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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Jan 02. 2021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는 계획

2021년 새해를 맞아

새해다. 새해가 되면 유독 붐비는 장소가 있다. 헬스장, 학원, 서점. 사람들은 새해에 계획을 세우고 (평소에는 좀처럼 꾸준히 안 하는) 생산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새해의 의욕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썰물같이 빠져나간다. 한때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새해에는 응당 실천해야 할 것 같은 계획들을 세웠다. 그러고는 으레 게을러지고, 계획을 지키지 못할 경우 불안함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계획을 세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게 일어난 일의 많은 부분은 애초에 고려했던 계획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것들이 많았다. 기뻤던 일이나 슬펐던 일 모두 말이다. 예를 들어, 작년 이 맘 때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렇게 장기화되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집콕을 오래 하다 보니 전반적인 무력감과 더불어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게 슬픔만 준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브런치 북 공모전 대상으로 선정된 <디지털 빅브라더>는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영감을 받지 못했더라면 탄생하지 못했을 작품이다. 작품이 선정됐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준 슬픔보다 훨씬 큰 기쁨을 느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예시에 불과할 뿐,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내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준 사례는 무수히 많다. 내가 내린 결론은, 계획을 세우는 일이 정말이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무계획이 계획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새해에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대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초탈한 자세를 견지하려고 한다. 열흘 붉은 꽃은 없고,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기쁨이나 슬픔이나 다 한 때의 일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무뎌진다.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는 자세는 우연의 장단에 리듬을 탈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사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계획이 아닌 우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다. 매사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들으면 허무하겠지만, 나는 '중대한 우연을 초래하는 운'이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절대적인 변수라고 생각한다. 운은 이따금 우리를 찾아와 잠시 머물고 떠난다. 그러니까 운 좋게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경거망동할 필요가 전혀 없다. 조만간 운이 떠날 테니까. 반대로, 일이 안 풀린다고 해서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운이 찾아와 노크를 할 테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변덕스러운 우연의 변주곡에 리듬을 맞추는 것이다. 

  

신년이 되니 안부를 묻는 오래된 친구의 연락이 반갑다. 종종 이번 년 계획이 무엇이냐는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앞으로 그냥 재밌고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밌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매일의 오늘을 재밌게 사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한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나는 알고 있다. 재밌게 살자.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내일 죽어도 아쉽지 않게!


추신. 찾아보니 2년 전 새해에 이런 글을 썼다. <새해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생소하고 반갑다.


요새 재미를 느끼는 것들


- 글쓰기: <디지털 빅브라더> 원고를 다듬고 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면, 2021년 5-6월 즈음에는 출간이 될 것 같다. 다음 작품으로는 영화 에세이나 문학 리뷰 에세이를 구상하고 있는데, 잘 모르겠다. 우연의 장단에 리듬을 맞출 생각이다. 글쓰기를 의무감에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하고 싶을 때 실컷 배설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 영화: 집콕하면서 영화를 무지 많이 본다.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영화들이 무척 많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안타깝다. 넷플릭스와 왓챠에 감사하고 묵묵히 창작활동을 하는 영화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한때는 독립영화를 찍어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한 적이 있는데 생각을 접었다. 그만한 재능도 없거니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을 (스텝, 투자사, 배우 등등) 만족시켜가며 일하는 것보다 혼자서 글 쓰는 일이 나는 더 행복하고 재밌다. 


- 독서: 장르 안 가리고 다 읽는 편이다. 작년의 경우, 가장 많이 영감을 준 작가는 마광수와 기타노 다케시였다. 작가들의 작품을 정주행 하면서 나의 세계관과 그들의 생각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희망컨대, 이번 년에도 다른 작가들로부터 비슷한 영감을 받기를 원한다. 어설픈 작가의 책을 볼 바에는 읽었던 클래식을 다시 보는 것이 좋다.


- 재밌는 사람들과의 관계: 재밌는 사람들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상호 영감을 주고 받는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해 함께 재밌는 것들을 해 나가는 것이 최고다. 누군가 마음에 드는 한 가지 특별한 구석이 있다면, 그의 수많은 결점을 무시하고 친구가 될 수 있다. 평범한 사람 보다는 (적당한 수준의) 또라이가 좋다.


- 투자: 나름의 가설을 정립하고 집행한 투자가 높은 수익률로 실현되었을 때의 쾌감은 정말이지 엄청나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투자도 일종의 게임이다. 본인의 투자성향은 단기 트레이딩보다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하고 buy & hold 하는 스타일이다. 2020년은 자산 버블의 한 해였는데 2021년은 매크로 투자 환경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 일: 글쓰기는 부업이고 본업으로 하는 일이 있다. 따분한 일에 금세 질리는 성향인데 매일 급변하는 업계라 지루할 틈이 없고 재밌다. 일이 재밌다는 것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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