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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H Oct 06. 2022

03. 오래된 독설가의 말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는 그것들

모든 나이 많은 아빠가 그러는 건 절대 아니지만...


우리 아빠는 엄청난 독설가다.


말이 좋아 독설가인 거지 쉽게 표현하면 그냥 언어 순화하지 않고 막말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말의 억양이 세고 생각과 표현 자체가 거칠다. 그리고 가려서 말해야 할 때조차 적절한 단어 선택을 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는 일이 많다.


내가 어릴 적에는 주변 사람들이 언니와 나를 칭찬을 해주면 그제야 조금씩 들여다 봐주기 시작했을 정도로 자녀의 일상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에는 아빠 개인의 성격과 기질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빠와 나와의 '나이 차이', '세대 차이'였다.


아빠의 어린 시절에는 모두가 힘들었고 각자도생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정서적 따뜻한 보살핌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정의 기본 틀은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이 많은 독불장군의 생각 위주로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더불어 아빠는 자녀에 비해 나이가 많아 체력적으로 힘이 금방 달렸고 정서 체계가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과 전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자녀를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나이 차이가 덜한 엄마의 몫이 됐다.


이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빠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다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줄었고 그러면서 점차 관계가 멀어졌다.


언니와 내가 사춘기가 돼서가 아니라 가족 모두가 서로에게 교감할 틈을 내어주지 않아서 점점 서먹해졌다.


내가 자라면서 가장 서운했던 부분은 이거였다.


아빠는 '우는 어린아이'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 때는 어린 자녀가 울면 '뚝-!'이라고 말하거나 '울면 크리스마스 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신다!' 등의 반협박적인 말을 들었다. 심지어는 '이거 하면 뭐 사줄게.' 등의 헛된 공약 남발로 울음을 그치게 만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말들이 들어 먹히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정작 왜 우는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얼른 그치게 만드려고 애쓰는 어른들의 얄팍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빠는 이러한 말들을 생각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이라고 판단을 하신 모양이다.


어릴 적부터 아빠 앞에서 울거나 티격태격 큰소리 내면서  싸우면 이유는 들어볼 생각도 없이 좋은 소리 듣기 힘들었다.


그래서 눈치가 빨랐던 언니와 나는 되도록이면 아빠 앞에서 어리광을 피우거나 때를 쓴 적이 없었다. 만약에 언니와 내가 눈치 없이 굴었다면 아빠는 화를 달고 살았을 것이다.


아빠보다 엄마가 덜 엄격하게 훈육을 하기도 했고, 아빠만큼 매정하거나 단호하지 않아서 늘 정서적으로 엄마한테 기대는 일이 많았다.


하루는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6살인가 7살인 나를 데리고 노량진 수산시장을 간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공중 화장실에 가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체력이 금방 달려서 조금 걷다가 다리 아프다고 말할게 뻔한데 말이다.


평소에 그렇게 쫑알쫑알 말 많은 아이였던 내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아빠 옆만 졸졸 쫓아다녔다. 내가 그렇게 긴장하면서 아빠 바지춤을 잡고 다녔던 이유는 나쁜 사람으로부터 유괴를 당할까 봐 그랬던 게 아니라 아빠가 나쁜 사람이랑 편먹고 내가 한눈파는 사이에 노량진 시장에 버리고 갈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친아빠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정서적 교류가 없었던 탓에 나의 상상력은 무한대로 커져서 극도의 긴장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날 내가 아무런 말썽도 피우지 않고 얌전히 아빠 옆에만 졸졸 따라다니는 게 기특했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역 근처 구멍가게에서 당시에 제일 고급이었던 액설런트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어주셨다. 물론 밖에서 먹다가 흘리는 불상사는 아빠와의 외출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에 집에서 엄마의 허락을 받고 먹어야 했다.


지금까지도 아빠의 기억 속 언니나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부린다거나 때를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3년 전 손자가 태어났을 무렵, 손자가 시도 때도 없이 이유 모를 울음이 터지면 '왜 이렇게 우냐?'면서 너희들은 어릴 때 안 그랬다면서 우리의 과거를 포장하고 미화시켰다.


애는 애니까 우는 거고... 내가 아는 나는 엄청난 울보였는데...?


지금 가끔씩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소리 지르면서 놀거나 엉엉 우는 소리가 크게 나면 아빠는 그 소리를 듣고 신경질을 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내가 '나도 어릴 적에는 소리 빽빽 내지르면서 놀았고... 현재 아빠 손자도 놀이터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놀던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가볍게 묵살당했다.


그냥 시끄럽다며 이해 못 하겠다며 매번 성질을 낸다.


으... 할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아빠가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 필터 없이 들었을 텐데...


그러면 저렇게 당당하지 못할 수 있는 건데...


할머니! 절 보고 계신다면 정답을 알려주... (아니면 로 tto 번호라도...?)




아빠는 이렇게 세세한 자녀 교육에 관심이 없는 늙은 사람이었던지라 상대적으로 젊었던 엄마는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일이 많았다.


괜히 자녀 교육 문제로 아빠 귀에 들어가서 집안에 큰 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엄마는 언니와 나에게 지덕체에 대해서 매일같이 잔소리를 하셨다.


엄마가 아빠의 큰소리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머리 나쁜 사람들 없다! 이런 점수받은 거면 공부 집중력이 떨어진 거 아니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거야 뭐야? 공부 머리는 11살 때 판가름이 나는 거야. 그때부터 공부로 안 되겠다 싶으면 빨리 결정을 내려서 머리 깎고 공장에 취직이나 해! 뭣하러 학교 가서 공부를 해?'


이 말은 언니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중간고사 성적표를 가져온 이후로 아빠가 수도 없이 했던 말이다.


정말 옛날에 살아본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런 유형의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잔소리를 몇 절씩 하는데 듣기 좋아하는 사람 어디 있을까?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언니의 성적표는 특정 몇 과목을 제외하면 꽤 나쁘지 않았었다. 오히려 언니 본인이 제일 당황스럽고 속상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 처음 있는 일이어서 모두가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번 실수를 도약의 기회로 삼아 점점 나아질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아빠는 언니의 공부 방식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 보고 방법을 찾으려 하기보다 윽박지르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언니는 다음번에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보다 그냥 악에 바쳐 마음이 비비 꼬여버렸다.


더불어 언니는 사춘기, 아빠와의 악화된 관계와 학업 스트레스로 급체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러면서 아빠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아빠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언니나 나는 외모, 성격, 체형 등이 정 반대이기도 하고, 나도 점점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언니와 서로 격렬하게 싸우다가 얼굴, 손, 팔에 생긴 상처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로 엄청 싸우는 일이 많았다.


자매들끼리의 몸싸움이 무섭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들이었다.


보다 못한 엄마는 지인에게 소개받은 기관에 우리를 데려가서 성격검사를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성격 분석과 상담을 통해 우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 노력하셨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거 따위는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매번 우리가 싸울 때마다 나란히 앉혀놓고 '저기 달동네에 공용 화장실 쓰는 곳 단칸방 하나 얻어 줄 테니까 둘만 나가 살면서 실컷 싸워!'라고 윽박질렀다.


이러면 자매의 우애가 깊어진답니까?


뭐가 서로 안 맞는지, 어떤 부분들을 서로 건드리지 말고 배려하고 양보해야 하는지 등 차분한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 하기보다 우선 모진 말들로 울려서 감정이 극에 달하게 만들어 놓고 엉엉 우니까 그냥 앞으로 싸우지 말라는 말로 허무하게 끝내버렸다.


아빠는 이렇게 처음에는 뭐라고 호통을 치다가 뒤에 가서 감정적으로 풀어주는 과정을 자신만의 최고의 방식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TV 방송에서 독설을 퍼붓는 연예인들을 보면 재수 없고 꼴 보기 싫다고 말하는데...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오래된 독설가의 이런 생각 덕분에 지금까지도 마음속 상처로 남아있다.


가끔씩 감정적으로 불안을 느낄 때마다 아빠의 독설들이 맥락 없이 튀어올라 가슴을 후벼 판다.


이제는 오래 묵은 독설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해 퍼붓지만 예전만큼 먹히지 않으니 나랑 말 섞기 싫다면서 역정 내는 일이 태반이다.


그 아빠에 그 딸이라고 나도 아빠의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보면 미친 듯이 쏘아대며 살고 있다.


이래서 보고 배운 것이 무서운 거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빠여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그냥 우리 아빠의 특징이 이런 걸까?


내 생각에는 반반이다.


아빠 시대 때는 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복을 누린다고 여겼다.


어린아이들이 연령에 알맞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던 때였다. 형편상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조금이라도 어수룩하게 행동하면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이라 해도 '못 배워서 이러는 거다'라는 소리를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부할 머리가 안 되는 거 같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공장이나 가서 돈이라도 벌어오라는 겁을 줬던 거 같다. 그때는 이것이 선택이 아니라 현실이자 닥치면 해야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의무교육으로 전환돼서 언니와 다르게 겁을 주려는 말이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가 표현하는 '달동네'가 개발 지역이 되면서 없어지는 추세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는 아빠가 우리 나이에 비해 너무 늙어서 일찍이 부모로부터 독립을 시키려 한다는 오해를 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부 오해는 아니었고 75% 정도는 아빠의 진심이었던 거 같다.)


지금은 다른 이유로 나가 살라고 하지만 아빠가 나에게 의존하며 사는 부분이 많아져서 이제는 서로에게 독립하는 일이 어려운 선택이 되어 버렸다.

 



현재 아빠는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독기가 많이 빠진 상태다.


하지만 생각 필터링을 이전보다 더욱 안 해서 여전히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특히 나에게)


오래된 독설가의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계신다.


한결같은 사람인 건 분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중에 나도 똑같은 모습으로 늙어있을까 봐 미리 걱정이 된다.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지만...

그 아빠에 그 딸이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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