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밀리H Nov 16. 2021

잡일

Job & Work

신입사원이 시간이 많다는 건 사실이긴 합니다. 


초반에만 OJT 하고 부서마다 인사하러 다니고 인사팀에 개인 서류 제출하면서 시스템 등록을 하느라 바쁠 뿐이지 이후로는 널널해요. (물론, 회사 규모와 직무, 사정에 따라서 신입의 입장이 천차만별이긴 합니다.)


단,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룹웨어에 올라와 있는 회사생활 매뉴얼들을 꼼꼼히 읽어보면서 전반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가령 회의실 예약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출퇴근 체크하는 방법 그리고 연차 신청이나 외근 나갈 때 보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업무일지와 주간 보고는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등 누가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빠르게 숙지해 놓는 것이 좋아요.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비품, 탕비실 관리, 법인 카드 영수증 정리 방법, 퀵이나 택배 요청하는 방법, 전화 응대 방식 등 소소한 것들을 잘 캐치하고 있어야 해요. 보통은 필요한 물품들이 있으면 부서별로 취합해 한 사람이 한 번에 정리해서 요청을 하게끔 만드는데 부서별로 따로 경리직원을 두지 않는 이상 그것이 결국 신입사원의 몫이 됩니다. 


그래서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행동해서 자신을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내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 하려고 밤새가며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 준비하고 했던 게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현타가 올 수 있어요. 입사하기 전까지는 상사분들을 서포트하면서 함께 노력하고 성과를 일궈내는 모습을 상상했겠지만 실제 신입사원에게는 그런 일이 쉽게 주어지지 않아요. 이때는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어요. 


한편으론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 너무도 잘 알면서도 상상과는 너무 다른 현실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다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괜히 그런 부수적인 업무에 의미부여를 하면 구차해지는 거 같아 망설여지기도 하고, 이런 거라도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심혈을 기울여서 노력하지만...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에요.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잡일'같은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혼나기라도 하면 쉽게 주눅이 들어요. 본업을 못해서 혼나면 이렇게 까지 힘들지도 않을 텐데 별것도 아닌 일로 된통 혼나기라도 하면 그날은 알코올 각을 세우고 싶어 져요. 그래도 상사의 개인적인 일로 뒤치다꺼리를 안 하는 게 어디냐며 위로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데.... 그것 또한 너무 짠해서 스스로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해요. 


괜히 일하는 척해보려고 브라우저 창 여러 개 열어놓고 엄청 골똘히 생각하는 척을 할 때도 있어요. 그리고 틈틈이 키보드를 쳐주면서 업무 노트에 받아 적는 척도 해요. 그리고 화장실도 너무 자주 가면 눈치 보여서 나름의 시간 간격을 조정한 다음 바쁜 척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요.


하지만... 이렇게 눈치껏 행동하면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요? 


당일 업무일지에 커피 찌꺼기를 청소했고, 회의실을 예약했으며, 누군가의 부름에 대답을 잘했다고 쓸 수는 없잖아요. 하루를 돌이켜 생각해 봤을 때 모니터 앞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었던 기억밖에 없는데 무슨 권리로 말을 지어내면서 업무 일지를 작성할 수 있을까요?


가끔씩 보면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인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래서 시간을 금이라고 여기는 이 시대에 자질구레한 것들 설명할 시간을 줄이려고 경력 신입을 선호하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해요. 다른 곳에서 회사생활을 어느 정도 해본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새로운 것들은 감각적이면서 빠르게 익히고 적응할 테니까요. 


이래서 취업을 못하고 있어도 문제고, 입사를 하고 나서도 여러 갈등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집니다. 


취업을 해도 지랄 못해도 지랄... 


우리는 참 지랄 맞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전 04화 뒤돌아서면 딴 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