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한 번은 행복해지고 싶었어..

by 정민유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결혼생활.

당사자인 두 사람이 힘든 건 당연했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땠을까? 비록 다정한 엄마, 아빠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다.

나의 부모님 같이 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교육심리학과를 선택했다. 지식으로 좋은 엄마가 되는 비결을 배우고 싶었었나 보다.


아이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같은 눈높이를 가진 친구 같은 엄마. 그렇게 되려고 애쓰고 노력했다. 뭐든 하지 못하게 했던 아빠에게 한이 맺혔던 나는 딸들이 원하는 건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아니면 최대한 허용해 줬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해주려고 했다.


딸들의 생일에는 초대장도 같이 만들고 집에서 떡볶이, 닭찜, 계란샐러드, 김밥, 케이크 등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파티를 해줬다. 큰딸 초등학교 1학년때는 반친구들 전체를 초대한 적도 있다. 세 딸의 생일마다 6학년 때까지 해줬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학원이 별로 없는 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영어, 논술, 미술등 과외 팀을 짜고 우리 집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과외지도를 받게 했다. 끝나면 더 놀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마음껏 놀게 하고 저녁까지 먹고 가게 했다.


그리고 시간 날 때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한바탕 댄스파티를 하곤 했다. 여행을 갈 때면 차에서 동요테이프를 틀어놓고 목청껏 쉬지 않고 노래도 불렀다. 아이들이 나중에 기억하는 것도 이런 즐거웠던 장면이었다.




큰딸이 6학년 때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겠다고 해서 직접 선거포스터도 그리고 선거유세송도 지어서 부르게 하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선거 때 쓸 피켓도 제작했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건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지원하고 싶었다.

음악경연 대회에 나가겠다고 해서 성악과 클라리넷

레슨을 집중적으로 시키고 상을 타서 연주회를 할 때 연두색 드레스를 고르고 리본까지 같은 색으로 만들어서 마음껏 재능을 뽐낼 수 있게 했다.


6학년 때 첫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며 그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서 맛난 음식도 해주고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큰딸이 뭐든 잘해서 둘째가 스스로 위축될까 봐 둘째에게 더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었다. 자식이 셋이었지만 다 아롱이다롱이라고 걔네들 성향에 맞는 양육을 하려고 노력했다. 언니의 입시를 옆에서 지켜본 중3이 된 둘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 엄마 난 꼭 미국에 유학을 가고 싶어 한국에서 입시를 할 자신이 없어."라고 했고 한번 떠나면 언제 같이 살지 모르지만 딸의 앞날을 막을 수는 없어서 유학을 가도록 도와줬다.


사실 밀레니엄 베이비로 태어난 늦둥이인 막내딸은 체력적으로도 버거웠고 상담공부를 시작해서 언니들만큼 많이 놀아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했다.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고 유독 춤을 잘 추는 딸을 적극 지원해 줬다.

" 엄마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라는 딸에게 설득시켜 봤자 걔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 공부 안 하고 대학 안 가는 거 엄마는 괜찮아. 네 인생이니 네가 책임지면 돼" 라며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지도록 했다. 한 번도 공부 안 한다고 안달해 본 적이 없다. 결국 자신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았고 그 이후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사실 따뜻한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헌신과 희생적인 사랑을 흘러 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엄마가 자식을 셋이나 낳았고 그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된다는 건 억지로 짜내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노력을 했다고는 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미숙한 것 투성이었다.


내가 받은 상처를 내 자식에겐 절대 주지 않으려는 피나는 노력.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엄마.

막내딸이 예전에 얼핏 했던 말이 있다.

"엄마는 결국 엄마의 행복을 선택한 거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보고 싶지 않았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 같았다.

그 말을 하는 딸 앞에서 난 죄인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건 맞지..."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혼 후 불쑥불쑥 죄책감이 올라올 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한 아픔,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

내가 한 선택에 대한 결과이니 담담히 받아들이는 방법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나의 첫 번째 결혼생활에 대한 글을 쓰며 '내가 이렇게 힘들었었지..' 새삼스럽게 느끼며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를 내가 공감해 주게 되었다. 사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묻어두었던 오래된 상처들이다.


그 상처들을 글로 쓰니 그때의 내가 객관적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그렇게 맞지 않는 사람과 30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이유 중 가장 큰 건 딸들이었다. 유일하게 날 힘들게 하지 않았던 존재들... 기대이상으로 항상 기쁨을 가져다준 내 분신들. 이혼의 상처를 믿음으로 이겨내며 오히려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막내딸.


막내딸이 작년에 다시 만나고 나서

" 엄마는 우리 같은 딸들 가진 거 하나님께 감사해야 돼. 얼마든지 삐뚤어질 수 있었는데 주님께서 우리들을 단단히 붙들고 계셨잖아"라고 했다.

" 그럼 너무 감사하지. 너희들은 엄마에게 축복 같은 선물이야. 너무 감사하고 이렇게 잘 자라줘서 고마워.. 힘들 결혼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너희들이 있었기 때문이야. 한 번도 엄마를 힘들게 만들지 않았어. 그리고 엄마가 부모님이 이혼한 상처를 겪어보지 않았기에 너희들 마음을 다 알 수가 없지. 그것처럼 엄마도 너희가 모르는 아픈 세월들이 많았어."


그리고 이제는 용기 내어 딸들에게 말하고 싶다.

" 엄마도 한 번은 행복해보고 싶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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