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혜빈 Feb 22. 2016

시베리아로부터의 사색 4

[넷째 날] 가장 지루했던 날


8월 20일, 지루한 날



갑자기 정리하고 싶어 진 시베리아 기차의 화장실  TIP!!!


 1. 변기에는 발자국이 많이 찍혀있다. 아마 거기에 구부려 앉아 용변을 보거나 창밖으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변기 위에 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 시간마다 한 번씩, 그래 봐야 15분가량 쉴 수 있는 정차역이 나오니 흡연자 입장에서는 담배를 참는 것이 고역일 수 있겠다. 따라서 여자들 같은 경우는 항상 휴지를 깔고 앉는 것이 좋겠다.


 2. 샤워를 하고 싶다면 물티슈에 물을 조금 더 묻혀 쓰면 되겠다. 물로 닦은 다음에 물티슈에 샴푸나 비누를 좀 더 묻혀서 문지르고 다시 물티슈로 닦아내면 최고의 샤워 방법이 될 것이다.


 3. 머리를 감는 것은(특히나 긴 머리 여성은) 고역일 수 있다. 나는 밖에서 5리터짜리 물 한 통을  사 왔고, 그걸 다시 2리터 통에 옮겨 담아 변기에 머리를 숙이고 뿌리면서 했다. 그리고 마무리로 머리를 완벽히 헹구고 싶다면 세면대(뚫려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로 막아줘야 한다. 나 같은 경우는 샴푸 뚜껑으로 막고 했다.)에 물을 받으면 된다. 사실 머리가 들어가기에 엄청 작은 세면대지만 어떻게든 넣을 수는 있다. (아니면 내가 머리가 크거나)



러시아에서도 똑같이 '도시락'이라 불리는 컵라면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는 러시아인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 컵라면을 두 번 이상만 먹어도 질리는데 매일같이 정말 맛있게 먹는다. 젓가락을 못 쓰니 항상 잘게 부 숟가락으로 떠먹는 모습은 아기를 연상하게 , 덩치 큰 러시아 아저씨 마저도 귀엽다는 느낌이 들게끔 한다.



기차 칸 마다 역무원이 배치돼 있는데 이들은 잠을 잘 수가 없다. 24시간 내내 정차역이 가까워질 때마다 직접 손님들을 깨워야 하고, 틈틈이 화장실 청소와 쓰레기 분리수거, 뜨거운 물 충전, 간식 판매 등의 잡다한 일까지 도맡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주일 내내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하면서도 안쓰러웠다. 3D 업종인 게 틀림없고, 만약 한국이었다면 누군가가 인권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역무원의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는 게 보여 진심으로 안쓰러웠다.


다른 서양 여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러시아 여자들은 엉덩이가 굉장히 탄력적이고 S라인의 허리를 갖고 있다. 이건 나이가 좀 있는 아줌마들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유전적인 부분도 큰 몫을 하겠지만, 우리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계속 운동을 시키는 것도  한몫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나의 펑퍼짐한 엉덩이가 부끄러워졌다. 탈린에 도착하면 운동을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 힙업!


뭔가, 내가 며칠 간 같은 자리에 머무르고, 내 주변의 승객들만 계속 바뀌니까 이곳의 안방마님이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환영합니다, 여기는 혜빈이의 3번 기차  칸입니다. :)


목사님 덕분에 내 마음은 한층 더 안정됐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기니 생활이 활기차 졌다.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를 항상 챙겨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들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었는지 한국에서는 잘 인지하지 못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스스로의 삶을 홀로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는 것, 이 사실을 먼 곳으로 떠나 그리운 이들을 생각하면서 깨닫게 된 것 같다.


오늘따라 화장실이 엄청 가고 싶었고, 나는 다급해졌다. 그러나 기차역과 가까워지면 문을 잠그기 때문에 나는 대략 20분이 넘도록 참아야 했고, 문이 열린 후에는 사람들이 몰려서  또다시 못 가게 되었다. 나는 너무 힘든 나머지 침대에 병자처럼 누워있어야 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은 정말 개운하다. 하하. 더럽지만 이런 메모마저 나중에 기억해두고 싶으니까 창피함을 무릅쓰고 적는다.


목사님은 단 걸 좋아해서, 사실 러시아인들은 어른들도 단 것을 정말 좋아해서 맛있는 간식을 많이 갖고 있다. 여긴 한국과 달리 노인들, 어른들도 간식을 정말 많이 찾는다. 할아버지들도 기차에서 내릴 때마다 ‘마로주나~ 마로주나~’하면서 아이스크림을 찾아다닌다. (러시아어로 마로주나는 아이스크림이라는 뜻이다.) 덕분에 나는 매일매일 하나씩 유진(목사님 이름)에게서 간식을 얻어먹고 있는데, 입이 즐겁다. 그래서인지 살이 조금씩 붙고 있다.



‘체보렉’이라는 빵을 먹었다. 납작 만두와 같은 맛이 나 맛있게 먹었다. 이 체보렉이라는 빵과 토마토 그리고 오이는 찰떡궁합이다. 그새 러시아 사람이 다 된 느낌이다.  또다시 이 야채를 소금에 먹고 있는 이들에게 내가 고추장을 꺼내 조금 뿌려줬더니 사람들의 얼굴이 금세 빨개지며 물을 찾는다. 그 모습이 참 재밌다.


오늘은  또다시 더운 날씨가 시작됐다. 여기는 날씨가 정말 이상하다. 러시아라는 나라에 무지했던 나는 이곳에도 여름이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놀라웠다. 직접 겪어보니 최고로 더울 땐 40도까지 오르고, 지금도 3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있다. 밤에는 13, 14도까지 떨어지는데 감기에 안 걸릴 수가 없다. 내가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모두가 놀란다. 나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무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 너무 더우니까 아무 생각도 못하겠다.


오늘은 외부 자극이 따로 없어서인지 지루한 하루다. 새로운 사람도 없고, 새로운 일도 없다. 글을 쓰는 지금도 이번 글이 가장 재미없게 느껴져 재미없게 써진다.



목사님은 사실 영어를 잘 하는 게 아니다. 내 생각엔 초등학생 정도의 대화가 가능한 것 같다. 그럼에도 나와 대화를 하려고 계속 노력해주셔서 감사하다. 핸드폰으로 번역을 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영어 단어를 찾아가면서 말을 걸어주기도 한다. (여기는 기차역 주변이 아니면 인터넷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얼마나 대화가 어려웠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쳐다본다. 내가 생각해도,  제3자의 입장에서 우리를 본다면 산타처럼 생긴 거대한 남자와 동양인의 조합을 신기하면서도 웃기게 생각할 것 같다. 꼭 열차 3번 칸 끝 쪽의 덤 앤 더머랄까.


하루에 한 시간씩 시차가 빨라지는 것이 신기하다. 덕분에 탈린에 도착해도 시차 적응은 필요 없게 됐다. 하루에 한 시간씩 시간을 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과연 정말 그럴까? 나는 지금 이 곳 안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길거리 비둘기 키우기, 여자들의 땋은 머리, 엉덩이에 꽉! 끼는 반바지는 러시아의 유행인 듯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그중에서도 길거리 비둘기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부러 먹이를 많이 주면서 사육하다시피 한다.


기차에는 주류 반입이 금지라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때 술을 마셨던 노동자들은 역무원의 눈을 피해 몰래 들여온 뒤 나와 함께 마셨던 것이었다. 기차 안에는 항상 러시아 경찰 2명이 끊임없이 순찰을 하는데, 하마터면 나도 같이 경찰에 불려 갈 뻔했잖아!!


오늘은 잠을 평소보다 적게 자서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더워서 시간이 안 가는 건지 너무 지루한 하루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여행할 때 입을 예쁜 옷부터 사야겠다. 지난 일주일간 여자이기를 포기한 듯 너무 추하게 살아온 것 같아서 웬만하면 거울도 보지 않는다. 괜한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다. 이런 경험을 이전에도 했었다. 토플을 공부하러 학원에 다닐 때였다. 공부하는데 무슨 외모 가꾸기야, 라는 생각으로 고등학교 때만큼이나 초췌하게 인사동 거리를 거닐던 때가 있었다. 여자라면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여자이기를 포기한 것 같은 외모를 끊임없이 보게 되면 괜히 서러움이 밀려온다. 그때도 이런 사소한 것이 정말 신경 쓰였는데.



이렇게 달려도 달려도 끝없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우리에게 땅이란 한평생 모든 것을 바쳐 지켜내야 하는, 그야말로 우리의 인생과 한이 담긴 것인데, 과연 ‘덩어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큰 땅을 가진 러시아인들에게 땅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널린 것이 땅인 나라에서는 인생에 있어서 어떤 가치에 욕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을까.


조금 오랫동안만 씻고 나와도 화장실에 대기 줄이 생기니까 눈치가 많이 보인다. 빨리 미지근한 물속에 들어가 샤워도 하고, 머리도 시원하게 감고 싶다.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치마도 입고, 구두도 신고 사람답게 다니고 싶다.


누워있을 때가 가장 에너지 소모가 적은가 보다. 그나마 덜 덥다. 가을에 열차를 탔으면 좀 더 좋았겠다. 적어도 더위 때문에 사색의 시간을 갖기 어렵진 않았을 테니까.


시베리아 횡단 열차 경험은 살면서 한 번쯤 해볼 만한 경험이라고 장담하지만 두 번은 아니다. 만약  또다시 이 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큰 도시별로 다 내려서 진짜 러시아를 경험하든지, 아니면 중국-몽골-러시아 코스로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혼자가 아니어라.


가끔씩 창밖을 보다 생각에 잠기면, 내가 이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혼자 뭐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 기차에 몸을 싣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웃기다.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기 시작했는지, 배가 고프기도 하고 먹을 메뉴를 생각하기도 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되면 한 가지 안 좋은 점은, 내가 이제 이곳에서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자극과 충격이 이전보다 줄어들어, 생각할 거리 또한 줄어들 게 될 것이라는 거다. 어쨌든 오늘 저녁은 카레를 먹어야지. 맛있겠다.


노래방이 너무 가고 싶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너무 마시고 싶다.


이 기차에서 나만 초췌한 것 같다.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리 못 씻고 후줄근하게 다녀도 처음 탈 때와 변함없는 모습이다. 특히나 저기 타고 있는 중학생 친구들은 정말 변함없이 그대로다. 그냥 예쁨과 못생김의 차이인가.


유럽 여행을 가본 적은 없지만, 그냥 사진 속으로만 보았을 때도 집들이 예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크게 땅 욕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 집 자체에 대한 가치를 높일 이유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딱 주어진 만큼, 필요한 만큼 집을 지으니 마을의 특성도 잘 드러나고 소박해 보이지만 그것이 더 멋스러워 보인다.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은 아닐 수도 있지만.


갑자기 콜라가 마시고 싶어 정차역에 내리자마자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고, 콜라를 손에 쥐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다. 살 것 같다. 아드레날린 폭발!


오늘 탄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중국인 2명은 러시아 청소년들과 친해져서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정말 재밌어 보였다. 유치한 이야기지만 다 같은 또래인데 나만 이렇게 혼자 있으니 소외감이 느껴졌다. 내가 살다 살다 이런데 있어 소외감을 느끼다니. 부러우니까 빨리 잠이나 자자 하는 마음으로 8시 반 정도의 이른 시간에 잠을 청했다.



- 나의 기차 여행 속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


 8:30 느지막하게 일어나 세수를 하고 창밖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

 9:30 또 잠들기(다들 10~11시까지 자기 때문에 나도 같이 잠이 온다.)

 10:30 아점을 먹고 차 마시기

 12:00 책 읽기, 다른 사람과 떠들기

 14:00 그 전 날 쓴 일기 핸드폰을 타이핑 치기(블루투스 키보드를 하나 들고 가서 편리했다.)

 15:00 낮잠 자기(이렇게 보니 잠만 자다가 온 것 같네)

 16:00 출출해져서 점저 먹기

 17:00 사람들과 떠들기, 멍 때리기

 20:00 씻기

 21:00 누워 있다가 일기 쓰고 잠들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완벽한 잉여의 하루 같다. 하하.



매거진의 이전글 시베리아로부터의 사색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