서 일하며 지켜본 사람들과 예술 작품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연말에 휴가지나 차분한 카페에서 보기 좋은 책이다.
책을 다 읽고 문득 한 해를 돌아보는 회고록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노트북을 킨다. 하얀 바탕과 깜빡이는 커서, 오랜만이다. 무슨 주제로 글을 쓸까? 이전에는 어떻게 썼더라? 예전에 쓴 글들을 찬찬히 읽어본다. 지나온 나의 30대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20대에는 30대가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한참 잘못 생각했다. 30대도 여전히 불안하고 서툰 미생이다. 아마 40대가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23년 -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2022년 - 순간아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2021년 -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는 계획
2020년 - 이때는 없다. 찾아보니 <결혼의 종말> 원고 마감을 한참 하고 있었다
2019년 - 새해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2023년을 돌이켜보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굵직한 사건들이 몇 개 있다. 우선, 할머니의 장례식. 할머니는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뿐만 아니라 장례식에 온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와의 다정한 추억을 기억하며 그녀가 별이 된 것을 애도했다. 특히 할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며 할머니가 천사였다고 말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할아버지는 생활력과 책임감이 강한 가부장적인 가장이었지만 성격은 다소 뾰족했는데, 할머니는 특유의 온정적인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모난 구석을 품어주었다.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에도 사람들은 이따금씩 그녀의 온화한 미소를 기억할 것이다. 할머니는 일종의 "작은 불멸"을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추억에 박제되어 그들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기억되는 것) 하는 셈이다. 예전에는 "큰 불멸"을 (뛰어난 업적을 남기어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 실천한 대단한 사람들을 동경했는데 이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어차피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면, 살아 있는 동안에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즐거운 추억을 쌓고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희생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한편, 엄마는 30년 넘게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했다. 은퇴 전 엄마와 아빠를 모시고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원래는 코로나 전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사정이 이렇게 되어 한참 미뤄졌다. 해외여행 귀찮고 싫다고 했으면서, 근사한 초밥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 그래, 이 맛에 돈 벌지!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부채의식 조금은 줄어든 느낌이다.
은퇴 이후 큰 짐을 던 엄마는 요새 가장 행복해 보인다. 평생을 밀린 숙제를 처리하듯이 살아온 엄마는 요새 느긋하게 노후를 즐기는 모습이다. 하지만 가만히 못 있는 성격 탓인지, 갑자기 주어진 여유가 어색한 모양이다. 은퇴 시기에 맞춰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책을 내는가 하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해 본다고 하지 않나, 이것저것 분주한 모양새다.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의 은퇴를 상상해 본다. 엄마에게 그대로 물려받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나의 기질을 고려하건대 아마 나도 은퇴 이후의 삶을 지루해하지는 않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는 작년에 인생의 동반자가 될 사람을 만나 이번 년에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결혼의 종말의 작가가 결혼이라니, 대체 어떤 분이길래? 주변에 결혼 사실을 알리면 이런 반응이 부지기수다. (결혼의 종말은 비혼을 장려하는 책이 아니라고!) 나의 와이프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성격, 기질, 성장환경, 연애스타일이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을 연인으로 만나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길 바랐고, 마침내 상호보완적인 사람을 만났다.
내가 꼽는 그녀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충만하다는 것인데, 표현에 서툴고 냉소적인 나와는 달리 그녀는 감정 표현도 잘하고 상대로 하여금 따뜻함을 느끼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어리광을 부릴 때면 철없는 소녀 같아 보일 때도 있지만, 가끔씩은 자애로운 엄마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나를 놀라게 한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우리 사이도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끔씩은 서운한 감정이 폭발할 때도 있고, 동굴로 훌쩍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균열과 조율, 그리고 회복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투닥투닥거리겠지만, 이 또한 가족이 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정겨운 구석이 있다.
삶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삶은 매번 흐르고 우리는 변화의 물결에 적응해야 한다. 24년은 어떤 일이 펼쳐질까. 분명한 것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인생의 새로운 챕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죽음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제는 홀로 지내는 것에 적응해야 한다.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가 떠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엄마는 은퇴 이후에 새로운 삶을 살 것이다. 그것이 유튜브든 취미생활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녀의 삶은 에너지로 가득 찰 것이다. 나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것이다. 아직 불확실한 미래이긴 하지만, 자녀를 언제 가질 지에 대해서도 와이프와 상의하고 있다. 그동안은 체험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종류의 기쁨과 슬픔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챕터에 숨겨진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다가올 24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