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만년필 덕후가 되다니!!

작가 남편 따라쟁이

by 정민유


내 인생에서 만년필이란 물건에 대한 관심은 거의 0에 가까웠다.

뭔가 구 시대의 유물 같은 느낌이랄까..?

만년필로 글을 써본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작가인 남편은 만년필을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결혼선물로 뭘 갖고 싶냐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몽ㅇㅇ 회사의 코랄색 만년필이라고 말하는 그.

꽤나 비싼 가격이어서 좀 놀라긴 했다.

'만년필이 이렇게 비싼 것도 있구나..."


사러 갈 때부터 들떠서 흥분을 하더니

사서 돌아오는 내내 얼마나 환호하며 기뻐하는지...

"내가 이 걸 갖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처음에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이해해야 하는 이유조차 몰랐다.


(만년필 산 날 남편이 그린 나)


남편 책장엔 잉크를 넣는 커다란 박스가 있다.

거기엔 다 비슷해 보이나 조금씩 다른 색상의 잉크들이 잔뜩 들어있다.

그 잉크들도 물론 난 소 닭 보듯 했다.


그런 나에게 작년부터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고 올 2월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작가라는 말이 싫지 않았고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글을 쓸 때와는 사뭇 다른 무게감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게 나와는 먼 일이라 생각하며 살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자 엄청난 에너지가 터져 나왔고 2달 동안 정신없이 글을 썼다.

그동안 쌓여있던 글감들이 많았었나 보다.




사실 난 글을 쓸 때 스마트폰에 엄지손가락 하나로 글을 쓴다.

굳이 종이에 만년필로 글을 쓸 필요는 없는 시대이니..

그래도 항상 옆에서 노트에 만년필로 글을 쓰는 남편을 3년 가까이 보고 있자니 나도 따라 하고픈 욕구가 올라왔나 보다.


작년부터 만년필의 세계로 들어오게 유혹하는 남편의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의 라미 만년필을 사주기도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그마한 만년필을 써보라고 하기도 했다.

남편의 물귀신 작전은 계속되었다.

"상담할 때 만년필로 쓰면 멋지잖아"

"아.. 그럴까..?"


처음엔 글씨가 굵게 써지는 만년필의 필기감이 부담스러웠다.

또 종이 뒷 장에 묻어나는 것도 신경이 쓰였고..

그런데 쓰면 쓸수록 만년필만이 가지는 촉감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어갔다.

그래도 잉크를 채워 넣어야 하고 수성펜보다는 조심스러운 만년필이 완전히 익숙하진 않아 다시 수성펜으로 쓰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 내 눈을 홀리는 아이가 나타났다.

PARKER 51 GT 디럭스라는 아인데 PLUM 색에 황금빛 뚜껑을 쓴..

딱 보기엔 검은색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짙은 보랏빛이 감돈다.

뚜껑은 골드색인데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고 영롱하게 빛을 발한다.

남편은 그런 아이를 나에게 쓱 내밀며


"당신한테 딱 어울릴만한 만년필을 찾아냈어"

"이게 뭔데? 엄청 예쁘네"

"그치? 그치? 한 번 써봐 봐"

"오올~ 별로 굵지 않고 느낌이 좋다"

"거봐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어"

"그렇게 좋슈?"

나보다 더 기뻐하는 남편.


"만년필이 왜 만년필이냐면 평생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야. 이건 3대 만년필 중에 하나인데 나도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거야.....(중략)"

남편은 만년필에 대한 이야기는 그 후로도 쭈욱 이어졌다.

말을 하는 남편의 표정이 유난히 행복해 보였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 쭈욱 같이 간다는 말이 날 만년필 덕후의 세계로 끌어들인 결정적인 말이었다.

작가에게 친구 같은 존재인 나만의 만년필을 갖는다는 거!!

생각만 해도 가슴 따뜻해지는 일이다.


(이건 남편 손입니다 ㅋ)


그래서 이렇게 그 아이의 집도 장만해 주었다.

이쁜 아이 뚜껑에 기스나면 안되니까...ㅋ


결국은 나도 남편 따라쟁이로 영락없이 만년필 덕후가 되어버렸다.

"얘야 우리 오래오래 함께하자꾸나.."


아침에 이 글을 쓰고 오후에 갑자기 든 생각.

그럼 내가 가수 남편을 만났다면 나도 노래를 부르고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을까?

그건 아닐 것 같다.

화가 남편을 만났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

어릴 때부터 그림은 좀 그리는 편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다는 건 내 안에 있는 재능이나 욕구가 건드려졌기 때문이겠지.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지만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건 아니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